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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Feb 02. 2019

지금, 겨울 정선.

태백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십 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얼굴도 생김도 모두 다 달라져서 겉모습으로는 알아볼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이름이 같으니까 이 친구가 내가 아는 사람이다 짐작할 뿐. 처음 말을 꺼내기까지는 이토록 어색할 수가 없다. 더듬더듬 과거를 더듬어 서로를 애써 기억하다 보면 그제야 우리의 추억이 한 장면씩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도 같다. 아주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게. 그렇게 아름답게. 오늘 아침 이십 년 만에 다시 무궁화호에 올랐다. 여전히 작은 역들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싶다.


스무 살 무렵부터 강원도와 동해바다는 mt로 대변되는 설렘의 결정체이자 청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춘천 가는 기차 노랫소리만 들려도 설레던 밤들이 한아름이다. 주로 날아서 가야 하는 제주의 푸른 밤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랄까.



언제라도 청량리역에서 기차표 한 장이면 거대한 태백산맥을 건너 푸르고 깊은 바다를 만나러 달려갈 수 있었으니까. 대학생에게는 부담 없이 떠날 수 있는 그리움의 원천과도 같았다. 정작 막상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몇 번 되지 않지만. 언제나 돌아보면 아쉬운 것은, 그 시기를 더 풍성히 누리고 지나왔어도 좋았을 거라고. 이런저런 생각이 쉼 없이 떠오르는 걸 보니, 오랜만의 기차여행이 좋긴 좋은가보다. 쉴 새 없이 두 시간 남짓에 부산을 주파하는 ktx도 감사하지만, 오히려 느리게 건너가는 기차가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차창 너머의 겨울 산은 잿빛 일색이다. 바싹 마른풀들은 이름과 관계없이 하나의 색으로 점멸해 간다. 이 잿빛은 결국 흙으로 귀결되고, 그늘에 따라 농담은 있을지언정, 컬러 팔렛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푸르던 잎들은 제일 먼저 푸른기가 가시고, 알록달록하던 낙엽들도 결국은 말려 구겨지면서 잿빛으로 물들어 버린다. 색은 사라지고, 작고 비틀어진 형태만 혹은 껍데기만 남는다. 여름 내 무겁던 열매와 잎들을 다 떨궈낸 가지가 앙상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입장일까. 힘겹게 일 년 치 일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휴가를 즐기는 기분일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끝도 없는 섬세한 잿빛 선들만 남아 깊은 태백산맥의 산세를 세밀화처럼 그려낸다.


산맥을 지나는 기차는 수많은 밤을 맞는다.



불쑥 터널을 지나는 순간 예상치 못한 암흑 속에서 시야도 잠시 휴식을 누린다. 지나면 또 동일한 풍경의 일색 이건만, 툭 툭 끊어주는 터널 덕에 지루함이 덜한 편이다. 세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있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영월. 다음 역은 목적지인 정선군의 예미역이다. 종착역이 아닌 기차역에서 내린다는 것은 기묘한 긴장감을 동반한다. 내리기 10분 전부터 1분 단위로 시계를 보기 일쑤고, 언제부터 일어나 짐을 챙겨야 하나 옆사람의 눈치를 살피기 바쁘다. 특히 단체로 내리는 경우 혹여 혼자 내려야 하는 타이밍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하다.


동강 강가의 강원도라면 예상되는 밥상은 둘 중 하나다. 산에서 왔거나 강에서 건졌거나. 시작은 그 유명한 곤드레밥이었다. 들기름에 지진 두부를 시작으로 곤드레 반 쌀 반인 가마솥밥에 양념장을 듬뿍 얹어 썩썩 비벼 크게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 그래, 이 맛이야. 깊고 위압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산 아래서 맛보는 시래기 된장국과 곤드레밥의 깔끔한 조화. 딱히 수식어를 길게 붙이지 않아도 뚜렷이 느껴지는 산세의 향기가 온통 입안을 감돈다. 넉넉히 배가 부를 즈음 가마솥에서 눌인 곤드레밥 누룽지를 들기름에 살짝 튀겨 주시는데 한 조각 부숴 입에 넣으면 깻잎 부각같이 고소한 맛이 진하게 감돈다. 서울에도 곤드레 식당이 나날이 늘어가는데,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곤드레에 떼루아를 말하기 지나친지 모르겠지만, 도시에서 먹던 나물과는 확연히 다른 향이 난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아는 분의 마이크로 브루어리와 잼 공장 견학이다. 식품 공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의 현장 실습에 감사하게도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이 공장들의 사장님 역시 이번에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새 학기엔  학생이 되신다고, 동기가 될 까마득한 후배들을 직접 데리러 역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정선이라는 지명은 산골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공장에 들어오니 신세계다. 최근에 완공한 브루어리에서는 맥주를 사람이 나르는 법이 없다. 전부 거의 자동화 시스템을 거치기에 관을 따라 맥주가 진공의 힘을 빌어 옮겨 다닌다. 관리자들은 기계를 조절해서 온도와 습도를 맞추고, 숙성 시간을 재고 계산할 뿐. 직접 몸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엇을 '수제 맥주'라고 부르는가. '수제'(handmade)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무조건 사람이 고생을 해서 만드는 것만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대규모로 식품을 만드는 과정에 안전성은 필수, 오염을 막기 위해선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안전한 수제 식품'이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밤의 무제한 맥주파티를 뒤로 하고, 이른 아침 다시 잼 공장을 찾았다. 새벽부터 농축을 시작해야, 퇴근 시간에 맞춰  작업이 끝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연구원들처럼 옷을 갖춰 입고, 공장 안에 들어섰다. 공학도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일까, 신기한 대화들이 오간다. 이렇게 잼이라는 먹거리에 대해 수치를 많이 들은 것은 오늘 이 처음이다. 당도를 가리키는 브릭스부터, 수분 증발량, 농축 시간, 분당 증발량 등 일행 중 홀로 문과생인 내게는 온통 외국어들 투성이다. 제품의 맛보다, 살균과 미생물 관리에 더 초점을 맞춰서 보는 잼 공장 견학이라니. 한 바퀴를 돌아보고, 오늘 갓 나온 사과잼을 시식하기 위해 둘러앉았다. 동네에서 사 온 식빵에 잼을 바르는데, 공장 사장님과 교수님께서 기공이 고르게 나온 식빵이 제대로 발효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태어나서 식빵의 단면을 보며 기공 크기를 주시하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식빵 하나도 바라보는 프레임의 차이가 이렇게 다른가 싶다. 


서울로 다시 올라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마지막 동강 밥상을 받았다. 충청도 방언으로는 올갱이라고 부르는 동강의 다슬기해장국 집이었다. 맑은 다슬기 해장국과 다슬기 순두부 두 가지를 주로 내시는 이 곳은 35년 전 공장 사장님이 정선을 처음 내려왔던 시절부터 있었던 유명한 맛집이란다. 뜨뜻한 바닥에 신발을 벗고 들어앉으니 온통 방안은 전국에서 먹고 간 손님들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다. 유명한 사람이 아닌 손님들의 멘트가 모여 있다 보니 의외로 참신한 표현들이 가득하다. 뚝배기 한 그릇에 그득하게 들어찬 다슬기를 보면서 맛보다도 고생하셨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의외로 강 다슬기는 작고 가는 데다 삶은 속살은 끝까지 빠져나오기 전에 쉬이 끊어진다. 일일이 알을 까 내려면 이쑤시개로 앞부분을 잘 찌른 뒤 기술적으로 껍질을 잘 돌려서 잽싸게 빼내야 한다. 한 마디로 손이 무진장 많이 간다는 말이다. 물론 품을 들인 만큼, 맛은 확실히 좋다. 이 집은 기본 반찬부터, 한 그릇의 국물까지 더할 나위 없었다. 또 문득 동해가 보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기차를 탄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영월에 내려 다시 한 그릇 먹고 싶을 만큼.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고민스러워진다. 수제, 혹은 품을 들인다는 것의 가치는 무엇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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