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예수를 위한 애도>
1944년 3월 11일 연합군은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에 300톤의 폭탄을 투하한다. 목표물은 이탈리아 북동부의 철도 허브인 파도바 중앙역 그리고 이탈리아, 독일군의 군사기지와 보급 창고였지만 주변의 민간인 지역과 문화재, 예배당과 같은 역사적 건물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특히 에레미나티 교회의 오베타리 예배당은 완전히 붕괴되며 내부의 벽에 그려져 있던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의 프레스코화가 산산조각 났다. 이 벽화는 괴테가 1786년부터 1788년까지의 이탈리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이탈리아 기행'에서 언급한 바 있는 초기 르네상스의 걸작이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섬세함과 사실성으로 진정한 현실을 담아냈으며 후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중세라는 야만시대 이후의 미술 발전을 견인하였다고 칭송한 작품이다.
붕괴된 예배당의 잔해 속에서 조각난 프레스코화 파편들을 구조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문화재 전문가와 복원팀은 평균 표면이 6~7 cm²인 조각 88,000개를 수집했지만 이는 전체 작품의 극히 일부였다. 이후 60여 년간 프레스코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다 2001년에 의외의 분야에서 그 해결법을 찾게 되는데, 수학자 마시모 포르나시에르(Massimo Fornasie)의 연구팀에 의해서였다. 마시모 프로나시에르는 수학자이자 데이터 과학자로 디지털 이미지 복원과 신호 처리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쌓은 전문가다.
포르나시에르팀은 프레스코화의 조각들을 디지털로 스캔하여 고해상도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쟁 전에 벽화사진을 찍어놓은 프라텔리 알리나리(Fratelli Alinari) 덕분에 원본의 흑백사진이 남아있었고 이 흑백 사진과의 비교를 기반으로 조각의 원래 위치와 방향을 매핑하는 효율적인 수학 기반 패턴 인식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이후 최적화 이론을 사용하여 각 파편을 원래 위치에 맞추기 위한 최적의 배치를 계산하는데, 이는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것과 유사한 과정으로 그래프 이론과 네트워크 분석이 활용되었다. 스캐닝과 모델링 기술을 통해 예배당과 프레스코화의 정확한 3D 모델을 생성하고 이를 통해 파편들이 공간적으로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오베타리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는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파괴된 뒤 만테냐 사후 500년이 되는 2006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일반인들에게 오픈되었다. 물론 전체 벽화의 8% 정도 되는 부분만이 복원되었고 나머지는 흑백의 캔버스 위에 색을 입혀 복원된 부분, 이전에 따로 보관해 놓았던 부분 등 완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참담함 속에서도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물이었기에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 우리에겐 조금 생소한 이름이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견인한 인물로 후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반니 벨리니, 알브레히트 뒤러 등 많은 화가들이 모두 앞다투어 만테냐의 양식과 기법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면서 르네상스 미술이 더욱 풍부해졌고 나아가 미술사의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
1431년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구두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만테냐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11살에 파도바로 가서 당대 최고의 화가인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의 제자가 된다. 당시 파도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와 통제 아래에 놓여있던 도시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고대 로마의 문화연구에 관심이 높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고고학자, 인문주의자, 예술가들이 몰려들었고 만테냐는 이들과 교류하며 인문 예술적 소양을 쌓았다.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던 만테냐는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에레미타니 교회에서 오베타리 예배당의 프레스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20대의 만테냐는 이미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안드레아 만테냐가 활동했던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만테냐를 비롯한 당대 예술가들은 대부분 교회와 성직자, 또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에 기독교적 주제가 중심을 이루었다. 기독교 미술에서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주제 중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이 있는 대표적인 것이 "피에타"와 "라멘타치오"다. 피에타(Pieta)는 라틴어로 ‘불쌍히 여기다’란 의미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각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바티칸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살아생전 총 3개의 피에타를 제작했는데 마지막 피에타는 완성하지 못했다.
라멘타치오(Lamentation), 또는 라멘테이션(Lamentation)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을 말한다. 이 장면은 보통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 주변에서 성모 마리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슬퍼하며 애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성모마리아, 성 요한, 막달라 마리아, 니고데모와 요셉 등이 주로 등장한다. 예수의 희생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의 고통을 강조하며, 보는 이들에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게 하는 목적으로 그려졌는데, 예술가들에게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깊게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주제였다.
만테냐가 50대에 그린 라멘타치오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Lamentation of Chirst, 1480년경>는 원근법의 일종인 단축법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당시의 사람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원근법은 1420년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성당의 돔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 원리를 연구하고 실험하며 정립한 이론이다. 소실점과 수평선의 개념을 도입하여 평면적인 그림에 깊이와 현실감을 부여하는 이 방법은 화가들이 2차원의 캔버스에 더욱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을 할 수 있게 해 준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화가들이 건물이나 풍경, 배경 등을 원근법으로 표현했다면 만테냐는 인간의 신체 자체에 원근법, 특히 단축법을 적용시켰다. 물체나 인물이 시선과 직각이 아닌 각도로 배치되면, 보는 이의 눈에는 그 물체나 인물의 길이와 폭이 압축된 것처럼 보인다.
죽은 예수는 우리의 시선과 직각이 아닌 상태로 누워있다. 머리는 위쪽에, 아래쪽엔 발이 그려져 있다. 예수의 발 쪽에 서서 누워있는 예수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이 작품은 이전까지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과감한 구도로 관람자를 죽은 예수의 발끝에 서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목격자로 만든다.
맨 처음 우리의 눈길을 끄는 손과 발의 못자국은 핏기마저 다 빠진 채 그 상처가 너덜너덜해져 있다. 창에 베여 찢긴 오른쪽 갈비뼈 부분의 상처도 보인다. 인간이었던 예수가 겪었을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그림을 보며 죽기 전 예수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생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처절한 육체의 고통은 죽어야만 비로소 안식으로 바뀌었으리라. 미간에는 생전의 고통이 메아리처럼 어려 예수의 얼굴에 드리워진 안식을 처연하게 만든다.
그의 곁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통의 가운데 서있는 네 사람이 있다. 화면 왼쪽 상단에 선 성모 마리아, 성 요한, 마리아 막달레나. 그런데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을까? 예수의 발에서 손으로, 얼굴로 시선을 옮기다 만나게 된 세 사람의 슬픔을 바라보는 다른 한 사람, 바로 관람자다.
신의 아들이었지만 고통과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인간.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가 겪었을 고통을 더 현실적이고 강렬하게 전달하여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만든 것.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부활의 전제조전인 죽음을 실재하게 만든 것이 바로 만테냐의 위대함이다.
영국 출신의 박물관 전문가이자 예술 역사학자인 제임스 브레드번은 "만약 예수의 죽음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구원론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고 만테냐는 이런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깊은 영적 체험을 제공한다."라고 말한다. 만테냐는 기존의 기독교 미술의 전통을 완전히 깨고 신앙의 핵심 사건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기독교 미술의 상징성을 참신한 관점으로 실험하였고 그 실험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에 가기 전, 나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를 반데라-올미의 독특한 전시 연출로 보게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 연출은 영화감독 에르만노 올미와 브레라 미술관의 큐레이터 산드리나 반데라가 협력하여 기획한 것으로, 어두운 공간의 바닥에 가까운 위치에 그림을 배치해 관람객이 작품을 내려다보게끔 전시한 것이다. 마치 실제 예수의 죽음을 목격하는 상황처럼 연출한 것인데 이 극적인 설치 방식은 작품의 독특한 원근법을 강조하며, 깊은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말로만 전해 들은 이 독특한 연출이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그것이 내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했다. 미술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어떤 미술관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대와 흥분이 나를 감쌌다.
설레는 마음으로 전시실에 도착했지만 기대와는 다른 광경을 마주했다. 2016년 이후, 반데라-올미 연출은 철거되었고, 전시실의 중앙에 패널을 설치한 후 그 벽에 작품을 걸어 놓는 조반니 아고스티의 연출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었다. 이전의 반데라-올미 연출은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동시에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작품이 지나치게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전시된다는 우려와 함께, 이 연출이 또 다른 걸작인 조반니 벨리니의 <피에타> 같은 다른 작품들을 부수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조반니 아고스티 구성의 사진에서 오른쪽 푸른 벽에 걸려있는 작품이 조반니 벨리니의 <피에타>다) 또한,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극적인 방식이 오히려 관람객의 진지한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기대하던 스타일의 전시를 못 보아 나는 못내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고스티의 구성은 전시실의 중앙에 패널에 작품을 걸고 이 위치를 15세기와 16세기를 잇는 전환점이라 규정함으로 예술 작품을 학문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 경험을 통해 관람객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감동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미술관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또 다른 큰 수확이었다
500년 전, 나보다 앞서 이 세상을 살았던 한 예술가의 치열한 고민은 그가 남긴 예술 속에 생생히 숨 쉬고 있다.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이 작품 앞에 선 무수한 사람들,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의 관람객들까지 그들의 속삭임과 탄성이 보이지 않는 실로 엮여 지금의 나와 연결되는 듯했다.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서 있으며 예술 작품이 지닌 이 놀라운 힘 앞에서, 경외감과 감동, 그리고 한없는 겸손함을 동시에 느꼈다.
만테냐보다 60년 후에 활동한 독일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 한스 홀바인은 이 그림을 보고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이 그림이 한스 홀바인의 작품 '죽은 예수'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한스 홀바인이 만테냐의 그림을 직접 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만테냐의 명성으로 보아 그의 작품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술적 혁신을 발판 삼아 또 다른 진보를 이루어낸 이들, 그들이 바로 미술사에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다. 한스 홀바인 또한 만테냐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새로운 차원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내며, 미술사의 흐름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킨 예술가라 할 수 있다. 다음은 한스 홀바인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