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4050의 아픈 기억
적막이 흐르는 교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자리에 앉아 있는데 선생님이 시험지 한 뭉치를 들고 들어와 교탁에 놓는다. 앞사람부터 차례로 시험지가 전달된다. 내 손에 시험지가 쥐어지자마자 온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흐른다. ‘오늘 시험 본다고 했던가.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어떡하지.’ 시험지에 쓰인 글씨는 공중으로 둥둥 떠올라 멀리 날아가 버리고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뭐야? 나 학교 졸업했는데. 애가 셋이나 있는 아줌마인데 지금 왜 고등학교 교실에 있는 거야? 이거 꿈이구나.’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꿈에서 깬다.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혼날까봐 벌벌 떨고 있는 꿈은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아니 아줌마가 되어서도 한동안 지속 되었다. 몸이 피곤한 날은 어김없이 악몽처럼 꾸던 꿈이었다. 최근에는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아마 이젠 너무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보다.
나의 학창 시절은 긴장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일주일에 두어 번 등교 시간에 교문 앞에 한 줄로 서서 두발 검사와 가방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남녀공학이었던 우리 학교는 담배를 피우거나 사복을 싸가지고 놀러다니는 불량 학생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자주 소지품 검사를 했다. ‘방구’라는 별명의 학생 주임 선생님은 안경 너머로 치켜뜬 날카로운 눈매로 학생들을 위아래로 훑으며 복장과 두발 상태를 점검했고 가끔은 입을 벌려 보라며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나마 인간적이라고 믿었던 담임 선생님도 여학생들의 가방을 수시로 검사하셨다. 열세 살짜리 어린애였지만 그때의 그 수치심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여학생들에게는 덜 했지만 남학생들이 두들겨 맞는 모습은 다반사였던 것 같다.
여고에 들어가면 이런 일들이 덜할까 싶었으나 순진한 착각이라는 걸 곧 깨닫게 되었다. 언덕배기에 무허가 건축물로 지은 건물이라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우리 학교는 언감생심 운동장을 만들 생각은 못하고 체육 시간마다 언덕 꼭대기에 있던 같은 재단의 여상고 운동장을 빌려 써야 했다.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새고 낡아빠진 책걸상에 앉아 있었던 것은 추억으로 퉁칠 수도 있겠으나 비인간적인 교육의 행태에는 치가 떨렸다. 재단의 부정적인 소문들을 지우기 위해 명문고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던 학교는 그야말로 아이들을 쥐 잡듯이 잡았다. 고2 때까지는 그나마 약간의 낭만이라도 있었다.
고3이 되자마자 매일 7시까지 등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토요일을 빼고는 매일 밤 12시까지 학교에 있어야 했다. 선생님들은 자랑하듯이 “너희들 별명이 뭔 줄 아냐? 때순이! 때 벗길 시간도 없이 공부만 한다고 때순이래.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우리 학교 애들이 공부를 잘하는 거지. 옆에 있는 남고들은 너희들 뒤꽁무니도 못 쫓아 올 거야.” 그걸 자랑이라고 하고 앉았나. 하루가 멀다 하고 갖은 명목으로 시험을 봐야했고 점수가 나쁘면 매 맞고 벌 받는 일은 일상이었다. 사립 학교라 젊은 선생님들이 많아 활기차고 좋긴 했으나 아이들을 닦달하는 데도 체력이 넘치셨으니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나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빨리 수능보고 졸업해서 이 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졸업하면 여기 근처도 안 올 거야라는 다짐은 현재까지 착실히 잘 지키고 있다. 나는 정말 고등학교 동네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내 머릿속에서 지우고자 애를 썼다.
대학에 들어와서야 내 오랜 복통은 사라졌고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신입생 시절은 적응하기가 꽤나 힘들었다. 무엇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 채 선생님들의 강요에 복종하며 살았던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자유가 오히려 불안했고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갈팡질팡 했었다. 문제집이 책의 전부였던 나에게 각종 양서들로 가득찬 도서관은 낯설었고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망설이다 돌아오기 일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힘든 생활 중에도 짬짬이 즐거움을 찾거나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를 억압하는 그 세상이 너무 무섭고 싫어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의 학교는 예전의 학교와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여전히 그 트라우마는 씻어지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규칙과 질서를 잘 지키며 평범하게 살았던 나와 같은 아이들에게도 억압과 강요는 큰 상처로 남는다. 교육을 꼭 이렇게밖에 할 수 없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나를 따라 다녔기 때문에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냈는지도 모른다. 학교가 무서운 곳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교문 밖까지 울려퍼지는 곳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