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스크라 Mar 05. 2021

전투적인 자연주의자, 존 뮤어

국립공원 시스템의 아버지

요세미티의 거인

존 뮤어(John Muir, 1838~1914), 그는 요세미티의 인자한 거인이었다. 자연주의자이자 철학자, 박물학자였으며, 철저한 환경주의자였다. 스코틀드 태생인 존 뮤어는 11살이던 1849 미국으로 이주한 뒤 위스콘신에서 성장하였으며, 몇 년간 위스콘신 대학을 다녔지만 중퇴하고 29살의 늦은 나이에 ‘뒷마당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자연이라는 대학’에 들어갔다. 젊은 시절에는 네바다·유타·오리건·워싱턴·알래스카 등을 탐사하면서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키웠고, 1868 년부터 1874 년까지 요세미티에서 살았다. 


요세미티 계곡에서의 존 뮤어. 사진: 미국 의회 도서관(www.loc.gov)


요세미티 기간 동안 그는 자연주의자로 거듭났다. 요세미티의 생태학적 중요성을 깨닫고 요세미티를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며, 1890년 요세미티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존 뮤어는 제도 교육을 받은 학자가 아니었으나 오랜 관찰과 사유로 요세미티 계곡의 장관이 빙하의 침식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그를 시골의 민속학자쯤으로 여긴 주류 학자들은 존 뮤어의 주장을 무시하였으나 결국은 빙하 침식의 결과라는 게 학술적으로 증명되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깊은 성찰과 질문이 주류 지질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한 비밀을 밝혀낸 것이다.


국립공원 시스템의 아버지

미국 최고의 발명품은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은 1872년 옐로스톤 국립공원[1]이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고, 환경 보존에 대한 명확한 이론과 국립공원 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독립적인 연방 기관으로서의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이 설립된 것도 1916년의 일이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국립공원 관리업무는 내무부 산하의 한직으로 여겨졌다. 


존 뮤어는 요세미티에서 생활하면서 요세미티의 자연을 현장에서 연구하였다. 탐사에 나서는 그의 소지품은 작은 컵과 차(茶), 그리고 마른 빵이 전부였다. 요세미티를 포함하는 시에라 지역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고,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는 국립공원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벌목과 목축업 등으로 위협받고 있는 요세미티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889 년에 존 뮤어는 당시 꽤 유력한 잡지였던 센츄리 매거진(Century Magazine)[2]의 편집인이었던 로버트 존슨(Robert Underwood Johnson)을 투올러미 메도우(Tuolumne Meadows)로 초청하여 무분별한 벌목과 방목 중인 양과 소가 어떻게 삼림을 훼손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요세미티 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존 뮤어와 로버트 존슨은 캘리포니아의 주립공원이던 요세미티를 국립공원으로 만드는 법안을 청원하였고, 그 이듬해인 1890년 요세미티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1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개발론자들부터 온전히 보호되고 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국립공원 시스템의 아버지(Father of Our National Park System)라고 부른다. 만약 요세미티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 경이로운 풍광에 감탄하면서 존 뮤어에게도 잠깐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환경운동의 시조

요세미티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에도 존 뮤어는 요세미티의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1892년 시에라 클럽(Sierra Club)을 창립하고 죽을 때까지 회장을 맡아 헌신하였다.


존 뮤어는 시에라 클럽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요세미티와 시에라 네바다를 보전하기 위해 수많은 투쟁을 벌였는데 그 중 가장 극적인 것은 요세미티 국립공원 내의 헤츠 헤치 밸리의 댐(Hetch Hetchy Dam)[3]을 막기 위한 캠페인이었다. 헤츠 헤치 계곡의 댐 건설 반대 투쟁은 환경운동의 첫번째 중요한 전투였다. 그러나 존 뮤어와 시에라 클럽은 수년간 반대 투쟁을 이끌었지만 1913년 결국 의회는 언론과 많은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댐 건설을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요세미티처럼 아름다웠던 헤츠 헤치 밸리는 결국 물에 잠겨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고, 크게 상심한 존 뮤어는 그 이듬해 사망하였다.


언제나 위대한 첫 걸음을 떼는 사람들이 있다. 존 뮤어는 자연 유산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시대에, 인디언 학살과 토지 약탈이 아무렇지 않게 횡행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환경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100년 지난 지금도 미국 근대사에서 여전히 가장 영향력있는 자연주의자로 기록되어 있는 존 뮤어는 사람들에게 자연 유산을 경험하고 보호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으며, 그의 정신을 유산으로 하는 후대의 많은 환경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절친이자 적 핀쇼와의 인연

기포드 핀쇼(Gifford Pinchot, 1856년-1946)는 미국의 초대 산림청장이며, 미국 임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뮤어와 핀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환경보호와 관련하여 깊은 우정을 나누기도 했고, 상반된 입장으로 크게 충돌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이 둘은 전형적인 프레너미[4]관계였다.


미국의 장거리 트레일은 대부분 국립공원 지역이거나 국유림 지역이다. 뮤어와 핀쇼는 비록 장거리 트레일을 직접 설계하지는 않았지만 각각 국립공원과 산림청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장거리 트레일과도 관련이 없지 않다. 환경운동의 영원한 숙제이자 논쟁인, 자연을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 혹은 활용하면서 ‘보전’할 것인가라는 입장[5]에서 20세기 초의 뮤어와 핀쇼의 입장은 크게 갈리었다. 뮤어는 보존(preservation)을 주장했고, 핀쇼는 보전(conservation)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친구이자 '적'이었던 뮤어와 핀쇼. 사진: 미국국립인문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

핀쇼의 보전(conservation) 입장은 기본적으로 연방 정부가 소유한 공공 토지를 일반 대중의 레크리에이션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리 기관의 체계적인 통제를 전제로 벌목, 채광 및 과학적 연구를 포함한 기타 여러 목적을 위해 산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핀쇼의 이런 입장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찬성받았고, 그는 미국 산림청의 초대 책임자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미국 산림청의 기본 운영 철학은 핀쇼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뮤어는 보존(preservation)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는데 특히 국립 공원이 된 연방 토지에서 산업적 이익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존 뮤어는 환경운동에 있어서 보다 근본주의적인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존이냐 보전이냐의 문제는 양자택일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핀쇼의 실용주의적 입장이 정책에 보다 많이 반영되었지만, 뮤어의 입장은 결국 미국 국립공원 관리의 기본 철학이 되었고, 오늘날 미국이 남한 면적보다 2배 이상 넓은 총 211,000 km²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둘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공 토지 시스템의 핵심인 보존과 보전이라는 상충되는 철학은 균형 있게 반영되고 있다. 그들은 나중에 글레이셔 국립 공원(1910년 국립공원 지정)으로 지정되는 보석 같은 맥도날드 호수 옆에서 함께 야영을 하였다. 이곳에서 함께 낚시를 하고 밤새도록 긴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둘 다 자연 유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였고,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날의 만남을 계기로 글레이셔 국립공원이 지정되었고, 상충되는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연대하게 된다.


뮤어와 핀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공공 토지 관리 시스템은 전 세계적으로 모범이 되고 있다. 더 많은 ‘탐방객’ 유치라는 영업 목표를 가진 듯한 우리나라의 국립공원 관리 당국의 정책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100여년 전 이들의 논쟁과 연대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다. 


1903년 요세미티 글래시어 포인트에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함께 서있는 존 뮤어. 사진: 미국국립인문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


원주민 차별 논쟁

존 뮤어와 관련하여 가장 빈번한 논쟁 중 하나는 그가 유색 인종, 특히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백인 남성 엘리트주의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그가 모노 레이크로 걷다가 만난 인디언들이 위스키와 담배를 구걸했으며, 인디언들의 구걸 행위와 지저분한 행색에서 위협감을 느꼈다고 쓴 글을 예로 든다. 이 논쟁은 회원수 380만명의 세계 최대 환경단체인 시에라 클럽에서도 벌어졌다. 더러운 행색으로 구걸을 하던 요세미티 지역의 인디언들은 사실 악명높은 마라포사 민병대[6]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가족들이 학살당한 인디언들이었으며, 젊은 존 뮤어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할 때까지 10 년 이상 이러한 장면은 시에라 네바다 전역에서 반복되었다. 이런 사회 현상을 존 뮤어는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인디언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는 오늘날 나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가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그의 ‘시에라의 나의 첫 번째 여름(First Summer in the Sierra)’이라는 글에서는 환경 파괴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 사람은 인디언이 아니라 백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세계관과 가치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나름이다. 존 뮤어가 설령 사회적 약자들인 인디언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해도 환경운동에서의 그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인디언의 인권을 보호하는 투쟁을 함께 이끌고, 더 나아가 인디언 원주민들과 함께 환경운동을 벌였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것은 시대의 한계였다는 게 좀더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1]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은 사실 1783년 지정된 몽골의 복드한 국립공원(Bogd Khan Uul National Park)이다. 미국의 국립공원 관리 제도가 가장 일반적인 모델이기 때문에 흔히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최초의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2] Century Magazine은 1881 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주로 역사, 과학 및 문학 관련 기사를 다루었다. 특히 수준높은 일러스트레이션은 유명했으며,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세련된 취향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30년에 The Forum으로 합병되었다.

[3] 헤츠 헤치 계곡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복서쪽에 있으며, 요세미티처럼 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빼어난 경관의 계곡이었다. 요세미티 계곡처럼 아름다웠다고 하나 1913년 캘리포니아 의회는 샌프란시스코 시의 안정적인 물 공급을 위해 헤츠 헤치 밸리에 댐 건설을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결국 댐이 건설되면서 계곡은 물에 잠겨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4] Frenemy. ‘친구"(friend)’와 ‘적(enemy)’이라는 상반된 단어의 합성어로 혐오하거나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친한 관계의 사람을 뜻한다.

[5] 이 책에서는 conservation은 활용하면서 후세대로 넘겨주는 ‘보전’으로, preservation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는 ‘보존’으로 해석한다.

[6] Mariposa Battalion. 인디언들의 위협을 막아낸다는 명분으로 1851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승인한 민병대 조직. 이들은 요세미티 밸리의 인디언 마을에서 재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쫒아냈다. 사실 인디언의 위협이라는 것도 골드 러시로 인해 수천명의 광부들이 인디언 지역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인디언 학살과 약탈이라는 미국 현대사의 오점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MT. Whitney 등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