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가 만드는 “무한한 대화”의 가능성
오래전, 여성 지인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들었다. “앞머리를 자를까 낼까?” 찰랑찰랑 5대 5 머리를 보며, 앞머리를 내는 게 괜찮겠다고 말했다. 며칠 지난 후, 뱅 헤어를 한 그녀에게 “오, 앞머리 내기로 했구나. 그것도 잘 어울리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한 말이랑 반대로 앞머리를 잘랐는데,” “???” ‘무슨 말이지?’ 우리의 대화는 한동안 멈췄다.
여성 분들이 주로 겪는 헤어스타일의 난제인 “긴 머리인가, 단발인가”에 필적하는 “앞머리” 고민. 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나는 “앞머리를 낸다”는 말을 앞머리로 이마를 덮는 뜻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뱅 헤어가 괜찮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를 포함한 헤어스타일의 세계에서 “앞머리를 낸다”는 말은 앞머리를 넘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내가 말한 “앞머리를 낸다”는 그녀에게 “기존의 헤어스타일을 유지해라”를 의미했던 것이다. 정반대를 가리키는 완벽한 오해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대화가 한동안 멈춘 후, “자른다”는 없앤다는 뜻이니까, 이마를 드러난 앞머리란 뜻 아닌가. 나의 의도를 이러쿵저러쿵 전했다. 그러나 앞머리는 너무 길어서 넘기기 때문에,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잘라내어 그 짧은 앞머리로 이마를 덮는다. 이것이 헤어스타일의 세계의 언어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의심도 없이 너무 부드럽게 오해해버렸다. 그 오해를 바로잡는 게 꽤 오래 걸렸었다(참고로 이 부분을 쓰는 게 정말 오래 걸렸다).
똑같은 말이라도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Defeat”라는 영단어가 있다. Defeat는 동사로 쓰일 때는 “이긴다”의 의미지만, 명사로 쓰일 때는 “패배”의 의미다. 처음 들었던 중학생 때, ‘뭐야 이거? 뜻이 비슷하게 이어지는 게 아니라 완전히 정반대네... 참 이상하네... 외우는 게 귀찮게 됐네...’ 물론 이러고 넘어갔다. 그런 걸 탐구할 정도로 호기심이 있지 않았다. 그런 걸 물어도 가르쳐줄 것 같지도 않았다. ‘왜 이런 걸 수정하지 않는 걸까? 귀찮게시리...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게, 좋은 커뮤니케이션 아닌가?’
“오해”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나 더 상상해보자. 라디오 사연 혹은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불멸의 주제인 “친구를 사랑하게 된 사람” 이야기로 해보자(2010년대 노래라면 2AM의 <친구의 고백>, 2020년대 노래라면 오마이걸의 <살짝 설렜어>를 떠올려보자). 남자사람친구를 사랑하게 된 여자가 용기를 내며 묻는다. “너 나 좋아해?” 그러자 남자사람친구가 말한다, “응 좋아해.” “아니, 그 좋아해 말고...”
여러분들은 이 오해의 커뮤니케이션을 눈치챘을 것이다. 속으로는 ‘남자가 진짜 답답하네~‘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대화 속 여자의 “좋아해(연인)”와 남자의 “좋아해(우정)”는 확실히 다르다. 우리가 그것을 아는 이유는 남자가 머뭇거리지 않고 즉답했기 때문이다. 아마 남자가 “... 응 좋아해”라고 했다면, 이 커뮤니케이션은 성공이다. 몇 초의 머뭇거림으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 미묘한 차이를 파악한다. 커뮤니케이션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장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곳곳에는 “오해”의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오해”한다는 건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다. 위의 예를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는 앞머리를 잃거나 남자사람친구를 잃어버리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투명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커뮤니케이션으로 가득 찬 세상은 좋은 걸까? 사실 그런 커뮤니케이션은 거의 텔레파시에 가깝다. 그냥 말을 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달하는 의사소통이 유리같이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다. 마치 사람들 전체가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전부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다. 모두 하나가 되는 세상. 글쎄 너무 속이 보이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는 거짓말도 없고, 말 그대로 진실만의 세계인데, 나는 좀 부담스럽다.
또 하나,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이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사실 듣는 사람의 해석이 필요없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냥 명령 및 정보 전달이다. 대답은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혹은 “그건 싫습니다.”하고 끝난다. 대화 종료다. 기실 대화도 아니다. “할 말만 해라.” 주의인 나조차도 모든 사람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무지하게 삭막한 세상이 되고 활발한 대화는 사라질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그런 메마른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언표 행위와 언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상당히 있어 보이는 말을 했지만, 드라마에 나올 법한 예시로 이야기해보자. 여기 바람을 펴도 좋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맺은 부부가 있다. 몇 년이 지난 후 아내가 바람을 폈다. 아내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자 남편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왜 내게 바람을 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뭔가 수상해요. 아직 내게 숨긴 비밀이 더 있는 거죠?” 남편은 고백을 의심한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반응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이상하다. 아내는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는데(“투명하게” 커뮤니케이션했는데도), 남편은 ‘아직 숨겨진, 남은 비밀’이 있을 거라 의심한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언표 내용, 바람을 폈다는 사실)를 말해도 믿지 않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말한다는 행동(언표 행위)” 자체가 별도의 의미를 이미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왜 내게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말”은 단지 투명한 정보가 아니라 그 뒤에 이면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혹은 믿고 있다. 오히려 불투명한 ‘그림자(이면)’에 사람들은 매혹되어 그 정체를 찾으려 한다. 그러니 남편의 의도는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무엇을 말하려는 건가요?”
반대로 “오해”가 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은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가도 가도 닿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멈출 수 없기에, 닿기 위해 계속 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비극일까?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분명 “오해”의 산물이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오해”들 속에서 가끔 맞이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이 달콤한 게 아닐까? 미안하지만, 물론 그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이란 것도 착각이지만 말이다. 지금 나 또한 실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글을 열심히 읽고 계시던 독자 분들은 허탈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그럼 당신은 그렇게 글을 씀으로써 대체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 건가요?” “아 그건 말이죠...(중략)” 이렇게 대화는 영원히 영원하다, 계속 실패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