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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크라 Apr 19. 2021

제로그램 클래식 이야기

같은 길, 각자의 길

※ 이 글은 5월 출간 예정인 '인사이드 아웃도어' (리리 퍼블리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014년에 시작된 제로그램 클래식은 해외의 장거리 트레일을 걷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동안 일본 북알프스를 시작으로 2015년 미국 노스 케스케이드, 2016년 홍콩 란타우 트레일, 2017년 미국 워싱턴주 PCT 구간, 2018년 일본  야리가다케, , 2019년 미국 콜로라도 트레일 등을 다녀왔다. 백패킹 장비 전문 브랜드 책임자로서 나는 장거리 하이킹이야말로 우리나라 아웃도어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액티비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은 2011년 JTM 종주라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크게 작용하였다.  

2017 제로그램 클래식 PCT 워싱턴 구간

장거리 하이킹은 모든 것들이 허물을 벗고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길은 걷는 동안 사람들은 일상에서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와 마주치게 된다. 1박2일의 백패킹은 단지 하루 정도 불편함을 참으면 되지만, 3일째가 지나고 4일이 넘어가면 지금까지의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과 그 속에 놓인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길을 끝마쳤을 때는 내면으로부터 가슴 벅찬 세레모니를 받게 된다. 길은 누가 대신 걸어줄 수도 없거니와 목적지가 제 발로 다가오는 법도 없다. 오로지 스스로의 걸음으로 걸어야 하는 길이다. 백패킹 경험과 지식이 크게 확장되는 것은 덤이다.


다른 많은 아웃도어 브랜드들도 유사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프로그램 운영 방식은 남달랐다. 대부분의 회사는 이런 프로그램을 대행업체에 의뢰하여 운영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백패킹과 관련해서는 꽤나 경험이 많았을 뿐 아니라 담당 직원들도 장거리 하이킹 경험이 많아서 단 한번도 외부 대행업체에 맡긴 적이 없다. 좀 건방지게 얘기하자면 우리보다 잘 할 수 있는 대행업체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직접 운영한 또 다른 이유는 함께 길을 걸으면서 고객, 혹은 잠재적 고객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원들과 나는 브랜드 담지자가 될 수 있으나 닳아빠진 이벤트 대행업체는 브랜드 담지자가 될 수 없다. 적어도 아웃도어 분야에서는 그렇다.

2016년 제로그램 클래식. 홍콩 란타우의 옹핑 캠핑장

우리의 참가자 선정 방식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다른 회사는 이런 류의 프로그램을 마케팅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정량적인 결과가 담긴 보고서를 부서장에게 제출해야 할 것이다. 정량적인 결과는 결국 선정된 사람의 소셜 미디어 팔로워와 홍보 포스팅 숫자, 좋아요 등의 반응을 기준으로 작성될 것이다. 그렇다 보니 소위 ‘핵인싸’라고 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 세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만 모아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참가 신청자들의 SNS를 참고하지만 팔로워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장거리 하이킹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참가하려는 간절함이 선정 기준이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면 유감이지만, 6년간 진행했던 해외 장거리 하이킹 프로그램에서 SNS의 유명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않아도 다른 곳으로부터 많은 요청을 받을 것이고 기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화려한 프로필에 비해 소박하기 짝이 없는 제로그램 클래식 참가 경력이 한 줄 더 들어가는 것도 마뜩잖았다. 


지금은 국내에서 철수한 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의 해외 트레킹 프로그램의 운영 과정은 타산지석이 될만한 사례였다. 해외 트레킹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하면서 ‘핵인싸’들만을 모아서 사전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시한 미션은, 내가 보기에는 개인의 자존감은 안중에도 없는 다소 모욕적인 내용들도 있었다. 결국 그 이벤트는 별다른 성과도 없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도 불쾌한 기억으로 남았다. 아마도 대행업체가 진행하였겠지만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있었을테니 결국 대행을 의뢰한 브랜드의 문제이며, 마케팅으로만 접근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이벤트에 응모하는 사람들도 한번쯤 되돌아 보았으면 한다. 나는 앞에서 소비가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라고 했듯이 이벤트 응모나 참가도 자기 신념을 표현하는 시대가 올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 사회의 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가치지향적 이벤트 참여’로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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