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산치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느 날 엄마는 빠듯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무려 50권에 달하는 위인전집을 구입해 내 방 책장에 꽂아 두셨다. 엄마는 그 책 더미가 마치 내 성공적인 미래를 보장해 주는 상징이라도 되는 듯 뿌듯해하셨다. 동서양의 위대한 인물 50명의 이야기를 모두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위인들이 시련과 실패를 극복하며 결국 성공하는 감동적인 결말이 아니라 오히려 사소한 디테일들이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유리왕이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 주몽(동명왕)을 만나기 위해 찾아야 했던 증표 같은 것 말이다.
유리는 어린 시절 아버지 없이 자랐다. 어느 날, 활을 쏘다 동네 아낙이 머리에 이고 가던 항아리를 깨뜨린 유리는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핀잔을 들었고,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우리는 지금 부여에 살고 있지만, 네 아버지는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운 왕이다”라고 말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유리에게 어머니는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아버지가 남긴 증표가 있다고 했다. 증표를 찾기 위하여 며칠을 헤맸지만 결국 이 암호를 풀지 못해 낙담하며 툇마루에 앉아 있던 유리는 의외의 장소에서 문제를 풀게 된다. 자신의 집 주춧돌이 일곱 모를 가졌고, 그 위에 세워진 기둥이 소나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찾아낸 증표는 부러진 칼날이었다. 유리는 그 증표를 가지고 고구려로 가 동명왕을 만난다. 자신이 부여에 남겨진 아들임을 말하며 부러진 칼날을 내밀었다. 동명왕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자루를 가져와 유리가 가져온 칼날에 맞춰본다. 당연하게도 유리의 부러진 칼날과 동명왕의 칼자루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며 하나의 칼로 완성된다. 결국 유리는 동명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2대 왕이 된다.
열 살도 안 된 나였지만 칼자루와 칼날이 만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와 해피엔딩의 짜릿함을 한껏 만끽했다. 그러나 이내, 만약 유리가 칼날을 찾지 못한 채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아들임을 주장한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주몽이었다면 칼날이 없이 빈 손으로 온 유리를 아들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엄마가 사준 위인전은 "나도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라는 다짐 대신 "왜 사람은 보이는 것만을 믿는 걸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가져왔다.
우리의 의사결정에 바탕이 되는 정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을 통해 얻어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거나, ‘안다’라는 의미의 영어 I see 또한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임을 의미하듯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물리적 증거야말로 객관적인 사실로 간주되어 믿음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이러한 증거가 개인의 기존 신념과 일치할 때, 그 신념은 더욱 확고해진다. 내가 아는 50대 화가 한 분은 젊은 시절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해야겠는데 반지를 살 돈이 없어 음료수 캔의 뚜껑 손잡이를 따서 손가락에 끼워주었다고 했다. 그럴듯한 말만으론 부족할 것 같아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물적 증거가 필요했고, 그때 마침 마시던 음료 캔이 있어 순발력을 발휘한 것이라 했다. 옆에 앉아 미소 짓던 아내분이 20여 년간 소중히 간직해 온 그 캔 뚜껑 손잡이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두 분에겐 캔 뚜껑의 손잡이는 사랑의 약속을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 증표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것이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연인들에게 물리적 증표는 사랑의 견고함을 확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넌 내 거야!”라고 연인을 향한 사랑의 증표를 그림에 박제해 놓은 화가가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어서 더 열렬했을까?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대담하게 공표한 그 남자는 미모와 재능, 성공과 명성까지 모든 것을 갖춘 완벽남이었다. 심지어 약혼녀까지 가지고 있었다.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예술가로 칭해지는 이탈리아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다. ‘완벽’이라는 단어는 무언가가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고, 부족하거나 결함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것이나 사람이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는 최고 수준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를 라파엘로에게 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 그리고 예술 평론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하늘은 예술을 정복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이 세상에 보냈지만, 예술뿐 아니라 예절도 다스리기 위해 라파엘로를 세상에 내보냈다"라고 말하며 성격이 괴팍했던 미켈란젤로에 비해 인간성까지 겸비한 라파엘로의 예술성을 찬미했다.
18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했고, 라파엘로는 천국을 주었다."라고 말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보다 한 수 위의 예술가로 평가했다. 누군가 라파엘로를 '책임감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욱하지 않는 미켈란젤로'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는데 꽤 적합한 표현이란 생각에 풋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르네상스의 거장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두 거장의 단점을 보완한 완벽한 인물 라파엘로 산치오, 우리에겐 두 거장에 비해 다소 덜 알려진 라파엘로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인싸 중에서도 인싸, 셀럽 중에서도 쎌럽인 예술가였다.
라파엘로의 붓을 통하면 아름다움은 천상의 것이 되었다.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와 레오 10세(재위 1513~1521)가 그의 작품을 찬양하며 의뢰를 멈추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수려한 외모, 몸에 밴 우아함과 예의 바른 태도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디를 가든지 귀족 가문들의 부인들이 그를 만나려고 애썼고, 그에게 작업을 의뢰하거나 초상화를 요청하며, 그의 작업실에 몰려들었다. 귀족들이 점찍은 최고의 사윗감이자 모든 여인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던 라파엘로는 웬만한 여성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라파엘로는 흔들림 없는 인생에 태풍을 일으키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마르게리타 루티(Margherita Luti), 가난한 제빵사의 딸이었다. 그 어떤 여인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매혹을 느꼈다. 마르게리타의 매력적인 눈빛과 우아한 미소는 라파엘로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라파엘로는 그녀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마르게리타의 아버지에게 딸이 빵집에서 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고 넉넉한 금으로 보상하였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된 마르게리타와 라파엘로는 금세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라파엘로에게 정기적으로 작품을 의뢰한 베르나르도 추기경의 조카 마리아 비비에나와 약혼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도 추기경은 레오 10세의 가문인 메디치 가문과도 가까운 사이였으며, 교황청의 재정 관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로 라파엘로는 그 약혼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마르게리타를 만난 라파엘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비비에나와의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며 마르게리타와의 비밀스러운 사실혼 관계를 유지한다. 약혼녀 비비에나는 라파엘로와 약혼 상태로 6년을 지내다 결국 결혼하지 못한 채 1520년 사망한다.
라파엘로는 자신의 뮤즈인 그녀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내는데 어떤 작품에선 자애롭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또 다른 작품에선 우아한 귀족 부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중 마르게리타 루티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라 포르나리나' 속 마르게리타는 비너스의 포즈라고 불리는 '비너스 푸디카' 자세를 취하고 있다. '푸디카'는 '수줍은' 또는 '순수한'이라는 뜻으로 ‘비너스 푸디카’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에서 미의 여신 비너스가 한 손으론 가슴을, 다른 한 손으론 음부를 가린 포즈를 말한다. 라파엘로는 '라 포르나리나' 속 마르게리타를 여신이 가진 신성한 아름다움과 더불어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분위기의 여성으로 그렸다. 그녀의 표정은 정숙한 것 같으면서도 도발적이고 도도한 것 같으면서도 장난스럽다. 아주 섬세한 터치로 투명하고 매끄러운 피부와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표현했다. 머리엔 당시 로마 귀부인들의 머리장식인 터번을, 그녀의 팔뚝에 팔찌를 둘렀는데 그 팔찌엔 "넌 내 거야!" 라며 둘의 관계를 세상에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신분차이로 인한 둘의 관계에는 많은 방해가 있었다. 돈 봉투 내밀며 라파엘로 앞에서 사라져 달라는 후원자의 협박, 살해 위협을 받기도 한 마르게리타를 영원히 자신의 세계 속에 남기고자 한 것일까? 비밀스러운 연애의 대담한 공표를 마르게리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2001년도에 그림의 복원을 위해 실시된 엑스레이 분석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원래 마르게리타의 왼 손 네 번째 손가락에 그려져 있던 반지가 덧칠된 채로 480년간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라파엘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라파엘로는 안타깝게도 37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하는데, 라파엘로의 사인으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열병, 과로로 인한 면역력 저하, 그중 조르조 바사리는 그의 전기에서 라파엘로의 사인을 마르게리타와의 열정적인 애정행각이라고 언급했다. 교황의 공식적 후원을 등에 업고 추기경의 조카와 약혼을 한 최고의 엘리트 화가가 가난한 빵집 딸과 몰래 연애를 하다 죽었으니 그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 후폭풍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녀를 그린 초상화엔 ‘넌 내 거’라는 표식과 결혼반지와 같은 증표가 남겨져 있으니 라파엘로의 제자들은 그들의 관계가 들통나 스승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해 반지를 덧칠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언제, 왜 반지를 덧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단지 우리는 어떤 사실 하나에 수많은 이야기를 붙여 그 그림이 가진 극적인 스토리를 즐겨 그림을 감상할 뿐이다.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물리적 증거가 믿음을 강화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없던 믿음을 추론하여 새로운 신념으로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라파엘로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로마 교황청 소속의 화가가 된다. 교황이 거주하는 관저인 사도궁전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교황의 개인서재였던 '서명의 방'을 장식하는 일을 다른 화가들과 함께 맡게 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출중한 실력을 보여준 라파엘로는 교황을 감동시켰고, 교황은 다른 화가들이 그렸던 그림을 모두 긁어내라고 명령한 후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방을 가득 채우게 한다. 네 개의 벽에는 각각 철학, 문학, 신학, 법을 주제로 한 작품이 그려졌고 이 중 철학을 주제로 한 벽화가 바로 '아테네 학당'이다.
이렇게 라파엘로가 승승장구하던 시기 사도궁전의 경당인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라파엘로는 비밀리에 작업하던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큰 영감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힘 있고 드라마틱한 인물 표현에 감탄한 라파엘로는 자신의 작업에도 그런 특징을 반영하려 노력한다. 여기에 바로 라파엘로의 최대 장점이 있다.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전 많은 예술가들은 거칠고 외곩수에 광기마저 보이는 사람들로 비추어졌다. 자신의 방법만이 옳은 것이라고 믿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라파엘로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라 생각하면 배척하지 않고 인정했다. 그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눈부신 재능을 가진 라파엘로가 또 다른 천재 두 명에게서 끊임없이 배웠으니 그 성품과 집념은 그를 완벽한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을 그리기 전 실물 크기의 스케치를 여러 번 했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테네학당 스케치는 서명의 방에 있는 원본과 흡사하다. 대부분의 스케치가 원본에 반영되었지만 원본에는 있지만 스케치에는 없는 인물이 있다. 원본 벽화 중앙 계단에 앉아있는 헤라클레이토스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구도상 동떨어져 보이고 원근법도 약간 어긋나 보인다. 이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모델로 그려졌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함께인 반면 혼자 앉아 사색에 잠긴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고독한 작업 스타일과 내면의 깊은 사유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듯하다.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고 난 후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최후에 추가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아테네 학당의 중앙에 서 있는 두 명중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은 천상의 이데아를 지향했던 플라톤으로 그의 얼굴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렇듯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경쟁하기도 했지만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에게 라파엘로는 그저 겉멋이 가득 든 애송이 샌님, 외모 하나 믿고 까부는 버릇없는 젊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