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 덕후의 돌고래 타투
여행과 지름신은 짝궁이다. 갑자기 멀쩡하던 수영복도 촌스러워 보이고, 편하기 그지없는 운동화도 미심쩍다.이게 다 지름신의 수작이다. 이번 여행 전 내게 가장 오래 머물었던 지름신은 내게 '아이폰 방수케이스'를 들고 나타났다. "물 속에서 돌고래 찍고 싶지 않니?", "방수카메라 사는 것보다 방수케이스가 훨씬 저렴하단다." 아아, 달콤한 속삭임. 수많은 리뷰를 읽고 나는 가장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방수케이스를 주문했다. 가격은 8만원. 그만한 값어치가 분명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집 화장실에서 꽤 여러번 테스트를 감행했다. 물 속에서도 핸드폰 터치가 가능한 신박한 나의 방수케이스!
모든 것은 돌고래를 위한 준비였다. 잔지바르를 택한 것도 오로지 돌고래 때문이었다. 잔지바르에선 야생의 돌고래와 함께 수영할 수 있다고 했다. 매끈한 돌고래와 바닷속에 함께 수영할 수 있다니. 내겐 꿈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잔지바르에 도착한 나. 돌핀투어를 시작하기 전 방수카메라의 성능을 다시 한 번 테스트하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수차례 진행했지만 풀장에서 다시 한 번 해두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았다. 케이스를 끼우려고 꺼내보니, 이런, 카메라를 덮을 부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것이 아닌가! 내일 중요한 촬영을 앞두고 이러면 안되지! 힘찬 손길로 먼지를 쓱싹쓱싹 닦아냈다. 쓱싹..쓱싹....나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케이스.. 나의 거친 손길에 카메라 플래쉬 부분을 덮어야 할 얉은 막이 그만.. 찢어져버리고 말았다. 8만원이 눈 앞에서 사라졌다. 돌고래도 찍지 못하고 사라졌다. 눈 앞이 깜깜.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리셉션에서 투명스카치 테이프를 빌려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나름 치밀하게 빈 구멍을 휴지로 막고, 스카치테이프로 꽁꽁 막았다. 내 복구는 완벽했다. 완벽해야했다. 당장 시험을 해야했다.
기쁜 마음으로 리조트 밖 구경을 나갔고, 호기롭게 로컬 숍에서 원피스 한 벌을 구매했다. 얌전한 옷차림을 정중히 부탁하는 표지가 재미있어 한 장 찍어왔다.
돌아와서 사진을 확인하니 뭔가 이상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사진. 이때까지만 해도 '날이 더워서, 사진이 뿌옇게 나왔겠지'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뒤 방수케이스를 벗겨보고 깨달았다.
마침 찢어졌던 부분이 카메라 옆 플래쉬 부분이어서, 그 틈새를 비집고, 카메라가 물을 냠냠. 카메라가 머금고 있는 물방울이 꼭 내 눈물 같았다. 태양에 말리면 날아가지 않을까 싶어 꺼내놓자, 수증기가 잔뜩 껴 더 뿌옇게 변했다.
돌고래? 못 찍으면 까짓거 그리지 뭐!
그래서 그렸다. 팔뚝에. 조금 못생긴 돌고래를. 뿌연 나의 아이폰으로 사진을 남겼다. 헤나는 3주가 간다고 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3주 정도 뒤 모두 떨어져 나갔다. 깔끔하게 헤어졌으면 참 좋으련만, 까맣게 붙어있던 부분만 살이 타지 않아 하얗게 남았다. 어쩐지 까만 돌고래보다 더 튀는 하얀 문신 득템. 1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다.
어깨에 돌고래를 한 마리 올리고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돌고래는 비관과 부정의 아이콘인 내게 어딘가 남아있는 긍정을 찾아 즙을 꾸욱 짜냈다. 아이폰이야 한국가서 새로 사면 되지! 카메라도 있는데 뭐! 마침 아이폰 6s도 나왔겠다 잘됐네!
한 마리 돌고래와 산책을 나섰다. 포카리스웨트 맛이 날 것 같은 청량한 빛깔의 바닷물. 눈꽃빙수처럼 사르르 녹을 것 같은 고운 모래. 정말 오랜만에 보는 깨끗한 하늘. 어느하나 빠지지 않고 완벽하게 좋았다.
유독 잔지바르의 태양은 크게 느껴졌다. 100원 사이즈 태양을 보다 500원 사이즈 태양을 만난 느낌. 커다란 크기만큼 해넘이도 무척 인상깊었다. 잔지바르에 있을 땐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가 넘어가는 장면을 봤다. 수영장에 앉아서, 테라스에 서서, 해변가에 앉아서. 바다가 태양을 머금은만큼 금빛으로 넘실거리는 모습은 평생 봐도 질리지 않겠다 싶었다.
어느새 물먹은 아이폰 생각은 싸그리 잊었다. 내일은 돌고래랑 수영하러 가는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