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국 사람이 제멋대로 생각하는 일본 현대사의 "트라우마"
유튜브에 시간을 많이 쓰는 나는 일본 관련 영상을 많이 본다.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일본 여행을 여러 번 갔다는 점도 있지만, 아마 한국 사람의 정체성이 큰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내가 보는 일본 관련 영상들은 '일본을 까는' 영상들이 많다. 현재 일본 정치가 심각하게 부패했고, 일본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는 현실은 실제로 사실이다. 그러나 유튜브의 댓글을 보고 있으면, 한마디로 '불편하다.' 그 댓글의 내용은 대부분 미래의 일본에 대한 저주다.
나는 일본의 자민당 독재가 만든 정치적, 도덕적 퇴폐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일본 사람들 모두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여러 번의 일본 여행에서 만난 우동집 사장님, 게스트 하우스의 투숙객, 바의 사장님 등과 대학 시절 만난 도쿄의 친구는 진정으로 내게 의미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불행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은 진짜 일본 사람들을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짐작하곤 한다. 나는 일본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댓글은 한국 사람들이 오랫동안 갖는 일본에 대한 열등감의 반작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본다. 나 또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윗 세대로부터 '한국은 일본한테 안 돼'라고 주입당한 말을 반박하고 싶은 찰나에 그런 현실이 펼쳐지니 기뻐하며 동참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근데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 아니냐"고 하고 싶다. 일본에 대한 저주로 한국의 우월감을 표방하고 싶은 마음은 결국 그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한국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왜곡된 애국심이 나라 자체를 망하게 한다. 그것이 지금 현대 일본이 겪는 문제가 아니던가? 자민당의 가치에 반하는 모든 것을 반일이라 부른 왜곡된 애국심이 일본의 현실 감각을 둔하게 만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일본이라는 "타자"와 대화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한중일은 하나의 세트 메뉴다. 우리가 <어벤져스>처럼 소코비아를 공중에 부양시킬 수 없는 노릇이다. 영토는 이사할 수 없다. 어쨌든 삼신 할매의 랜덤 때문에 이웃으로 배정받았다면, 같이 살 수 밖에 없다. 그런 리얼한 문제의식에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현대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일본은 전쟁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가?"라는 닳고 닳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일본을 이해할 수 없다.
일본 사람들의 책을 읽다보면, '전전', '전중', '전후'라는 용어가 나온다. 옆에 한자가 나오기 때문에 사전적 의미를 알 수 있다. 전쟁 이전, 전쟁 중, 전쟁 이후라는 뜻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일본 사람들이 일본 근대사를 '전쟁'을 중심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사관이다. 그만큼 '전쟁'이 그들에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왜 그렇게 전쟁이 중요할까?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한 발언을 들으면, "종전"이란 단어가 들린다. 종전은 말 그대로 "전쟁을 끝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계기를 생각해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에 의해 쇼와 천황은 항복을 선언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유는 "일본이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졌기 때문에 A급 전범들이 처벌받는다(만약 일본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A급 전범 도조 히데키가 사형당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일본의 입장에서는 "종전"은 틀렸다. "패전"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베 신조는 절대 "패전"을 입에 담지 않는다.
"패전"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은 단지 아베 신조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일본 대부분의 사관은 "패전"을 정면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혹자는 "역사야 뭐 해석하기 나름 아니야? 중요한 건 현실 아니야?"하겠지만, 역사인식이 현실인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또 하나의 현실이다. "패전"을 입에 담지 않는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전쟁 시대의 메이지 천황의 시기를 '아름다운 나라' 즉, 롤모델로 삼는다.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대표로 하는 일본의 극우세력들에게 메이지, 다이쇼 시기는 전쟁에서 진 실패한 나라가 아니라 돌아가야 할 원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민당은 '평화 헌법'의 개헌에 집착한다, '정상 국가'였던 메이지 시기의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진보파'다. 전쟁을 했던 대일본제국은 용서할 수 없는 나라였다면서 처절한 반성을 하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사람들은 '양심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양심'이 일본 사회 내부에서 파고들지 못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잃어버린 10년이 잃어버린 30년이 될 때까지 계속 쇠퇴했던 일본 사회에 '아직도 너희들은 반성할 것이 있다'는 사명감을 받아들이기란 여간 부담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일본제국은 완전히 부정해야 할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한국 사람으로서 선을 많이 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른바 '불편한 것'이 싫은 분들은 여기서 뒤로 가기를 눌러도 좋다.
애초에 전쟁에 대한 참패를 기준점으로 근대사를 쓰는 일본 사람들에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최고의 우선순위는 아니다. 당시 대일본제국에는 조선 말고도 식민지가 많았다. 실제로 대일본제국의 국민들은 일제의 침략과 잔혹행위가 나쁜지를 몰랐다. 그들 일본인들은 대일본제국이 광고하는 황국신민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전쟁과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것이 대일본제국의 분위기였다.
대일본제국의 신민들이 군국주의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다. 그 때까지 그들은 시대가 만든 편견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편견에 빠져 나오지 못한 게 제 탓만은 아니잖아요?"하며 뻔뻔하게 말하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낀 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1920년대에 태어난 일본 사람들이다. 1945년 8월 15일의 항복 선언 이후로 군국주의에서 미국이 선사한 민주주의로 간판을 바꿔야 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1920년대의 아이들은 이제 막 20살이 되었다.
닳고 닳은 중년의 어른들은 군국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바뀐다 해도 사람 사는 건 매한가지라는 진리를 눈치챘을 지도 모르지만, 초중고를 포함한 유년시절과 사춘기를 보냈던 1920년대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자마자 "너네가 살던 세상은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20년대의 아이들은 타인들은 부정하고 싶은 전쟁 시대의 기억이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유일한 무엇이었다. 전쟁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를 상상할 수가 없는 아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1920년대에 태어난 일본의 아이들을 "격리병동의 아이들"로 비유한다. 남들에게 평범하지 않은 비상시에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지만, 그 비상시를 평소로 경험했던 아이들이다. 세상의 "평범함"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1945년 8월 15일에 출동한 구조대가 "너희들 그 동안 많이 힘들었지?"라고 묻는 상황이다. "격리병동의 아이들"은 전혀 힘들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이들"은 "격리병동" 속에서 우정을 배우고, 고통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동경을 배웠다. 세상 사람들에게 "격리병동"은 이상한 일이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학교였고, 부모였고, 친구였고, 연인이었다.
"격리병동의 아이들"은 구조대의 이야기 덕분에 자신의 유년시절이 평범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구조대를 비롯한 남들은 '틀렸다'고 하는 전쟁 시대가 "격리병동의 아이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소중한 '어린 시절'이란 다른 레벨의 이야기다. 그저 '틀렸다'고 치부하기에는 "격리병동의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완전히 날려버려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전쟁 시절이 좋았다'고 하기에는 구조대의 이야기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격리병동의 아이들"은 전쟁 시절을 완전히 긍정하지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처한다.
"격리병동의 아이들"의 딜레마는 사실 "트라우마"에 해당한다. "트라우마"를 영어 사전에서 검색하면 '외상'이란 뜻이지만, "트라우마"의 핵심은 '해당 경험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사실'에 있다. 선뜻 말로 할 수 없는 것들, 그것들이 "트라우마"다. 조금 이야기가 새지만, "트라우마"를 설명하기 좋은 상황이 바로 이별을 대하는 자세다. 흔히 차이는 경우, 차이는 사람은 "왜 내가 차였을까?"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차이는 이유에 대한 객관적 설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별을 맞이하는 사람은 애초에 답이 없는 질문을 한 것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을 끊임없이 탐구한 결과, 나름의 답을 낸다. 차갑게 이야기하면 사실 그 이유가 진짜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냈다는 성과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니 "트라우마"를 끌어안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의 해결이 된다.
그러나 "격리병동의 아이들"은 "트라우마"를 끌어안지 못했다. "남들이 나쁘다고 하는 전쟁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건져낼 게 있지 않을까?"로 요약되는 "트라우마"의 질문에 답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라고 받아들인 사상가는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요시모토 다카아키'다.
일본에서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조금 유명하다, 전후 사상가에서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사유를 경유하지 않고 일본 현대사를 보는 사람은 없을 정도다. 그가 지은 <공동환상론>은 무지하게 어렵기로 소문난 책이다, 어찌 보면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선행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둘째 딸,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훨씬 유명하다. 오히려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로 소개될 정도니 말 다 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1920년대생으로 자신의 유년시절과 사춘기에 대일본제국을 의심하지 않던 소년이었다. 그의 전집을 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쟁을 찬미하는 시가 여러 편 있다. "나"의 생각이 시대적 사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요시모토 다카아키를 끝없이 괴롭히는 악령이기도 하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민주주의 일본에 적응할 수 없었다. "1945년 8월 14일까지의 소년시절과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청년시절을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문제의식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럴 것이다. 어떻게 나와 같은 시대에 살던 소년소녀들에게 위로와 구원을 줄까? 요시모토 다카아키에겐 "낀 세대"로서 다른 세대로부터 공감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동시대의 친구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다(동시대의 소년소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번역본을 구하는 게 어려웠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듯 요시모토 다카아키를 비롯한 "격리병동의 아이들"은 "트라우마"를 이야기로 풀어낼 수 없는 무능을 뼈아프게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 시대이자 자신의 유년시절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이내 일본 사회 전체가 "전쟁"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춰버리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2세대 정도 지나자, 일본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쟁”을 경험했지만 차마 말 못 하는 "격리병동의 아이들"의 손자들은 이내 “전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대 일본에서 “전쟁”에 대한 반성이 나오지 않는 이유다.
그러니 현대 일본의 왜곡된 모습을 파악하고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끌어 안을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 '남들은 틀렸다 하지만, 내게는 "소중한 경험들"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이것이 현대 일본사에 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면서 도덕적인 질문이다. 이 "트라우마"를 끌어안는 드넓은 시야를 획득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드넓은 시야를 획득하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대표하는 자민당은 전쟁 시절의 일본을 찬양하고, 아베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전쟁 시절의 일본을 전적으로 부정하려 한다. '과연 제3의 길은 없을까?' '전쟁 시절은 분명히 나쁘지만, 그 속에도 건질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문제의식(공동환상론이나 전향론이나)은 동시대에 살던 아이들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히 해둘 것은 내가 설정한 이런 문제들이 오직 '일본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사실이다. "트라우마"를 껴안아야 하는 일본 사회의 문제 상황은 한국 사람인 내가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사회의 정치적, 도덕적 퇴폐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일본 사회 본인 뿐이다. 아무도 사회 혁명을 아웃 소싱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프랑스 대혁명'을 누군가 대신 해준다면,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을 그렇게 칭송하지 않을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나가는 프랑스 민중들의 싱싱한 에너지,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 아니던가.
그래서 한국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본 사회가 도덕적, 정치적 고결함을 찾기를 응원하는 것밖에 없다. 그 길의 본질적인 해결책은 75년도 더 된 '전쟁'이 멈춘 시간을 재가동시키는 것에 있다. 멈춘 시간을 재가동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화해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런 거추장스러운 일은 잊혀져 갔다. 1945년 8월 15일에 멈춘 일본의 시계가 다시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트라우마"를 끌어안음으로써 성장한 일본과 같이 공존하는 한국, 더 나아가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꿈꾼다. 타국의 쇠퇴를 깔보면서 자국의 위대함을 보증받는 것만큼 추한 국뽕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가 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