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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스피아 Jul 30. 2021

일본을 처절하게 반성한 일본의 지식인

"내가 학살의 현장에 있었다면 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여러분은 '역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대부분 학창시절에 한번쯤은 근현대사, 국사, 세계사 등 역사 과목을 배우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문과인데다가 선택과목으로 국사, 근현대사를 선택했었기 때문에 고3때까지 역사 과목 때문에 진땀을 뺀 경우입니다. (세계사를 택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을까요.) 


 역사 과목을 두과목이나 선택한 이유는 역시, 그나마 사회과목들 가운데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는데요. 하지만 정작 수능을 앞두고 역사를 공부할 때는 '태정태세문단세...'나 신미양요 갑오개혁 연도만 달달 외웠던 것만 기억이 납니다. 이후 대학에 가면서는 역사에 대한 흥미를 잃고 거의 역사책을 읽지 않게 되었지요.  


 사실 점수 위주로 평가하는 수능의 폐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 역사 교과서의 내용 자체도 그다지 재밌게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항상 촘촘한 연표에는 정복 전쟁이나 국경선의 변화 등의 사실들이 주렁주렁 나오는데 해당 전쟁에서 수백, 수십만명이 죽었다는 말에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죠. 


 하지만 저의 이런 생각을 조각조각 부수어준 계기가 헨미 요라는 작가를 접하면서였습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수백만명'이라는 무뚝뚝한 글자를 부수고 그 안에서 죽어간 한명 한명을 집요하게 끌어내는 방식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지금 이 자리'에 소환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교도통신 기자 출신의 일본 작가 헨미 요(1944~)




■사람이 살기 위해 먹는 것은 그가 속한 사회를 보여준다 : <먹는 인간>


 헨미 요는 일본의 교도통신 국제부 기자 출신으로 ,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소설가이자, 시인, 역사가이기도 합니다. 국내엔 그의 책 가운데 <먹는 인간> <1937이쿠미나>가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선 <먹는 인간>은 그가 국제부 기자로 재직하던 1992~3년 직접 태국, 소말리아, 동유럽, 필리핀 등 분쟁지역도 불사하고 세계를 돌며 '사람들이 입에 집어 넣는 것'을 통해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 개개인의 미시사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시장에서 음식찌꺼기가 '저렴한 음식'으로 팔리는 현실이, 1인당 GDP나 경제성장률보다도 그 나라의 현실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필리핀의 한 섬에선 2차대전 당시 잔류 일본군이 먹었던 인육을 소환하고, 바로 옆에서 폭탄테러가 벌어지는 소말리아에선 감각을 잃게 해주는 환각성 풀잎을 씹고, 지독히 가난한 방글라데시에선 '부자들의 연회'에서 먹고 남은 음식찌꺼기를 모아 싼값에 사서 먹고,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피폭 피해를 당해 아무도 살지 않는 우크라이나 위험지대에선 '내일 또 함께 먹어줄거지?'라고 눈시울을 붉히는 할머니와 함께 빵을 먹습니다. 


<먹는 인간>의 취재 중 헨미 요가 방글라데시 다카 시장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사먹는 모습. 메멘토 제공.



 마지막 회차에서 그는 한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 세분과 함께합니다. 처음에 할머니들은 완고하게 일본인인 그를 거부하고 일본 대사관 앞에 가서 '죽겠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개인사를 털어놓기 시작하고 당시 조금씩 녹여 먹었던 설탕물, 끌려가며 먹은 오사카 야타이의 우동의 맛을 떠올리면서 할머니들은 점차 '피해자'를 넘어선 이름 석자 가진 사람으로서의 삶을 되찾습니다. 


"'나쁜 사람만 있었던 건 아냐. 나한테 비누나 망고, 설탕을 가져다준 병사가 있었어'...와이노는 '미쓰코'가 다른 병사와 있으면 묵묵히 계속 기다렸다가 결국 만나지 못하면 다음날에 와서 또 기다렸다. 가끔 '난 이제 곧 죽어'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와이노가 준 설탕을 따뜻한 물에 녹여 마셨다. 은은하게 퍼지던 단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따. 그것 말고도 그때의 맛으로 기억에 남은 것이 있나요? 끌려가던 중에 오사카의 포장마차에서 먹은 '우동'이라고 할머니가 답했다. '멸치 육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빨간 어묵이었는데, 정말 맛있었어' 귀국한 뒤에 그 맛을 내려고 만들어봤지만 아무리 해도 그 맛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할머니는 100만의 지옥같은 기억과 100만분의 1의 좋은 기억을 남김없이 식칼로 없애버리려고 했구나. '이제 그러지 마십시오' 내가 또 다시 부탁했다. 김 할머니는 '미쓰코'의 기억을 가진 채 하얗게 센 머리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헨미 요, <먹는 인간> 중


  그는 "국가(일본)를 대표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대신에 울면서 할머니들의 손을 붙잡고 말합니다. "죽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죽지 말아주세요" 그의 말이 '가해국가 국민'으로서 일견 무책임해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개인을 국가에 동치해온 역사 그 자체가 비극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에 철저히 국가에 매몰되어온 피해를 걷어내 거기서 개인을 찾아내고,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하는 작업을 계속해갑니다.   



■내가 그자리에 있었다면 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1★9★3★7이쿠미나>


 그로부터 20년쯤 후에 쓴 책  <1★9★3★7이쿠미나>는 <먹는 인간>으로 그를 처음 접한 이라면 약간 의아해질 수도 있습니다. <먹는 인간>이 피해에 집중했다면 <이쿠미나>는 난징대학살의 해인 1937년의, '가해국가인 일본'에 집중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손쉽게 '일본은 난징대학살의 가해국이다' '나는 일본인이다' '그러므로 반성한다'라는 논리에 따르진 않습니다. 가해국민의 하나인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이 과연 이쿠미나의 해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사람을 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 질문입니다. 


 그는 단순히 덤덤한 역사 서술로 글을 전개하지 않습니다. 서술은 극단적이고 감정적이고, 때로 목을 조르는듯 육박하는 묘사를 그대로 옮겨옵니다. 서경식 교수는 이 책의 후기에서 그의 서술을 '육박주의'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얕게 묻힌 몇천구의 시체 위를 걸어 갈 때의, 젖은 두꺼운 양탄자를 밟는 듯한 뜨뜻미지근하게 질퍽거리는 발바닥의 기억."
"적시積屍의 가장 앞쪽에 거의 알몸의 그것이 있었다. 그 시신은 몸통에는 거의 상처가 없고 팔다리도 온전했으며 어깨만이 고통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시신에는 머리가 없었다. 양 어깨 사이에 피투성이의 검은 받침대 같은 것이 붙어 있었을 뿐. 조각의 토르소를 나는 이제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홋타 요시에 <시간> 


 헨미 요는 자신 뿐 아니라 누구나 책을 펼친 사람을 기어코 1937년 난징에 서게 만듭니다. 숨이 막힐듯한  서술이 몰아쳐지는 가운데 한 챕터의 부제목은 심지어 '왜? 왜? 왜?'입니다. 대체 그 시기에 일본인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왜 사람을 죽였는가, 약탈했는가, 강간했는가. 그리고 그 순간에 난징에 총을 들고 서있었다면 당신은,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약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강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무참했던 세계대전 이후 20세기의 많은 학자들은 '비도덕적인 국가, 도덕적인 개인'을 얘기하면서 사람의 선한 본성을 부각합니다. 나치의 고문기술자들도 집에 가면 강아지를 사랑하고 가족을 아끼는 '선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죠.  


동경일일신문에 실린 '백인참수 초기록' 관련된 1937년 기사


실제로 <이쿠미나>에 따르면 1937년 일본 신문에 '백의의 천사' 헬렌켈러가 일본에 방문했다가 강연회 때 지갑을 도둑맞은 사건이 실렸습니다. 이에 전국방방곡곡에서 "일본인을 다 그렇게 취급하지 말아주세요"라며 헬렌켈러에게 보내는 돈과 장문의 편지가 답지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신문엔 중국에서 "포로 100명의 머리를 누가 빨리베는지 시합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자랑스러운 표정의 일본군인 두명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사람은 원래 모두 착하다. 그러므로 개인에겐 책임이 없다? 하지만 헨미 요는 프리모 레비의 언어를 빌어 그 지점에서 정확히 반대의 사실을 끌어냅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학살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에 수용소의 진실이 전혀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독일인들이 범한 가장 큰 집단적 죄이며, 히틀러의 공포가 야기한 비열함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예라고 확고하게 얘기할 수 있다....그 비열함이 없었다면 무서운 과오가 저질러지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날 유럽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 <익사한 자와 구제받은 자>


 <이쿠미나>를 덮고 나면, 결국 거대한 역사에서 사람의 피해와 책임을 지워버리는 것에서 비극이 시작된다는 <먹는 인간>에서의 교훈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책들을 덮으면서...'그렇다면 나는?'


 저는 최근에 넷플릭스에 런칭된 <폭군이 되는법How to Become a Tyrant> 다큐멘터리를 시청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도 저는 비슷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라면 히틀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히틀러는 당시 중하류층 독일인 노동자의 대변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인들9의 패배감을 자극하며 유태인을 곧 악덕 자본가로 등치시키며 서민들을 위해 유태인 자본가를 몰아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하류층의 상징인 코밑수염을 길러 민중과의 친밀성을 강조하였고, 폐허 가운데 밝은 미래를 약속했습니다. 모두가 진심으로 그의 등장을 환호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만약 외국인 노동자들을 몰아내고 '순수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시급을 3만원으로 올리겠다고 주장하면 과연 외면받을까요? 누군가가 만약 한국의 부유한 외국인 부동산 투자자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부동산을 몰수해 무주택 서민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하면 과연 외면받을까요? 만약 모든 물음에 자신있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다면, 히틀러와 그에 복종한 국민들을 단지 사후에 비난하는 것만으로 역사는 진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무겁고 거대한 널빤지같은 역사에서 개인을 꺼내는 일, 그것이 바로 비극을 반복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일 것입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및 글들을 추천합니다



헨미 요, 박성민 옮김,『먹는 인간』, 메멘토, 2017.

  ☞에디터의 한마디: 본문에서 소개한 책 중 한권입니다. <먹는 인간>은 각국의 상황을 '먹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접근하는만큼 생생한 르뽀 문학처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시점은 1994년으로, 냉전 시대의 분위기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헨미 요, 한승동 옮김,『1★9★3★7이쿠미나』, 서커스출판상회, 2020.

  ☞에디터의 한마디: 역시 본문에서 소개한 책입니다. 이 책의 분류는 장시長詩, 에세이, 연구서, 서평 그 사이 어디쯤일 듯합니다. <이쿠미나>는 난징대학살이라는 처참한 역사를 철저히 개인사적인 차원으로까지 파고듭니다.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와도 이어집니다. 


홋타 요시에, 박현덕 옮김, 『시간』, 글항아리, 2020.

  ☞에디터의 한마디: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가 중국의 지식인 '천잉디'의 시선으로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가 시험되는 사건'이라고 불리는 난징대학살을 바라본 장편 소설입니다. 철저히 개인의 눈으로 그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덤덤히, 무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 이소영 옮김,『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에디터의 한마디: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는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입니다. 이 책을 읽어내려가며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외친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헨미 요의 <먹는 인간> 국내 출간 당시 소설가와 요리사가 쓴 각각의 서평입니다. 같은 책에 대한 서평이면서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1. [북리뷰]살기 위해 먹이를 먹는 사람들

1. [파불루머 유재덕의 칼과 책] ‘먹이’가 아닌 ‘음식’으로 깨닫는 세상 이야기 ‘먹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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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레터의 1회로 예정되어있는 글이며, 레터서비스는 8월 첫째주 중 정식 런칭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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