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성실하게 살았는데…
그래서 어디서 살 건데?
유년기부터 초등학생 때까지 ‘복도식’ 아파트 1층에 전세로 살았다. 한 번은 집 화장실에서 쥐가 나와 급히 경비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쥐가 어떻게 화장실에 있는지 원인을 찾던 중 경비 아저씨는 변기를 통해 들어온 것 같다며 동그라미 모양의 고철을 철사로 묶고 기다랗게 손잡이까지 만들어 엄마에게 건넸다. 평소에는 그것으로 변기 구멍을 막다가 일을 볼 때 고철을 들어 올렸다. 집에 정이 떨어진 엄마는 아빠 몰래 대출을 받아 지금의 집을 샀다.
상견례가 생각보다 큰 잡음이 없이 끝나고 짧은 평화기가 찾아왔다. 여자친구 집도 우리의 결혼을 잠정적으로 확정한 상태였기에 나에 대한 검증 절차(?)도 어느 정도 끝난 것으로 보였다. 직장이나 소득, 친구 성향 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감사하게도 ‘딸이 결정’했으므로 이젠 어떻게 잘 살고 결혼 준비를 할지에 초점이 맞춰진 결과였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집이었다. 여자친구는 30년 가까이 살던 지금의 동네를 벗어나 서울 내 새로운 곳으로 가길 원했다. 전엔 동네와 집을 보며 금액을 맞출 수 있을까 전전긍긍했다면 이제는 데이트 겸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루는 평소 점찍어뒀던 은평구의 한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
“이 동네 어때? 전체적으로 신축 단지가 동네도 깔끔하고 젊은 사람도 많고 자기 본가랑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은데.” 넌지시 말했다.
“괜찮긴 한데…. 전에 여기 와봐서 어떤 느낌인지는 알아. 근데 강남 가기에 너무 멀지 않아? 내 회사가 강남쪽인데 거리가 너무 먼 거 같은데. 그리고 우리 집이랑 가까운 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여기는 지하철로 자기 회사 있는 역까지 30분 정도 걸려. 단지랑 역도 거리가 가까우니까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집 문과 회사 문을 이르는 말)로 한 50분이면 될 거 같아.”
“그건 나쁘지 않네.”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은평구는 뉴타운 등으로 비교적 신축 단지가 많은 지역이지만 강남과 거리가 있는 편이다. 지하철로 30~40분이면 서울 내에서는 ‘괜찮은’ 수준이었으나 본래 결혼 후 일을 그만두려고 생각했다가 나를 만나 일을 더 해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한 여자친구에겐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소득 없이 밥을 먹으러 가는 길, 여자친구는 말이 없었다. 흔히 사람들이 선호하는 ‘강남 3구’와 ‘마용성’으로 불리는 마포, 성수, 용산에 살고 싶은 그녀. 이렇게 저렇게, 해당 동네에 저렴한 전세를 찾으면 집 환경이 여자친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단식 아파트에서 오래 산 여자친구는 복도식 아파트를 무서워했고, 나 홀로 아파트도 조금 어려워했다. 누구의 기준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오래 살았던 환경과 달라지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엿보였다.
별 반응이 없는 그녀에게 ‘왜 말이 없느냐’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여자친구가 결국 입을 열었다. “나는 결혼하고 얻는 게 뭐야? 집도 못 사,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동네에도 못 살아, 전세로 들어가면 강아지도 못 키워, 일도 계속해야 돼…. 결혼해서 내가 얻는 게 하나도 없어. 자긴 지금 내가 까다로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난 얻는 것도 없고 욕만 먹고 있어.”
기사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글에 “집도 못 해오는 남성이랑 왜 결혼을 하느냐”는 댓글이 종종 달린다. 드라마에서는 집을 보러 가는 예비 신혼부부의 신부가 “난 오빠만 있으면 돼. 빌라건 아파트건 뭐가 중요해?”라고 하지만 이내 현실을 바라보곤 패기를 잃는다.
‘평균남’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아파트를 해올 순 없다. 여자친구가 '평균남'과 결혼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 아닌가,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친구는 “집 보러 다닐 때 여자들이 많이 운다고 하잖아. 살고 싶은 여건이나 환경은 여긴데 돈이 안 되니까 그보다 못한 곳을 보러 다니다가 ‘현타’ 와서 운다고. 우리야 18평 복도식 구축 아파트에서 시작했으니 그런 일은 없었는데 주위 얘기 들어보면 그런 친구들 꽤 있더라고”했지만 씁쓸함이 달래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