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타임 / Full Time> (2022) 리뷰
※영화 <풀타임>의 내용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운이 좋아 에리크 그라벨 감독의 영화 <풀타임>의 시사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겨 다녀왔다. 티켓 배부처에 가서 이름을 말하고 티켓을 수령하여 가려고 하는데, 티켓을 배부하는 직원분이 '선물 가져가세요'라며 부채와 초코파이, 그리고 엄마손 파이를 1개씩 주셨다. 그리고는 '엄마손 파이 드시면서 어머니 생각 많이 하세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의아했다. 시사회를 많이 가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간식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갑자기 엄마 얘기라니. 처음엔 그분이 그냥 부장님 개그를 치신 줄 알았다. 그래서 하하 웃어드리고 상영관에 들어와 영화가 시작하길 기다리는데, 아까 그분이 들어오셨고 자기소개를 하셨다. 그분은 영화 <풀타임>의 배급사 '슈아픽쳐스'의 대표님이셨다. 그분은 영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신 뒤, '어머니들은 여러분들을 정말 힘겹게 키우셨고, 위대하시다'라고 말하시며 퇴장하셨다. 그때서야 눈치챘다. 이 영화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주인공 쥘리는 파리 교외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워킹맘이다. 그녀의 하루는 꼭두새벽에 눈을 떠 아이들을 씻기고 이웃집에 맡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직장인 파리의 5성급 호텔로 가기 위해 매일 열차를 탄다. 일을 마친 그녀는 다시 열차를 타고 동네로 돌아와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매일 규칙적인 루틴으로 생활하며 직장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자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조금 바쁘긴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일 뿐이다. 문제는 대대적인 교통 파업으로부터 시작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아이들을 맡기고, 열차를 타고 출근했던 그녀지만, 파업으로 인해 열차가 연착되고 심지어 나중엔 탈 수 있는 열차도 없게 되자 이에 대한 결과는 고스란히 그녀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 열차를 타지 못하게 된 그녀는 착한 프랑스 시민들의 차를 얻어 타는 건 기본이고, 직접 발로 뛰기까지 한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직을 위해 면접을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풀타임>을 검색해보면 장르가 드라마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 이 영화의 장르는 '스릴러'에 가깝다. 이 점이 꽤나 흥미롭다. 포스터로 보나, 스틸샷들로 보나 스릴러라고 느껴질 만한 구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풀타임>은 피 한 방울 보여주지 않고도 일상이 얼마나 섬뜩하게 변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웰메이드 스릴러다.
<풀타임>이 내게 섬뜩함을 안겨준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파업으로 인해 그녀의 모든 계획과 루틴이 멈출 새 없이 무너져 간다는 것이다.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MBTI J성향이 강한 이들은 이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잘 알 것이다. 나 또한 J 성향이 의외로 강하기에 쥘리의 시간 계획이 처참히 망가져 갈 때마다 그녀처럼 한 숨이 저절로 팍팍 나왔다. 계획적인 루틴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상의 무너짐'보다 더한 섬뜩함은 없다. 두 번째, 쥘리의 뻔뻔함이다. 자신의 일상이 꼬이기 시작함과 동시의 그녀의 민폐도 시작된다. 쥘리는 자신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점점 무리한 부탁을 하게 되고, 피해를 끼친다. 내가 정말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무리한 부탁임을 인지하고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결국 그 부탁을 들어준 호텔 신입 직원 라디아가 잘렸을 때, 쥘리가 내뱉은 '어차피 잘렸을 애예요'라는 대사였다. 쥘리와 라디아 모두 애 2명을 키우는 워킹맘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에게 무리한 부탁만 했고, 그 다른 이는 계속 선의를 베풀다 직장에서 잘렸다. 영화 속에서 쥘리는 남들에게 호의를 받기만 했지, 반대로 호의를 제공한 적은 없다.
쥘리는 두 아이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구는 직장에서 잘렸고, 어떤 이는 직장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했고 또 다른 이는 밤마다 애들 때문에 시달리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녀를 비난할 마음은 없다. 그녀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먹여 살려야 할 두 아이가 있었고, 그들과 자신을 위한 더 나은 내일을 원했다. '내가 만약 쥘리였으면 안 그랬을 자신이 있나'라는 질문에 쉽게 답을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나를 위해 쥘리와 같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우리 엄마 생각에 그녀를 함부로 비난할 수가 없다. 앞서 그녀가 아무에게도 호의를 베푼 적이 없다고 작성했지만, 사실 있다. 그녀의 삶의 원동력인 아이들이다. 쥘리는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영화는 새 직장에서 면접 합격 통보 전화를 받고 기뻐하는 쥘리의 모습을 비추며 끝이 난다.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과 반대로, 나는 이것이 절대 해피엔딩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엔 다시 쳇바퀴 같은 삶이 다시 반복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쥘리의 삶이 가끔은 나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대다수 현대인들의 삶의 표상일지도 모르겠다. 시사회를 본 날 서울에 비가 너무 많이 와 집으로 오는데 4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동안 차에서 영화를 곱씹으며 먹은 '엄마손 파이'는 어느 때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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