런던, 테이트 모던

낯섦과 마주하는 시간

by inspiration

누군가 나에게 전시 보는 것을 왜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전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그리고 작가의 시선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낯섦’을 그 매력으로 꼽을 것이다.



1. 낯선 공간


미술관이라는 비일상적인 공간이 주는 기분 좋은 낯섦은 잠시 나를 일상에서 먼 어딘가로 데려다주는 듯 하다.

2년 만에 비행으로 찾아 간 런던 테이트 모던의 문을 열자마자 역시 기분 좋은 낯섦을 느끼며 시작했다. 미술관 특유의 냄새가 묻어있는 공기를 한 숨 가득 들여마시니, 대학생 때 처음 방문했던 그때의 그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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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펼쳐진 넓은 공간 곳곳에 몇몇 사람들은 벌러덩 누워있다. 또 다른 몇몇은 바닥에 철푸덕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전시관 내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의 보통의 조용한 미술관 분위기와 달리, 사람들은 작품 앞에 한참을 서서 토론하듯 열띤 대화를 나눈다. 누군가는 명작 앞에 이젤을 펼치고, 물감을 늘어놓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전시를 그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소통하고 있다.


작품을 보기도 전에 마주친 생기 있는 공기를 들이마시며, 이 곳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한다. 자, 이제 두 번째 매력적인 낯섦을 만나러 갈 시간.


2. 낯선 시선


같은 색이라도 개인에 따라 모두 다르게 인지한다고 한다. 이는 각자의 기분, 색에 대한 기억, 심지어 출신과 시력 등의 개인적인 요건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색에 대한 상대적인 인식 이야기를 읽다 보니 단연 색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딴 길로 새어 칸트가 떠올랐다.

같은 것을 다르게 인지한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눈 앞의 컵을 보며 이게 뭐냐고 묻는다면 누군가에겐 그저 '물잔'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컵이 아닌 다른 쓰임새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컵은 그러면 진짜 컵인가? 컵일 수도, 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 우리는 컵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개똥 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너무 재밌잖아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그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같은 것도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이게 내가 예술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


테이트 모던에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상설 전시 또한 너무 멋진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첫 번째 방의 주제는 ‘COLOUR’. 예술가들은 생각이나 기분, 어떤 공간을 탐구하면서 느낀 느낌을 색이라는 요소로 표현해낸다. 이 방에서는 작품에 쓰여지는 ‘색’의 개념을 확장시키고자 한 20-21세기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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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품은 조셉 알버스(Josef Albers, 1888-1976)의 ‘Study for Homage to the Square’.

작품명을 그대로 번역하면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 이 그림 속의 색은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또는 터널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는 색의 조합과 관계를 섬세히 연구하고 실험하며 백 가지의 버젼을 만들어냈다.


정말 신기하게도, 런던에 오기 며칠 전 인터넷에서 보고 너무 좋다-고 생각했던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버전의 색 조합이 좋아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한참을 들여다봤었던.


이 여러 개의 겹쳐진 사각형 중 한 가지 색이라도 없다면, 그림 자체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 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색의 상호작용에 주목했고, 색은 하나로서만 인식되는 게 아니라 주변 색들과의 상호작용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인지했다. 우리가 평상시에 인지하는 색도 그렇다. 어떤 물체의 색은 그 물체가 놓여있는 또 다른 물체의 색, 그 공간의 조명, 주위의 사물들과 함께 인지되는 색인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있는 장소, 나와 함께하는 사물들과 함께 존재하는 삶, 서로 상호작용하고 때론 겹쳐 있는 삶. 조셉 알버스가 그토록 연구한 색채의 상호작용처럼, 내 주변의 것들을 섬세하게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색이라도 더 아름다운 색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의 시선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닐까. 잠시 이런 생각에 잠겨있다가 다음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제로 꼭, 보고 싶었던 모네의 수련 작품이 크게 걸려있었다. 상설 전시관에 모네라니! 산책하듯 들어갔다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연달아 마주치니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파리에 갔을 때 오랑주리 미술관을 들리지 못한 아쉬움이 컸는데, 그 아쉬움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멀리 떨어져서 보아도 눈을 떼지 못 하게 만드는 색감이었다.


그림의 주인공인 수련보다도 수련 옆에서 빛이 비치는 연못의 윤슬이 너무 아름다웠다. 모네가 이 연못을 그릴 때 주변 풍경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비치고 있었을 지 상상하게 되었다. 또 그 풍경을 바라보고 담아내는 모네의 시선이 그보다 아름다웠던 건 아닐지. 그의 세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색들이 존재하고 있었겠구나, 하고 감탄하며. 아마 같은 연못을 보고 있었을지라도 절대 나는 이렇게 표현하지는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한참을 큰 화폭 안에서 시선을 옮기다 보니 언젠가는 파리에 있는 모네의 연못의 실제 장소인 지베르니 정원을 꼭 방문하겠다는 목표(?)도 하나 만들며, 이럴 땐 비행이 좋긴 하구나 생각도 잠시 하고.(물론 이 생각은 인바운드 비행기에서는 피곤과 함께 바로 사라질 예정이다)

원래 보고 싶고 내 눈에 들어오는 작품만 열심히 보는 타입이라, 모네의 감동을 여전히 안은 채로 다른 전시관도 슥슥 빠르게 둘러보았다. 다음 번에 다시 이곳에 오면 방금처럼 지나쳤던 작품들이 또 새롭게 보일 지도 모르겠다. 같은 책이나 영화도 여러 번 반복해 보면 새로운 부분이 눈에 띄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음 번에는 어떤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이 곳에 방문하게 될 지 기대해보기로 한다.



잠시 테이트 모던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인다.


TATE MODERN
International modern and contemporary art
OPENING TIMES
Sunday to Thursday 10.00–18.00
Friday to Saturday 10.00–22.00

이 미술관은 탄생부터 범상치 않다. 테이트 갤러리가 산업혁명 시절의 화력 발전소를 개조해 완전히 새로운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벽돌로 만든 기념비적인 벽면과 세로로 긴 선을 만들어 내는 창문, 그리고 랜드마크인 굴뚝과 같은 예전 외형은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내부는 완전히 개조되었다.
아트샵과 상설 전시, 기획 전시 그리고 템즈 강을 바라보는 전경의 카페까지.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런던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런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왠지 모르게 런던스러운 느낌이 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런던이 이 건축물의 구성에 벽돌의 검댕같이 스며들어 있다."
로완 무어, 건축 비평가




Josef Albers
Monnet
아트샵에서 마주친 반가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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