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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Apr 15. 2019

#4, 이탈리아 여자와 세렝게티에서 보낸 하룻밤

"그 사람이 나가고, 그 집에 혼자 있을 수가 없었어. 엄마가 와서 같이 지내주고, 언니가 와서 같이 지내줬는데 다 떠나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이랑 같이 샀던 가구들이랑 나만 남았어. 그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은 괜찮았는데, 집에 있는 건 너무 괴롭더라. 그래서 떠났어."


세렝게티의 한 캠프 사이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이진 않지만 알 것도 같았다.


쾌활하고 많이 웃고, 말을 굉장히 빠르게 하는 이탈리아 여자, 크리스티나는 5개월째 케냐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한 단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숙식을 제공받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잠깐의 리프레시를 위해 이 여행을 선택했고, 나는 갑자기 직장을 잃어 이 여행을 선택했다.

여정에 제공되는 숙소는 2인이 공유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우리 둘은 그룹에서 기꺼이 싱글 차지를 내고 혼자 방을 쓰고 있었다.


제대로 된 천정과 침대와 따뜻한 욕실이 딸린 방에서 혼자 자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황량한 초원의 텐트에서 혼자 자는 것은 약간 다른 이야기였다.


일단, 텐트를 혼자 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가득 쌓인 텐트 뼈다귀 앞에서 크리스티나와 나는 하나의 텐트를 쉐어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낯선 이탈리아 여자와 세렝게티 초원에서의 하룻밤이 시작됐다.

어색해하면서 눈을 감을 필요도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완벽한 어둠 속에 누웠다.


까만 침묵을 깬 건 크리스티나였다.

"리, 나,, 생각해보니 가방 속에 크래커가 있어. 괜찮을까?"

웃음기 없이 정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저녁을 먹기 전,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도 가이드가 한참 동안이나 주의를 줬기 때문이다.

과자나 초콜릿, 바나나 등 과일을 포함해 달콤한 향기가 나는 음식을 가방 속에 넣어두지 말라고.

달콤한 향을 맡은 야생동물이 텐트로 들어오려고 한다고.

예전엔 코끼리가 텐트를 밟아 다친 사람들도 있었다는 얘기도 전했다.


크리스티나의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비스킷은 세 조각이었고, 나는 깔깔 웃었다.

그렇게 우리의 얘기가 시작됐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여자가 어둠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뭐가 있을까?

우리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크리스티나는 그 남자와 7년을 만났다고 했다.

7년의 연애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 사람과는 친구로 남았고, 어느 날 저녁엔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자리에 그 남자가 애인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괜찮은 척 잘 어울렸지만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7년의 시간은 공간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어 그 집엔 도저히 혼자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 언어로 대화해야 했기에 오히려 감정은 더 명료해졌다.

수식 없는 단어, 포장 없는 문장.

또,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서로가 완벽한 타인이 되기에 가능한 솔직함이기도 했다.


나는 속도 없이 아프리카까지 오게 한 슬픈 이별을 얘기하는 크리스티나에게 막 시작된 사랑의 설렘을 말했다.

정작 상대방에게는 전하지 않은 마음까지도.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세상모르고 단잠을 잤다.

일어나니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밖으로 나가니 텐트 뒤쪽으로 기린 여러 마리가 나무를 뜯어먹고 있었다.

먼저 일어나 기린을 보고 있던 크리스티나는 텐트 주변의 정체모를 발자국들을 가리켰다.

내 주먹만 한 발자국들이 텐트 주변을 따라 조르르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잔뜩 부은 얼굴로 기린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해가 없을 때 생긴 친밀함은 해가 뜨자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그날 밤의 씁쓸함과 체념과 슬픔과 달콤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크리스티나와 기린
코끼리들도 지나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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