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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할 뻔했습니다(17) 신부가 주인공인 '예복 맞춤'

4장: 성실하게 살았는데…

by inseok
하고 싶은 걸로 해도 돼.



공무원 생활을 했던 아빠는 중요한 날 엄마에게 ‘정복을 다려달라’고 했다. 엄마는 그때마다 세탁소에 맡기지 않고 직접 아빠가 빳빳하게 입을 수 있도록 다리미질했다. 정확한 이유를 묻진 않았지만 ‘오늘 중요한 날인가보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강산이 세 번이 변할 만큼 시간이 지났어도 특별하고 중요한 날, 특정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예비 신혼부부가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이유 중 하나가 예복이다. 예복을 맞출 필요가 있는지, 어디서 맞출 것인지, 어떤 디자인으로 할 것인지 하나하나 쉬이 넘어가기 어려운 이슈다.


친구 추천으로 적당히 ‘가성비’를 추구할 수 있는 곳으로 예약해 방문했다. 집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케케묵은 감정이 해소되지 않았지만 결혼 준비는 일정대로 흘러갔다.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 햇빛 한 줌 없는 그런 날 찾은 압구정 로데오에서 고급 외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함께 스쳐 갔다.


“먼저 신체 치수부터 잴게요. 평소에 운동하시나 봐요. 더 몸을 키울 생각도 있으신가요? 그러면 치수를 넉넉하게 옷을 짓는 게 좋아요.”


예복을 맞추는 일은 가벼운 칭찬으로 시작했다. 이윽고 원단, 모양새 등 설명하기 위해 테일러가 착석을 권했다. 테일러는 내가 아닌 예비 신부인 여자친구 앞에 앉아 영국과 이탈리아, 미국 등 원단을 설명하고 비교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입을 거니까 하고 싶은 것으로 해. 그래도 원단은 고급스러운 게 좋을 거 같아. 앞으로도 계속 입을 수 있잖아.”


여자친구 말에 ‘이 옷을 또 입을 일이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서까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까닭에 친구들이 지불한 금액 정도에서 합의를 보겠노라 홀로 다짐했다.

“신부님이 전권을 주니까 두 분은 예복 맞추는 게 어렵지 않겠어요.”


테일러가 말했다.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는 것일까 생각했으나 의문은 곧 해소됐다.


“자기가 입을 드레스에 맞춰서 신랑 예복을 맞춰야 한다고 하는 예비 신부님들이 많아요. 원단도 거기에 맞춰야 하고 색깔도 그렇고요. 어떤 예비 신랑님은 무난하게 남색을 입고 싶어 했는데 신부님이 그 색은 웨딩드레스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대했어요. 제 앞에서 싸우기까지 하는데 정말 난처하더라고요.”


테일러가 원단을 설명할 때 내가 아닌 여자친구 앞에 앉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결국 예복을 짓고 팔려면 신랑보다 신부의 마음에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제아무리 하고 싶다고 한들, 여자가 반대하면 예복 맞추는 날은 결투의 날 변한다. 테일러는 최악의 경우 공허하게 시간만 쓴 채 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적당한 선에서 예복과 촬영용 대여 정장 등을 고르고 식사하러 길을 나섰다. 여자친구 기분이 조금 풀어져 갈등은 없었지만 신랑 예복까지 신부의 결정 아래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쓰게 느껴졌다. 결혼 후 체중이 불어나 예전 정장은 타인의 옷이 되고 예복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된 지금, 또 누군가가 예복을 두고 싸우는 건 아닐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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