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지나가다 읽게 되시는 분에게 - 이 글은 관련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수정 및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영국의 영화업계는 지금 총체적인 위기에 놓인 상황이다.
영국의 영화 산업은 올해 내로 세계 2위 규모로 올라설 전망인 만큼 의외로 무척 거대하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헐리웃의 대스타 배우와 제작자들의 상당수가 영국 출신이지만, 막상 영국의 영화 산업은 홈메이드 & 인디 시장에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고 그간 미국 대형 프로덕션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현재는 '영국 영화' 라고 하면 20년 전의 리처드 커티스 영화만 줄줄이 떠오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나친 외부 프로덕션에의 의존도 탓에 있는지 없는 지도 모를 만큼 쪼그라 든 내수시장, 업계 장기 침체에 따른 인재 이탈과 후배 양성의 어려움, 영국 사회 전반의 경제 불황에 따른 프로덕션 비용 폭증과 예산 삭감, 가뜩이나 좁고 돈 안되는 업계에 발 들이기 더 어려워진 저소득층과 소수그룹의 비 참여에 따른 diversity 역행 기타등등.. 이 암담한 상황에서-
이번 IFTC정책은 드디어 그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하고 모든 문화산업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정부 펀딩’ 항목이 대체 얼마만인지도 모르게 ‘삭감’ 대신 ‘증가’라는 단어를 달고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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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나를 포함한 영화 관계자들에게 정말 잔혹한 해였는데, 판데믹(영국은 락다운을 무려 세차례 겪었다)에서 간신히 회복하나 싶던 차 미국의 작가&배우 파업이 장기화 되며 업계 전체가 셧다운이 되버린 것.
원래도 미국 영화사들에 점점 더 기대던 업계가 판데믹 기간 급상승한 넷플릭스 등의 영향까지 더해져 외부 의존도가 위험하게 높아진 상황에서 벌어진 일에 영국의 영화업계 종사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수만명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 그 상태를 길게는 1년 내내 버텨야 했다. 십수년 경력의 베테랑 스탭이 스튜디오 바닥을 쓰는 일도 좋으니 뭐라도 달라고 애원했다는 기사가 뜨는가 하면, 내가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웃도 (그 집 고양이를 구경하다가 말을 텄다) 영화 쪽 상황을 말했더니 자신이 아는 지인은 영화와는 거리가 먼 파라메딕인데 영화 세트장에서 대기하는 일이 평소 꽤 수익이 컸던 터라 모든 프로덕션이 셧다운 되면서서 덩달아 곤란해졌다고 한다.
그러니 본인이 영화를 직접적으로 찍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케이터링 (밥차), 메딕 (의료진), 셀 수 없이 많은 장비와 도구들의 대여업자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겠는가.
(판데믹 기간 동안 다수 헐리웃 영화들의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이 영화는 N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라는 문구가 뜨곤 했는데, 그 말은 정말 거짓이 아니었던 게다.)
2023년 봄에 (가뜩이나 일자리가 많이 나지 않는 분야인) 영화 상영업 관련 석사를 졸업하고 근 몇년간 주 수익을 연기일로 벌었던 나의 한 해도 정말이지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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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과정 중 몇 모듈은 ‘영국 영화’에 관한 것이었는데, 사실 제대로 된 영화 공부를 시작하기 전엔 나도 ‘영국 영화 뭐 있지?’ 라는 질문을 받으면 다분히 상업적이고 '가족영화'스러운 분위기를 띈 작품들이나 몇가지 간신히 거론했을 것 같다.
실제로 시네필들이 언급하는 영국 영화의 황금기랄까, 하는 시대는 피터 그린어웨이의 작품이라던지 Bronco Bullfrog 같은 60~80년대 작품이 주였고, 보다 최근 작은 Sally Potter의 Orlando, Andrea Arnold의 Fish Tank, Lynne Ramsay** 등이 어떤 모던 클래식의 반열에 있었다… 그러니까 어쨌든간 영국인이 보기에도 ‘볼만한 우리나라 영화’는 최소 15~20년 이상 된 작품들이란 소리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아주 중요한 점은 영국인들이 문화를 얘기 할 때는 'English'란 표현은 거의 쓰이지 않고 'British'라는 표현을 써서 잉글리쉬, 스코티쉬, 웰시 문화를 통합해 말한다는 점이다. 린 람지는 스코틀랜드인이다.
어째 한국 관객의 목소리와도 닮은 데가 있지 않나? 바로 어제만 해도 지인이 ‘이상하게 한국 영화는 잘 안 보게 되더라, 시간이 나도 미드 같은 것만 보다보니..’ 라는 말을 하더라. 그리고 장담컨데 내 주변의 평소 문화생활에 조금 관심이 있는 20~40대들의 90% 정도는 비슷한 말을 할 것이다. 볼 건 많은데, 볼 게 없어. 영화관... 요즘엔 잘 안 가.
그러고 보면 (근래 ‘기생충’으로 대표되는 한류의 르네상스?를 잠시 미뤄두면) 지금의 30-40대가 기억하는 명작들도 다 아마 20년쯤 전 작품이 아닐까 싶다. 허진호 감독이 대표한 낭만적인 멜로의 황금기는 어느새 20~25년 전 일이 되었고, 아직도 해외에서 한국영화 하면 첫번째로 거론되는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은 둘 다 2003년작 ('실미도'도), '박하사탕'이 1999년 작. '왕의 남자'가 2005년, '괴물'이 2006년 작. '마더'와 '박쥐'가 2009년 작.
'곡성'은 2016년 작, '버닝'은 2018년 작... '코로나 바이러스'는 2019년 작. 그 이후 '천만영화'는 훨씬 드문 일이 되었을 거고, 어쩌다 천만을 찍은 영화들도 앞서 말한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완성도의 코리안 클래식'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사실 그 20~25년 전 시점인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이후부터가 본격적인 성장시기였으며 현재 어쩌면 세계적인 주목도에 있어서는 가장 정점을 찍었을 지 모르는 젊디젊은 한국 영화계와, 19세기에 뤼미에르 형제(...) 영화를 상영하고 숀 코너리의 본드 데뷔마저 어연 62년 전인 찐 고인물 바이브의 영국 영화계의 사정을 비교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긴 하겠다만. 묘하게 월드 스테이지에서의 존재감이 비슷한 감은 분명 있다. 예술 영화 씬에서는 분명 수작들이 계속 나오고는 있는데 어쨋든 '찾아봐야 아는' 느낌인 거지.
여기서 다시 다른 점을 찾자면, 한국 영화는 서양의 관객 관점에선 니시한, 매니아층이 있는, 확실히 '힙' 또는 '핫'한 키워드인데 반해, 영국 영화는 은근 '에프터선' 같이 대박 터트린 건들이 종종 있지만 뭐랄까... MI6나 킹스맨 요원이 나오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게 '영국 영화'라는 인식을 안 하는 느낌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영국인이라구요, '웡카' 같은 (다분히 미국 스타일의) 영화도 따지고 보면 영국 국민작가 원작 이야기를 영국 스튜디오에서 영국 스탭들이 찍었고.
어떻게 보면 워낙 오래 전부터 '영화' 보다는 '영화인'을 수출하는 데 탁월한 업계였던 탓에 '무엇을 영국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이 더 복잡해지게 된 셈.
그래서 이번에 발표된 IFTC정책을 두고도 다들 무조건 기뻐하기 이전에 정확한 지원 대상이 누구인지 가이드라인을 분명히 해주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충분히 많이 해먹고 있는) 대형 스튜디오들이 중소규모 프로덕션에 영국인 감독이나 프로듀서를 끼워넣곤 '영국 영화'라는 구색을 맞춰 진짜 지원이 필요한 신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혜택을 가로챌 가능성도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