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한국 생활의 시작, 일기 쓰기를 시작.

글 한 조각 쓰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by Insider Outsider

휴. 새벽 1시 반, 글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진이 다 빠졌다.

브런치는 이전 트럼프 당선 즈음에 가입해서 글 하나를 쓰고 관뒀었는데

로그인 디테일을 찾는데 한 바퀴 빙 돌고.. 그 후엔 크롬 브라우저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크롬으로 로그인을 시도하다.. 카톡 아이디가 잘못 변경되어.. 재설정... 또 한 바퀴 쭉 돌고 와서야 간신히 이 글 작성에 성공한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의 삶이란 건 그런 느낌인 듯하다.

모든 것이 편하게 클릭 한두 번이면 가능할 것 같지만, 그 시스템의 내부에서 쭉 살아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면 장벽의 연속이다. 그나마도 현지에 살고 핸드폰 번호가 있어야 해결이 되지, 국내 계좌나 핸드폰이 없는 경우는 인증이 답이 없는 편.


그러니까, 모든 것이 아날로그여서 오후 5시면 퇴근하고 주말에도 쉬고 뻑하면 annual leave 핑계를 대는 담당자가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다 기본 40분 대기음악을 감상하고 나서야 비로소 1차 연결 (그리고 대부분의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영국 같은 곳과 따지고 보면 뭐 그렇게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다.

아닌가? 그래, 역시 그건 너무 간 것 같지.




한국에 입국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떠나기 직전 무리해서 친구들을 만나고 꼭 보고 싶던 전시와 영화들을 보느라 시내에 자주 나가면서 감기가 걸렸고, 여기 와서도 시차에 적응하느라 (아직 못했다) 일주일간은 주로 칩거했다.


런던을 잠시 떠나고 싶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익숙한 터전이 질렸다는 흔한 이유가 있다.

내 20대는 다양한 프리랜싱 일과 과감한 장기여행을 자주 감행하며 많은 배움과 즐거움을 얻던 시절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로 모든 게 단절되면서 5년 가까이 섬나라에 고립되게 되었다 (탈출하려는 모든 시도는 기가 막히게 구린 타이밍으로 무산되거나, 무자비한 불운의 consquence를 맞았다..)

세상이 조금씩 다시 돌아간다 느끼고 정신 차려 보니 몸은 늙어있고, 마음은 지쳤으며, 일자리는 없더라.


그리고 이 일자리가 없다는 부분이 '어디든 일단 가자'는 결정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무려 석사까지 좋은 학교에서 했는데, 작년 한 해 내내 구직에 별 진전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 쪽은 현재 새 일자리 자체가 없다. 코로나만 해도 큰 blow였는데, 거기에 작가에 배우들까지 장기파업을 해버려 반년 간 거의 모든 촬영이 올스탑 됐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봄에 대한 기대 없이 한번 더 겨울을 나면 죽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래서 단기이민을 감행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에 북경을 간 것도 그래서였는데... 이건 언젠가 또 쓰겠지. 뭔 일기가 이렇게 길어지니. 이래서 내가 트위터나 하려고 했다고.




솔직히 지난 일주일간은 날씨가 너무 영국이랑 똑같아서 조금 현타가 오려고 했다.

아니 내가 이 애매한 추위와 흐린 하늘, 비 보려고 지구 반바퀴를 돌아온 건 아니었는데? 저는 좀 더 눈 같은 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와중에 건조함과 미세먼지는 착실하게 나의 비강을 자극해, 영국 이민 후 22년간 자취를 감췄던 비염(으로 추정되는 증상)을 재발시켰다.


그러다 오늘 아침, 제대로 비가 내린 직후 공기를 들이마시니... 인정하긴 싫지만, 영국인은 그 습도에서 마치 고향의 정취를 들이마시는 듯한 편안함을 느껴버렸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 거지 같은 섬나라에 22년간 버려진 후로 (이걸 광희 목소리로 늘 머릿속에서 소리친다) 내 몸이 미세먼지보단 곰팡이 친화적인 체질로 착실히 진화해 온 걸 종종 느낀다.



두서없는 일기니까 여기서 대충 잘라야지.

오늘 주운 마음에 드는 짤들로 마무리.

@yedako2 님의 사진.

바이올린과 꽃에 둘러싸인 장모 고양이들이라니 (이 집 애기들 정말 예쁘다), 마치 '귀를 기울이면'의 한 장면 같다.


오늘 비가 온 건 사이언스란다.


Babies of Inisherin.


그러게나 말입니다.

한국에 왔으니 조만간 목욕탕이나 가야지.

작가의 이전글한국에 오니 밥이 맛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