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선언 / EMERGENCY DECLARATION> (2022) 리뷰
※영화 <비상선언>의 내용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내게 비상선언은 봐야 할 이유만 있었지 안 볼 이유가 전혀 없는 작품이었다. (大)중동고등학교 동문으로써 내가 존경하는 선배님이시자, 정말 좋아하는 배우인 이병헌 배우와 함께 송강호, 전도연, 김남길, 박해준, 김소진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다니, 이거 안 보고는 못 배긴다. 한재림 감독의 네임드 밸류 또한 기대 포인트 중 하나였다. 그의 전작 '관상'과 '더킹'을 매우 재밌게 감상했기에, 이번 '비상선언'에서 또한 그의 감각과 스타일이 살아있는 연출을 기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고편이 기깔나게 뽑혔다. 2분이 안 되는 짧은 영상만으로도 긴장감이 몰아쳤고, 제대로 된 항공테러 재난 액션 장르물이 탄생하겠구나 싶었다. 단언컨대 '비상선언'은 올해 한국 여름철 텐트폴 영화 중에서 제일 기대를 많이 했던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정말 '애매하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장점과 단점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었기에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작품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와이에서 인천으로 다시 회항하는 순간부터일까. 테러범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시점부터였을까. 일단 가장 큰 문제는 현실성이 결여된 각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반부까지는 안정감 있게 긴장감을 유지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이 부실한 각본으로 인해 영화의 전체적인 질이 곤두박질친다. 아무리 분열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몇 백의 목숨이 공중에 떠다니는 상황에서 정말 그들을 받아줄 국가가 한 곳도 없을까? 정말 그렇다면, 인류의 종말은 그리 머지않아 보인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종종 등장인물들 상황에 나 자신을 대입해보는 편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착륙 포기를 선언한다? 내가 만약 그 상황 속 승객이었다면, 아무리 받아주는 데가 없고 모국마저도 국민들의 목숨을 버린 상황일지라도, 착륙하지 말자고 여론이 형성되는 순간 비행기 봉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나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다.
또한, 한재림 감독은 배우 활용에 있어 실패한다. 전도연 배우가 맡은 국토부 장관 캐릭터는 굳이 왜 있어야 했나 가 의문이다. 국토부 장관, 박해준 배우가 맡은 청와대 안보 실장 중 한 명이 없었어도 크게 문제 될 것 같지 않다는 게 개인적 의견. 이병헌 배우가 맡은 '재혁'이라는 캐릭터는 후반부에 가서 트라우마를 극복한다는 성장담이 있어 취지는 좋다고 느껴지지만, 왜 굳이 이병헌, 전도연 배우여야만 했을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 외에도, 일본 자위대 전투기가 시민 몇 백이 타고 있는 비행기로 돌진을 한다던가, 어엉? 하게 되는 요소들은 거의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단점이 명백하지만, 장점 또한 명확하다. 극의 초반부부터 인호와 비행기 상황을 교차시켜 보여줌으로써 극이 스피디하게 진행되고, 중반부까지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다. 그리고 한재림 감독의 특기 중 하나가 조명 활용인데, 이미 전작 더킹에서 수려한 조명 활용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번 비상선언 역시 그의 조명 활용 능력이 빛을 발한다. 더킹에서의 화려함은 약간 덜고 절제하였으며, 명과 암의 대비를 철저히 활용하여 인간이 느끼는 공포감을 표현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그의 특기로 후반부까지 깔끔하게 연출했다면 훨씬 나은 작품이 됐을 거라고 감히 선언한다. 그의 스타일은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든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재난물에 있어서 신파는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 신파 요소를 작품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여내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신파 요소라고 해서 무조건 거르고 배제해야 할 요소가 아니라는 거다. 많은 분들이 비상선언의 신파 요소를 지적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비상선언의 신파 요소가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갑자기 모두 착륙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제외다. 각본 자체에 현실성이 결여되어 그 이외의 것들도 더욱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극의 흐름만을 따졌을 땐 억지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크게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영상 통화를 하는 장면은 '흐름상' 굉장히 자연스러웠고 슬펐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이 악물고 노력했는데, 내 양 옆의 두 분은 코까지 훌쩍이면서 우셨다. 나도 맘 편하게 꺼이꺼이 울걸 그랬나 보다. 아무튼, 이번 작품에서 한재림 감독의 신파 연출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그의 다음 작품은 부디 각본에 조금 힘을 더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상선언 속 의사 캐릭터가 기억에 남는다. 그 의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표류하는 비행기 속에서 표정 변화 없이 아픈 환자들을 돌보며 사명을 다할 뿐이다. 강인한 모습만 보여주던 의사는, 마지막에 비행기가 추락할 위기에 처하자 그때서야 무서움에 떨며 눈물을 쏟는다. 결국 우리 모두 그저 살고 싶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 분열의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타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감하는 자세이루것이다. 그것이 한낱 나약한 존재들끼리 살아가는 방식이자, 길이다.
비상선언을 나 포함 지인 2명과 함께 봤는데,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할인을 아무것도 받지 않았을 때의 가격이 45000원이었다. 불과 4, 5년 전만 해도 인당 티켓 값이 9000원에서 1만 원 사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코로나 손실 만회라는 이유로 극장이 티켓 값을 마구 올려버린 이후로, 관객들의 입맛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영화 관람은 이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 한 영화가 살아남으려면 15000원 이상의 티켓 값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 입소문도 잘 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익 분기점은커녕 관객들의 냉소만 돌아올 뿐이다. 문제는, 티켓 값을 제대로 해내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 한국에 몇이나 되냐는 것이다. 티켓 값을 다시 인하하지 않는 이상 화려한 캐스팅과 가벼운 눈요기 거리로 흥행하는 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티켓 값이 1만 원만 했어도 비상선언의 평가가 이렇게 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본다. 극장들의 횡포가 한국 영화의 질을 극한으로 끌어올릴지, 영화 산업 자체를 암흑기로 돌려놓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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