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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Mar 20. 2021

영화 <쉘 위 댄스>를 봤습니다.

댄스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조심하세요.라고 쓰겠지만, 25년 정도 애매하게 오래된 이 영화를 이제서야 보는 사람은 나 정도뿐일 거라 그렇게 걱정되지는 않는다(저와 같은 우연을 겪은 분들, 죄송합니다). 영화 소개만 보면 이 영화는 ‘중년의 위기’ 이야기다. 열심히 달려왔고, 거의 다 이루었지만, 막상 실존의 위기(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를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러다 춤을 통해 행복을 찾는다. 평범해 보이는 이 영화를 흐뭇하게 보면서 나는 의외로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다. 마냥 클리셰 영화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쉘 위 댄스>의 ‘흥미로운’ 장면은 춤을 추는 장면이 아니었다. 주인공 스기야마의 아내가 남편이 수요일마다 늦는 것을 기이하게 여겨 탐정사무소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당연히 바람이 난 게 아닐까 의심했기 때문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늦는 남편의 와이셔츠에 항상 같은 향수 냄새가 나는데, 바람을 의심 안 하기도 힘들다. 사정을 듣고 탐정은 “여자가 있으면 어쩌시려고요?”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거기서 아내는 당황한다. “그런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여자가 아니라 이상한 사건에 휘말렸을지도 모르잖아요”라고 대응한다. 언뜻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장면은 상당히 이상하다. 탐정은 단지 바람이 의심스럽다는 아내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자신이 한 말을 남이 그대로 따라한 것을 듣자, 남편을 다시 변호한다.


 

"여자가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 탐정은 구조적으로 마이 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한다.


 분명히 아내는 어떤 사건에 휘말렸을 것이라는 생각 같은 건 처음에 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좋아 보이는 남편의 표정을 알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아내는 없다. 사실 아내에게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와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았기를...” 두 가지 마음이 있었다. 사람은 혼자면서 둘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우리의 혼잣말이다. 우리가 하는 혼잣말과 자기 암시는 내 안에 내 말을 들어주는 ‘또 다른 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나’를 전제하는 생각을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말을 할 때도, 사람 1명이 아니라 말하는 쪽과 듣는 쪽을 마음속으로 정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실제로 남일 필요는 없다. ‘상호주관성’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상호주관성’은 여러 사람들의 주관성을 쌓은 결과가 아니라 그런 결과를 가능케 하는 배경이자 기본 틀 그 자체다. 1명으로도 ‘상호주관성’은 가능하다. 아니 모든 주관성은 ‘상호주관적’이다. <쉘 위 댄스> 속 아내의 의심도 ‘상호주관성’의 결과물이다. 남편을 믿지 않는 아내의 뒷배경에는 남편을 믿는 누군가가 있다. 배경이 없는 사진이 없듯이, 상호주관성 없는 주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는 <무한한 대화>에서 "동일한 것을 말하는 인간은 타자이기 때문이지"라고 쓰며, '상호주관성'을 말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막상 자신의 의심을 타인(탐정)에게 듣자마자 그로부터 도망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상황은 스기야마-마이 관계에서 또 한 번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변곡점이다. (이제서야 영화의 시작에 들어간다...) 스기야마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아름다운 미인 마이를 보고 멍해진다. 그렇게 점점 마음은 커져가 덜컥 댄스교습소에 등록해버린다.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케이스다. 그러나 걱정 마라.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취미는 멋있고 아름다운 상대로부터 관심받고 싶어 하는, 잿밥 덕분에 시작하지 않았던가. 최소한 나는 그랬다...


다들 춤을 시작한 이유가 '건강에 좋아서'라고 말하죠.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요...


 스기야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저녁을 같이 먹자고 마이 선생님에게 덜컥 데이트 신청을 한다. 누구나 예상하겠지만, 마이 선생님은 단칼에 거절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혹시 저 때문에 댄스 교습소에 오시는 거라면 조금 곤란합니다. 저는 진지하게 춤추고 있습니다.” 정말 정곡을 찔러버렸다. 혹시가 아니라, 진짜 그가 온 이유는 오직 마이 선생님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반전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스기야마는 그 이후로 더욱 열심히 댄스교습소에 다닌다. 그의 댄스 열정은 이 순간부터 불타기 시작한다. 스기야마는 자신의 마음을 마이 선생님의 입을 통해 듣자, 그것을 부정한다. “나는 당신 때문에 댄스를 배우는 게 아닙니다”라고 마이 선생님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설득한다.


스기야마는 마이 선생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춤을 춘다.


 사람은 똑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이 하는 말인가, 남이 하는 말인가에 따라서 그 반응이 달라진다. 자기 자신이 하는 말은 자기 안의 다른 의견들이 서로의 안전장치로서 계속 바뀔 수 있다. 무언가 잘못되면 "아 괜찮아, 그거 말고도 플랜 B가 있어."라면서 언제든지 수정할 찬스가 있다. 그러나 남이 하는 말은 '이미 전해진 말'로서 종점에 도달한 지하철과 같다. 그리고 타인의 반응에 의해 그 메시지의 의미는 단 하나로 단정된다. 이 영화에서 마이 선생님은 거절했다. 그리고 스기야마는 마이 선생님 때문에 춤을 춘 게 아니라며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남편의 죽음을 세 번 겪은 여자의 이야기로 소름 끼치는 자기기만을 소개한다. 이 여자는 지병이 있던 남편을 오랫동안 간호했지만, 결국 남편과 사별한다. 그녀는 크나큰 고통과 상실감을 겪는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녀는 오랜 간병생활로 인해 비참해진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자 매우 특이한 선택을 한다. 그녀는 그다음부터 일부러 '죽기 직전의 남자'들을 2명 더 골라서 결혼해버린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비참하지 않다는 거짓말을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해 거짓말에 맞춰서 현실을 바꾼다. 그녀는 우연히 남편의 죽음을 세 번 겪은 불운한 사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편의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프로이트의 계승자로 일컬어지는 자크 라캉은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트라우마(환상)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영화 후반부에 “처음에는 마이 선생님 때문에 온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댄스가 좋아졌습니다.”라는 스기야마의 말은 마이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남이 틀렸고 자신이 맞았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도 속일 정도로 의외로 엄청나게 성실하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엄청난 노력으로 현실을 바꾸는 거짓말은 결과적으로 “진심”과 다르지 않다. 적극적인 자기기만은 실제로 자신의 행동을 바꾸어 버려 현실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자기실현적 예언”인 셈이다. 스기야마는 이제 진짜 잿밥보다 제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스기야마가 관심이 있는 제사가 사교댄스라는 점이 영화 <쉘 위 댄스>의 흥미로운 구조다. 사교댄스는 두 사람이 하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혼자서도 마음이 둘로 나뉘어 갈등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합을 맞춰야 하는 사교댄스다. 스기야마는 자기 안의 타자('또 다른 나')와 자기 밖의 타자(아내, 파트너)를 상대하는 커뮤니케이션들을 수행해간다.


 커뮤니케이션은 사교댄스처럼 누군가가 '리드'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다. 음악의 첫 박자에 맞춰서 '리더'가 춤을 시작하는 것처럼, 커뮤니케이션에는 처음 입을 떼는 사람이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절대 평등하지 않다. 커뮤니케이션은 차이를 통한 역동적인 과정이다. 평등한 커뮤니케이션을 굳이 꼽자면, 다들 자기 말만 하려는 난장판과 다들 남에게 말을 양보하는 정적 정도다(극과 극은 통하나 보다). 그런 걸 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불평등한 커뮤니케이션이 사교댄스의 '리더'가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음악의 첫 박자에서 '리더'가 처음 발을 옮길 수 있는 건 상대방이 자신의 발을 옮겨 그 자리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의 발을 밟아 춤은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교댄스=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은 '리더'가 아니라 그 상대방의 "양보"(듣는 사람의 경청)다.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는 그 자리가 비워져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비워진 자리가 사교댄스=커뮤니케이션의 근본 조건이다.


자꾸 내가 너의 발을 밟아 - 브로콜리 너마저 <춤> 중에서


 오히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리더' 스기야마를 기다리는 마이 선생님의 서사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리더' 사실은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리드당하는 존재라는 역설, 마이 선생님의 "양보" 없이는 '리더' 존재할  없다. 마이 선생님은 댄스홀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리더' 스기야마는 등장한다. 마이 선생님이 깨달은 사교댄스=커뮤니케이션은   마디로 표현된다. "Shall we ダンス?" 당신을 위한 자리는 비워져 있다는 "적극적인" 양보와 배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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