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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Jun 23. 2021

보리수

여름 날, 첫번 째 떫은 맛의 기억

‘아빠 어렸을 적에’로 시작되는 문장들은 늘 생소한 것들로 가득하다.


배가 고파서 산에서 열매를 주워 먹었다로 시작되는 배고픔이 그렇고, 징그러운 개구리도 먹기 위해 잡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어려웠다. 마을 전체에 텔레비전이 한 대라 다 그 집에 몰려가서 영화처럼 연속극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지금은 너무나 거대한 신도시가 되어버린 동네가 전부 논밭이었다는 믿지 못할 스토리도 보지 못한 자녀들에게는 시큰둥할 수 밖에 없는 넋두리였다.


그런데 최근에 여섯살 조카가 얼마전 생활사 박물관에 다녀왔다고 했다. 이모에게 너무 신기했다면서, 삐삐가 뭔지 아냐고 으시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조카는 이모 삐삐에 가득했었던 484, 1004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문득 무더운 어느 여름 밤 한 잔 하고 들어오시면, 소위 '아빠 어릴 적에'를 들려주고 싶어하시던 당신의 심정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어린 시절 여름 휴가엔 대체로 할머니댁 방문이 일상적이었다. 아버지의 낚시와 아이들의 물놀이라는 두 목적을 함께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펜션은 고사하고 마을에 으슥한 여관 한 두채 밖에 없던 당시엔 할머니댁이 아니라면 놀러갈 엄두도 나질 않았다. 할머니 댁에서 강가까지 넉넉히 이십분은 걸어야 물 구경이 가능했을까. 강가로 향하는 길 역시 시멘트 포장도로가 절반, 나머지는 논 사이를 가로지르는 흙으로 다져진 뚝방길이었다. 아파트 단지 속 포장 도로만 다니던 도시 아이들은 걸핏하면 넘어져 온 몸을 고운 강가의 모래 범벅이 되곤 했다. 길가에 핀 꽃이름 하나부터, 나무에 달린 숱한 열매들까지. 아빠는 도통 모르는 것이 없으셨다.



그렇게 뚝방길 끝에 다다를 때 쯤이면 강가에 나무들이 온갖 열매를 달고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신라시대 왕비의 귀고리같이 생긴 붉은 열매를 보는 순간 따서 입으로 넣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고, 잠시 아빠가 한 눈을 판 사이 사이좋게 동생과 나눠 먹었던 보리수 열매는 온 입 가득히 이상한 감각을 자아 냈다. 바로 뱉어 내 보지만 무엇을 먹어도 좀처럼 입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뻑뻑한 기분. 떫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그렇게 처음 배웠다.



떫은 맛이란 사전적으로는 혀에 있는 부드럽고 끈끈한 막이 오그라들면서 느껴지는 맛을 말한다고 한다. 원래 인간의 혀가 느낄 수 있는 맛은 단맛,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이 전부라고. 매운 맛과 떫은 맛은 맛을 느끼는 미뢰가 아닌 피부세포에 통각으로 감지되는 맛이라고 한다. 대개는 싫어하는 맛이지만 특수하게 이 맛을 곁들이는 경우 독특한 맛을 내기 때문에 중요한 미각적 가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단다.



주로 덜 익은 과일이나 차 또는 와인에서 나는 떫은 맛은 타닌(tanin) 성분이 혀 점막을 압박할 때 생기는 촉감을 사람이 맛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행히 탄닌은 물에 녹는 수용성이기 때문에 물에 담그거나 데치는 방식으로 어느정도 제거할 수 있으며 이때 소금을 넣으면 더 효과적으로 그 맛을 잡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완전히 익은 보리수는 안 떫고 달다'는 아버지의 증언은 딱히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배고픈 시절엔 무엇을 먹어도 달았으리라. 그 정도 떫은 맛은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도 같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도, 눈 앞의 보리수 나무 가지사이로 영롱하게 맺힌 열매들의 물결은 절로 손을 욺직이게 만들었다. 하다 못해 담금주라도 들이부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벌레에 쏘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바구니를 채웠다. 



한 명당 한 버켓씩을 채웠건만 제법 큰 보리수 나무의 한 면을 털어냈을 뿐이었다. 그렇게 손톱 밑까지 붉게 물들여 가며 따내린 보리수를 한 무더기씩 지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땡볕에서 애쓴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열매 하나 떨어트리지 않고 곱게 안아 연남동 쇼룸에 모셔다 놓았다.


이 날 우리가 놓친 것은 딱 한 가지, 따 놓은 보리수 열매는 워낙 과육이 약해 상하기 쉽고, 특히 무더웠던 그 순간부터 시들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 문을 여는데 쇼룸에 온통 시큼한 냄새로 가득했다. 보리수 버켓 속엔 계속 상한 열매들이 발효하고 있는 것인지 뜨뜻한 열기가 한창이었다. 아... 주저 앉을 때가 아니었다. 급히 버켓을 엎어 그나마 단단하고 덜익을 때 따 온 멀쩡한 열매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목이 뻐근할 때까지 두어시간 골라내고 나니, 겨우 절반정도를 건졌을까. 이래서 보리수 열매는 바로 가공해야 하는 구나라는 깨달음을 비싸게 깨우쳤다.



무엇을 만들어 볼까 꿈도 많았건만, 바로 한 단지는 술로, 한 단지는 식초로, 그리고 한 단지 청을 채워넣으니 얼추 갈무리가 되었다. 한움큼 남은 열매들로 과육을 살린 넥타를 끓이고 나니 올해의 보리수작업 완료. 보리수라는 이름의 붉은 여름을 처음 거둔 오늘, 우리의 공간엔 시큼한 향기가 가득히 들어찼다.




보리수 넥타


ingredient

보리수

설탕


method

1. 잘 익은 보리수를 체에 대고 으깨어 씨를 발라내고 과육과 과즙만 걸러준다.

2. 냄비 속에 보리수가 잠길만큼 물을 넣어준다 

3. 설탕은 보리수 무게의 70%를 넣어준다.

4. 한 소금 끓어 오르면 불에서 내린 뒤, 믹서기로 갈아 밀폐 유리병에 넣고 냉장보관하며 여름 음료로 마신다. 


*시원한 물과 탄산수, 우유나 요거트에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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