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자네는 마치 장군이라도 된 듯 사람들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구만"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인기를 독차지하는 라파엘로를 보고 미켈란젤로는 빈정거렸다. 라파엘로는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선배님은 늘 혼자 걸어 다니시더군요. 꼭 사형수처럼요." 가뜩이나 맘에 안 드는 후배한테 역시나 또 한 방 먹었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까다롭고 괴팍한 미켈란젤로는 수도사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지만 라파엘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삶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미켈란젤로는 여자를 멀리했지만 라파엘로는 늘 여자들 사이에 있었다. 키가 작고 등이 살짝 굽은 체격의 미켈란젤로는 과거 동료 조각가 피에트로 토리지아노와 싸우다 코뼈가 내려앉은 모습이었고 라파엘로는 주변의 사람들 모두가 돌아보게 만드는 꽃미남이었다.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리려는 미켈란젤로는 번번이 매질을 당했지만, 궁정화가 아버지를 둔 라파엘로는 좋은 스승 밑에서 일찌감치 영재교육을 받고 자랐다.
미켈란젤로에게 세상은 온통 불공평한 일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1504년 어느 날, 피렌체시가 베키오 궁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벽화를 의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상당한 금액의 보수를 제안했다는 소문과 함께. 미켈란젤로는 화가 났다. 얼마 전 자신이 제작한 '다비드 상'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찬사를 넘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길이 약 5.5미터, 무게가 약 6톤에 달한 대리석은 이미 두 명의 조각가가 중도 포기해 미완성인 채로 25여 년간 방치된 탓에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런 불완전한 대리석으로 결점 하나 없는 걸작을 만들어낸 미켈란젤로. 그뿐인가 다비드 이전에 '피에타'라는 작품으로 피렌체뿐 아니라 전 유럽이 그를 젊은 천재 예술가라고 인정했는데 자신보다 더 높은 금액의 보수를 받는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장관 피에로 소데리니에게 찾아가 자신이 다빈치가 그릴 벽화의 맞은편 벽화를 그리겠다고 제안한다. 피에로 소데리니는 환호했다. 이름만으로도 최고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떠오르는 신예 스타의 대결이라! 이 경쟁은 피렌체의 위상을 높이고 후세에 남을 위대한 예술적 유산이 될 거라고 자신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피렌체 공화국과 밀라노 공국 간의 전투에서 피렌체 군이 승리한 ‘앙기아리 전투(Battle of Anghiari)’를, 미켈란젤로는 피사 공성전에서 피렌체 군이 승리한 ‘카시나 전투(Battle of Cascina)’를 주제로 골랐다. 29세의 혈기 왕성한 미켈란젤로는 며칠 밤낮을 베키오 궁전의 벽을 채울 '카시나 전투'의 구상에 몰두했다. 이미 50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재능과 명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떻게 하면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것인가 고민했다. 피렌체가 승리했던 카시나 전투가 이번엔 자신의 승리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러나 아쉽게도 이 세기의 대결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이 나 버린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스푸마토 기법을 벽화에 적용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초기 시도에 실패했고 당시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혼란스러웠던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가게 된것이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호출을 받아 로마로 가야했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20대에 '피에타'와 '다비드'를 조각한 신예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영묘를 장식할 40개의 조각을 의뢰했다. 이 영묘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될 예정이었고, 교황은 이 영묘가 자신의 권위와 위대함을 상징하는 거대한 기념비로 남기를 바랬다. 미켈란젤로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조각 재료를 준비하고 설계를 구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40개의 작품이라니 평생의 과업이 될만했다. 어쩜 이 시기가 미켈란젤로에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이 프로젝트는 지지부진하게 축소되거나 중단되기를 반복했다. 전사교황이라 불리던 율리우스 2세는 군사 활동과 로마의 재건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지은 낡은 베드로 성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성당을 짓는 계획을 세우며 영묘 장식에 필요한 조각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영묘 프로젝트가 지연되면서,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새로운 과제를 맡긴다.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을 장식하는 대규모 회화 프로젝트였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은 게으름뱅이에게나 어울리는 예술’이라며 자신은 극구 조각가로 불려 지기를 바랐기에 이 제안에 당황했다. 그러나 교황의 의지는 강했고, 미켈란젤로는 결국 이 작업을 수락하게 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를 천장화 작업에 투입한 이유가 그의 재능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하며 바티칸 성당의 설계자인 브라만테가 자신과 의견충돌을 빚던 미켈란젤로를 곤란에 빠트리기 위해 교황에게 적극 추천했다는 설도 있다. 진실이야 어쨌든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약 4년에 걸쳐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장식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성경의 창세기를 주제로 한 작품들로 구성된 천장화는 우리가 흔히 '천지창조'라 부르는 작품으로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아담의 창조'다.
미술사를 강의하다 보면 어떤 예술가를 가장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가끔 듣는다. 한 둘을 특정하기 어려워 좋아하는 예술가는 너무 많은데요, 존경하는 인물을 꼽자면 바로 미켈란젤로 입니다라고 답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미켈란젤로가 아니면 완성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가끔 힘에 부치거나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땐 천장화를 그리는 미켈란젤로를 떠올린다. 그러면 뭔지 모를 울컥함과 함께 조금은 버틸 힘이 생겨난다.
20미터 높이의 천장은 넓이가 약 1,100제곱미터, 평수로 따지면 333평이다. 이 넓은 천장에 창세기의 9개 주요 장면과 하나님의 계획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죄와 구원의 서사시가 담겨있다. 그의 완벽한 기획과 연출력은 경외의 대상이지만, 그가 경험한 심리적 부담과 육체적 고통은 연민의 대상이다. 그래서였겠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눈물이 났다. 나약한 인간이 극한의 한계를 넘어 남겨놓은 예술의 결정체,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한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절감하였다.
20미터 높이의 천장에 그림을 그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20미터라면 건물 5-6층 되는 높이다. 일단 천장에 닿을 수 있는 비계를 설치해야 한다. 설치된 비계위에서 천장에 그림을 그리려면 고개를 뒤로 90도 정도로 꺾거나 누워서 팔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벽화를 그리는 기법인 프레스코화는 젖은 석회 벽에 물감을 직접 칠하는 방법으로 물감이 벽에 흡수되면서 굳는 방식이다. 매일 아침 새로 바른 회반죽 마르기 전에 한 번에 완성해야 하는 영역이 있는데 이를 조르나타(giornata)라 한다. '하루의 일'이란 뜻이다. 만약 천장화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각 조르나타의 경계선을 희미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은 네 개의 조르나타, 아담의 손가락에 팔을 뻗어 혼을 불어넣는 신도 네 개의 조르나타로 이루어져 있다. 갠 석회와 물감을 나르기 위해 몇 번이고 비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어려움, 자칫 실수라도 하면 석회가 단단하게 굳어 수정하기 어려웠기에 늘 긴장해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초기엔 회반죽을 제대로 바르지 못해 실패했고 교황에게 작업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명의 조수가 허드렛일을 도왔지만 대부분의 작업을 직접 처리했다. 이 작업을 의뢰한 율리우스 2세도, 그림을 그리는 미켈란젤로 자신도 이 작업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심리적 압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직접 쓴 소네트에서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이 기괴한 자세 때문에 나는 갑상선종에 걸리고 말았네. 롬바르디아의 농부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물을 마시고 그렇게 되듯 말일세. 위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와 턱 밑에 걸려있는 듯하네. 턱수염은 하늘을 향해 있고 목덜미는 등에 닿아 있네. 나는 하르피이아처럼 가슴을 구부린다네. 그런데도 위에서는 물감이 계속 흘러내려 내 얼굴은 물감 범벅이 되고 마네. 허리를 바짝 당겨 배가 불룩 나오고, 평형을 유지하느라 엉덩이는 말 엉덩이처럼 된다네. 그러면 다리는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해지지. 시리아의 활처럼 몸을 구부리면 앞가죽은 팽팽해지고 뒷가죽은 쪼글쪼글해지지. 그러면 나쁜 생각이 떠오른다네. 구부러진 활로는 똑바로 쏠 수 없는 법이니. 지금부터 나의 생기 없는 그림을 지켜주게. 그리고 나의 명예도. 나는 엉뚱한 곳에 와있고, 사실 화가도 아니라네. (미켈란젤로, 마로니에 북스)
신발을 벗지도 않고 비계위에서 혹은 성당 바닥에서 잠이들고 딱 죽지 않을 만큼의 빵과 포도주로 지내던 4년이 흘렀다. 1512년,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은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성경의 창세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신은 세상을 지으신 이후 이 작품을 보고 다시 한번 심히 좋아하셨을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내려놓은 미켈란젤로, 큰 한숨을 내어 쉬며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그동안 그려오던 예배당 천장화 작업을 끝냈습니다. 교황이 매우 만족했습니다"라고만 전했다. 이 작업은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그가 회화에서도 천재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1541년 10월 31일, 미켈란젤로가 기적과 같은 천장화를 완성한 후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로마의 모든 시민과 성직자들은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벽화가 공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 뒤편의 50평 남짓한 벽면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두 번째 작품이 공식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선 보이는 순간이었다.
공개된 '최후의 심판'은 모두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중심으로 천국에 오르는 사람들과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의 무리는 미켈란젤로 특유의 인체 표현으로 경외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만큼 역동적이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 요구가 커져있는 상태였다. 이에 교황은 교회의 권위와 신학적 교리를 강조하려 했고 '최후의 심판'은 교회의 정통 신앙을 시각적으로 강화하며 두렵고 엄숙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보는 이를 더욱 충격에 빠져들게 한 요인이 있었으니 예수와 마리아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나체로 그려져 있던 것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입장에서 나체로 묘사된 인물들은 인간의 원초적 상태를 상징하며, 신의 창조물로써의 순수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벽화를 향해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는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벽화를 그리던 과정에서 교황청 성직자들이 이 그림을 보았을 때부터 시작된 비판이었다. 그중 비아조 다 체세나 추기경이 거세게 비난했는데 '최후의 심판'은 목욕탕이나 술집에서나 볼만한 작품이지 결코 교회에 있을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신을 향한 비난에 잠자코 있을 미켈란젤로가 아니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 지옥의 왕 미노스의 얼굴을 체세나 추기경의 얼굴로 그렸다. 심지어 귀는 바보를 의미하는 당나귀의 귀로 묘사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한 마리의 뱀이 미노스 아니 추기경의 성기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바오로 4세는 거슬리는 부분에 적절한 옷을 덧입혀 그려 넣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즉 그림 속 인물들의 중요부위에 일종의 모자이크 처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림의 수정을 거부하던 미켈란젤로가 사망하고 미켈란젤로의 수제자 다니엘 다 볼테라가 중요부위를 천으로 덮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브라게토네(바지 입히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의 원작 위에 다니엘 다 볼테라에 의해 중요부위가 천으로 덧씌워진 작품인 것이다.
평생 죽음이 자신에게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던 미켈란젤로는 80대가 되어도 여전히 강인했다. 눈에 가시 같던 라파엘로와 레오나르도는 이미 4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시간을 즐기는 방법은 일을 하는 것이었고, 끌을 잡고 육체적 활동을 하는 것이 건강을 유지해 준다고 생각했다. 작업을 할 때 두 손을 더욱 자유롭게 하기 위해 튼튼하고 두꺼운 종이로 모자를 만들어 불을 밝힌 양초를 머리 한가운데 꽂고 다녔다.
죽기 직전까지 만들던 조각은 피에타였다. 마리아와 예수의 몸이 하나의 긴 기둥처럼 연결된 모양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이전 조각과는 달랐다. 스물네 살의 나이의 미켈란젤로에게 명성을 안겨준 첫 번째 피에타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기술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했다면 89세의 미켈란젤로가 만들고 있던 마지막 피에타는 인간 내면의 고통과 영적인 열망이 담겨있는 것 같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라고 불리는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엔 미완성된 거친 표면과 다듬어진 매끄러운 대리석 부위가 묘하게 공존하고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두 피에타는 마치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듯하다.
첫 피에타에서 느껴지는 완벽한 아름다움은 젊은 시절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을 반영하는듯 하다. 미켈란젤로는 어떤 삶을 꿈꾸었을까. 한가지 확실한 건 마지막 피에타에는 미켈란젤로의 삶의 무게와 고독 그리고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마치 미완성의 악보처럼, 우리에게 작품을 완성할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일까? 완성되지 않은 작품에서 이렇게 큰 울림이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480년 동안 시스틴 성당의 벽을 장식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은 먼지, 그을음, 천장의 누수로 인해 많은 부분 변색이 되고 파손되었다. 성당 측은 본래의 모습을 찾자는 취지로 복원(復原)을 결정한다. 복원의 과정에서 가장 골치 아팠던 문제는 1564년 다니엘 볼테라에 의해 덧칠된 부분을 제거하느냐 마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성당과 복원 팀은 다니엘 다 볼테라의 가필을 일부 유지한 채 복원하기로 결정한다. '최후의 심판'이 겪은 숱한 역경과 치욕까지도 그 그림이 가진 하나의 역사이며 위대한 작품이 남겨지는 과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만난 날, 나의 몸통은 텅 비어진 항아리 같아지고 그 안에 끝도 없는 울림이 계속되며 정신이 아득해졌던 느낌을 기억한다. 지금도 도판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볼 때면 이유 없는 먹먹함이 밀려온다. 어느 날 그 이유를 김은경 작가의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수십 년간 매일매일의 시간 흔적이 세월의 흐름을 따라 점점 희미해지고 급기야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짐작하는 일은 강한 울림을 준다. 영원하지 않은 인간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되풀이해 묵묵히 쌓은 흔적은 왜 하나같이 뭉클한가.-김은경, 습관의 말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