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폭발적 성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독서에 가끔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시장에는 유행이 있다. 사교육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학원을 열심히 다녔던 당시에 2가지가 유행했다. 하나는 창의성이고, 두 번째는 비판적 사고다. 당시 나는 “배울 게 많은데, 그것까지 배워야 하나?”라는 상당히 냉소적 반응이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 비판적 독서로 넘어간 듯하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판적 사고는 세상의 이면을 보는 생각이다. 동전의 뒷면을 보듯이 빛만을 보지 않고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지금처럼 정보의 홍수가 넘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잠재적으로 합의됐다고 본다. “비판적 독서”에는 남들과 다른 나만의 것을 추구하려는 개성화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다.
그러나 나는 “비판적 독서”에 대해 비판적이다. “비판적 독서”에는 맹점이 있다. “비판적 독서”는 내가 해당 책을 이해할 수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한 채 비판하는 행동은 비난이다. 그러니 나의 지성 및 지식 카테고리 안에 있는 책만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은 “비판적으로” 읽을 수 없다. “비판적 독서”를 신봉하는 사람의 저변에는 ‘나의 지성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러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책은 논외의 대상이다.’는 지적 오만이 깔려 있다(본인도 모른 채 말이다).
오히려 지성의 성장은 “이해되지 않는 책”을 만날 때 시작한다. 책을 대신해서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해보자(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외면이다. 외면의 가짓수는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네, 기분 나쁘게시리”하는 짜증에서 말조차 걸지 않는 무관심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하나는 똑같다. 바로 나 자신의 생각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대부분 내 반응이 이렇다). 의외의 경우, 두 번째 반응이 나온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하는 호기심 혹은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아직 모르는 걸까?” 같은 반응이다. 물론 이 반응도 대부분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러나 가끔 대화를 하고나서도 뭔가 막히는 느낌이 남아있다.
운이 좋게도 호기심이 남아있다면, 스마트폰이나 책 등을 통해 “이해되지 않는 말”에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말들은 몇 분 투자한다고 “아, 그렇구나!”하면서 쉽게 넘어갈 수 없다. 계속 갑갑한 채로 관련 정보들을 편식하기 시작한다. 계속 찾아다닌 정보들에 발을 푹 담그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말”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에 걸맞는 사고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마치 몸을 물 속에 갑갑한 채로 계속 있었더니, 어느새 폐가 아닌 아가미로 호흡하는 방법을 어느새 익혀버린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면 즉, “이해되지 않는” 책들은 나만의 언어와 이해 방식으로 내용을 다듬는 게 아니라, 나의 사고방식이 “이해되지 않는” 책들의 사고방식에 맞게 들어가는 방식으로 바꾸며 진행된다. 이렇듯 나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기를 요구하는 책들, 주객전도를 일으키는 책들이 있다. 대부분 그런 책들은 고전과 현대사상에 포진해 있다. 고전을 읽을 때, “비판적 독서”는 미안하지만 소용이 없다. 말 그대로 이해가 안 되니 비판도 칭찬도 할 수 없다.
이해가 어려운 이유는 쓰는 단어들이 난해하거나, 문장이 복잡하거나 여러 이유가 있지만, 기존의 사고방식과 원천적으로 다른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은 상식을 뛰어넘는 문제에 관심이 있고, 아무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제기한다. 애초부터 별나라 이야기다. 결국 그런 책들은 읽는 독자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요구한다. 지구가 아닌 별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그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책들은 “비판적 독서”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책을 계속 반복해서 보는 읽기 말고는 파훼법이 없다. "이해되지 않는" 책을 읽기 위한 준비물은 명석하고 날카로운 지성이 아니라 종교적 열의에 가까운 믿음과 이해되지 않는 것에 굴하지 않는 근성이다.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처럼, "계속 밑줄을 그으며" 읽는 수밖에 없다.
이사하는 것을 비유로 들면, 일반적인 책들은 가구를 집 안에 들이듯이 낑낑대며 고된 작업을 거쳐 내 것으로 체화시킨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책들은 그랜드 피아노같다. 그랜드 피아노를 아파트에 들이려면, 피아노를 분해하는 게 아니라 아파트 현관을 부숴야 한다. 집의 구조를 바꾸어야만 들일 수 있는 것들, 그런 책들이 "이해되지 않는" 책이다. 내가 책을 소화하는 게 아니라 책을 소화할 수 있는 위장을 가져다 끼워야 한다.
여기까지 읽으신 “비판적 독서”를 체화하신 독자 분들은 이렇게 질문하실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좋을지 별로일지 어떻게 아나요?" 이에 대한 내 대답은... “당연히 모르죠!”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밖에 없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이해하는 게 좋을지 아닐지를 '이해하지 않은 인간'이 판단할 객관적 근거는 없다. 그게 좋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자신의 사고방식을 버리면서까지 “이해되지 않는” 책의 사고방식으로 점프하는 것. 그것이 독서에서 '목숨을 건 도약'이다. 그런 책들은 멀찍이 바라보며 읽는 게 아니라 믿음에 가까운 자세로 다가갈 수 있다. “그래!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오늘도 해보자고!”로 읽는다. 빙의에 가까운 읽기, 스며드는 읽기다.
그렇지만 “이해되지 않는” 책을 읽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지만, 알면 뭔가 좋을 것 같다'는 직감은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의 부족사회를 답사하며 쓴 <야생의 사고>의 "브리콜라주"는 이 직감에 가깝다. 원래 프랑스어로 “브리콜라주(Bricolage)”는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 또는 '수리'라는 뜻인데, 레비-스트로스는 길을 다니면서 쓸모없어보이는 나뭇가지나 돌멩이와 식물 줄기를 챙기는 사람들을 설명하기 위해 썼다. 계획을 짜거나, 수요를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구의 유용성을 선행적으로 아는 것, 가히 야생의 직감에 가까운 앎을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라고 말한다. 마치 베어 그릴스를 처음 보는 일반인의 놀라움처럼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를 쓰지 않았을까 나는 상상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를 “엔지니어”와 대조하며 설명한다. “엔지니어”는 문제가 생기면 계획을 완벽하게 미리 짜놓고, 계획에 맞춰 필요한 자원들과 인재들을 모은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현대사회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해결방식이다. 그러나 “브리콜라주”는 다가올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 채 어슬렁거리면서 '혹시 이것도 필요할지도 몰라'하면서 바구니에 휙 챙기는 사람이다. 만약 옆에서 본다면, 사실 “그것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하고 묻고 싶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방식은 통한다. 왜 그런 걸까? 그 이유는 “브리콜라주”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사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앞으로 다가올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아는 경우는 거의 없다(2018년에 코로나19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한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엔지니어”의 사고방식을 쓰는 상황은 매우 특수하다.
“브리콜라주”는 브라질의 서남부 고원 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도 꽤 있다. 예를 들어, 2박 3일 여행을 위해 친구들이 약속장소에 모였다. 시간이 되자 한 사람이 어마어마한 수의 캐리어를 끌고 온다. 주위 사람들이 “뭘 그렇게 바리바리 챙겨왔어?”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혹시 알아? 이런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네, 공감하시는 여러분들은 “브리콜라주”이십니다.) 물론 “브리콜라주”의 사고는 직감과 반복되는 경험에 의해 연마된다. 더군다나 “브리콜라주”는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들을 변통해 들이닥친 문제 그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이는 “이해되지 않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브리콜라주"의 사고란 미래에 대한 직감 혹은 임기응변에 가깝다. '혹시 이런 책에 내게 원하는 것이 있을지도 몰라.' 그런 감일 뿐이다.
분명히 "비판적 독서"는 현대사회에 매우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만능은 아니다. "비판적 독서"를 통해 자신의 독서나 사고방식이 성장하는 것인가? 그렇게 물어본다면, 나는 '아니다'에 한 표다. "비판적 독서"는 자신이 쓰고 있는 언어를 날카롭게 제련하는 과정이다. 내가 읽는 책의 논리적 정합성과 주제에 대한 의문점 등을 제기하는 일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예리하게 만든다. 마치 권투선수가 시합 전에 극한의 감량을 거치면서, 몸이 날래지고 펀치에 군더더기가 없어지는 일과 비슷하다. 그러나 "비판적 독서"를 통해 자신의 지성이 높은 레벨로 '점프'하진 않는다.
'목숨을 건 도약'을 통한 믿음의 독서가 지성을 완전히 재구축한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에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위대한 책을 배우고자 하는 자세, 혹은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세. 공자가 '꿈에서 주공(周公)을 만나지 못해(久矣吾不復夢見周公)[<논어>, 술이편(述而篇)]' 시무룩할 정도로 주공(周公)의 열렬한 팬이자 제자였던 걸 떠올려보면, 지금은 "공허하기"보다 "위태로운" 시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