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스크라 Mar 24. 2021

아웃도어에 열광하는 DNA(1)

아웃도어는 진화 재연극(再演劇)이다.

※ 이 글은  '인사이드 아웃도어' (리리 퍼블리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진화 재연극(再演劇)과 프로그래밍된 DNA 

인간만이 가진 특징은 여러가지이다. 앞서 살펴본 직립보행, 유대감, 그리고 도구를 쓰는 능력, 복잡한 언어 체계와 상징을 만들어내는 창의력…유발 하라리 식으로 얘기하자면 거짓말-신화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더 보태라면 나는 서슴없이 ‘아웃도어 본능’을 들겠다.


현대 인류의 아웃도어 활동은 우리의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 생존을 위해 겪었던 일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멀리 걷고 오래 달리며, 더 넓은 땅으로 이주하기 위해 낯선 곳에서 잠을 자고, 추위와 포식자들을 물리치고 사냥감을 익혀 먹기 위해 모닥불을 피웠던 일들, 그리고 고난을 이겨냈을 때의 성취감까지.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인류가 경험했던 이 모든 일들이 오늘날 우리들 아웃도어 활동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넓게 보면 아웃도어 활동은 문화 활동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문화적인 행위보다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여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문화 활동과 차별성을 갖는다. 우리는 미술관을 찾거나 다른 사람의 연주를 감상하거나 스포츠 경기 중계를 보면서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타자의 활동을 관람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말 캠핑과 등산이 즐거운 이유는 내가 ‘직접 경험’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섭취하고, 소비를 최소화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사냥이나 채취, 영역 지키기 등 생존을 위한 필수 활동이 아닌데도 걷고, 뛰고, 심지어 안전하고 편한 집을 떠나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자는 행위는 어떤 동물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하며, 돌고래도 언어를 가지고 있고, 늑대도 무리들이 협력하여 사냥한다. 그러나 인간만이 숲 속에서 수백만년 진화의 재연극을 직접 연출하고 즐긴다. 칼 세이건[1]은 숲에서 우리가 느끼는 친화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인간은 숲에서 자랐습니다. 우리는 숲에게 자연스러운 친화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은 나무는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왜 인간만이 진화 재연극을 연출하고 심취하는 것일까? 모든 답은 우리의 DNA 속에 있다. 멀리 걷고, 오래 달리고, 숲 속에서 야영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를 우리는 DNA 속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 입력되는 정보를 처리하여 좋은, 또는 나쁜 감정으로 연결시키는 프로세스는 이성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DNA에 이미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정보를 처리한 결과일 뿐이다. 후각을 통해 입력된 꽃향기를 이성적으로 분석해서 향기롭다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서 꽃의 향기가 좋다고 배운 바도 없다.[2] 수백만 년 동안 우리 인류 조상이 경험해서 터득한 정보 처리 프로세스를 DNA에 담아서 우리에게 물려주었고, 우리는 물려받은 프로세스대로 정보를 처리한다. 꽃을 아름답게, 향기를 기분 좋게 느끼는 것은 꽃이 곧 탐스러운 열매를 맺기 때문일 뿐이다. 유기물에서 나는 썩은 냄새를 고약하다고 느끼는 것은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키게 될 가능성이 높은 부패한 음식이기 때문에 기피하라고 우리의 조상들이 DNA에 프로그래밍한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뇌는 2진수로 이루어진 컴퓨터의 연산 처리 방식과는 다르다. DNA의 프로그램만으로 우리가 ‘작동’되고 있다면…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인류 공통의 DNA에 프로그래밍된 정보 처리 결과를 재가공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개체의 후천적 경험과 교육, 그리고 속해있는 사회의 규범 등이 DNA 연산 결과를 재해석한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개별 개체의 정보 재해석 프로세스보다 인류가 공통으로 물려받은 DNA의 정보처리 결과가 우선하고,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단것을 좋아하고 식감이 물컹한 음식을 싫어한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자.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어린 시절 물컹한 식감의 생굴과 가지 무침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 어린 아이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후천적인 경험이 충분하게 축적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는 개체의 경험에 따른 개별적인 정보 재해석보다 우리의 DNA에 공통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정보 처리 프로세스를 본능적으로 따르게 된다. 먹이가 될만한 유기체들은 부패하게 되면 대부분 물컹해지고 메탄가스가 발생하여 냄새를 풍기는데 이런 정보가 수백만 년 동안 우리의 DNA에 저장되어 왔다. 먹어도 되는지 확신이 없다면 물컹하고 냄새가 나는 유기체는 우선 기피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반응은 성별과 인종, 경제적 소득 수준과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류는 황인종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모두 루시와 부사라의 DNA을 똑같이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불을 찾아서[3]  

그렇다면 ‘불멍’은 우리 DNA의 어떤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일까?

우리는 공통적으로 ‘불’에 대한 강렬하고도 원초적인 노스텔지어를 가지고 있다. 인류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40여만 년 전이다.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는 번개에 의한 자연발화에서 최초의 불씨를 얻었을 것이다. 불은 천적으로부터 무리를 보호해주었으며, 어두운 밤 빛이 되어 야간에도 활동할 수 있었다. 특히 불로 음식을 익혀 먹는 방법을 터득 한 후 뇌의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단백질을 풍부하게 섭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은 호모 에렉투스나 호모 사피엔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네안데르탈인 역시 불을 사용하였다. 다만 그들은 불을 이용하여 고기를 익혀 먹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는 사냥한 고기와 씨앗을 익혀 먹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고, 익힌 음식을 더 오래 보관하여 더 좋은 영양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불의 활용 수준은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이후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지구에서 유일한 인류가 된 우리는 더 오래 걷고 더 멀리 달릴 수 있다는 유리한 신체적 조건과 더불어 불의 활용 능력에서도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불 앞에 모여 수다를 떠는 것은 최고의 언어 학습이었다. (사진출처: Smithsonian Institution)


불은 우연하게도 인류의 언어 능력 발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비교적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 역시 발달된 설골[4]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복잡한 언어 구사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에 비해 더욱 복잡한 언어 구사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해부학적인 발성 기관의 발달 이외에도 모닥불이 한몫 하였다.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큰 무리를 짓고 살던 호모 사피엔스는 불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무리의 소속감을 높였다. 어린 자는 사냥 경험이 많은 늙은 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경쟁 관계에 있는 친척 무리들의 장단점을 공유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첫 서리가 내리면 해가 뜨는 쪽의 두번째 계곡으로 맘모스 떼가 지나갈 것이라는 것도 무리들에게 설명하였다. 눈 앞에 없는 사물과 현상을 설명해야 했으므로 상징과 추상 능력이 발달하게 되었다. 수만 년에 걸친 이런 무리의 습성 덕분에 자연스럽게 높은 수준의 어휘력(vocabulary)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 구조도 더욱 정교해졌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모두 불 앞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춥고 어두운 밤 네안데르탈인은 다음날의 열량 4000kcal 만큼을 사냥하기 위해 휴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밤에 모여서 나누는 대화는 그들에게 그저 에너지 낭비일 뿐이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호모 사피엔스는 유대감을 키웠고, 언어 능력을 발달시켰으며, 다음날 더 강력한 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인류가 가진 뛰어난 사회성과 소통 능력은 오랜 세월 동안 모닥불을 둘러싸고 수다를 떨었던 결과인 셈이다. 캠핑장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꼬치를 구워 나눠먹으며 행복해 하는 오늘날의 우리들 모습은 수십만 년 전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호모 사피엔스 무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에게나, 21세기의 우리에게나 불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멍은 마음껏 즐겨도 좋은 것이다. 단 허락된 장소에서만!



[1] Carl Edward Sagan(1934-1996) 미국의 천문학자, 천체물리학자이자 작가.  ‘코스모스’, ‘창백한 푸른 점’ 등의 기념비적인 대중 과학서를 썼으며, 평생 과학의 대중화화 과학적 사고 방식의 중요함은 설파하였다.

[2] 후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자극은 중추 신경계에서 처리하는데 이 프로세스는 냄새를 인지하고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는다.

[3] '불을 찾아서'(원제: La Guerre Du Feu, Quest For Fire)는 프랑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번개로 얻은 불씨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아가던 고대 인류가 불을 피우는 법을 배우고, 현생 인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처음 불을 사용한 인류 조상은 호모 에렉투스로서 140여만 년 전의 일이다.

[4] 혀의 뼈. 입 안쪽 인두와 후두, 식도 입구를 연결하는 'U자형' 뼈로 혀와 목 근육을 움직여 씹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거나 혀를 움직여 소리를 내는 역할을 한다.

작가의 이전글 아웃도어의 기원(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