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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혜 Starlet Sep 06. 2023

통역사의 영어 한 조각 2

즐겁게, 적셔!

저렴한 와인 애호가인 동창 하나가 우리 동창 모임 카카오 단톡을 와인으로 적셔 놓았다.


진즉부터 우리 단톡에는 이상하리만큼 술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느 땐가 이 녀석이 이 단톡에 입장한 뒤로 주종이 와인으로 바뀌었다.


간단하게 이 친구를 소개하자면, ‘페브리즈로 패버리자’ 따위의 시덥잖고 원성 받는 농담을 즐기는 아재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친구가 7인의 입맛을 바꿔놓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쓰잘데기 없지만, 이 현상이 기이해서 한 번 분석해 보기로 한다.


친구가 여러 명이라 헷갈릴까 봐 이름을 정해야겠다. 와인 글 쓰는 친구이니까 “Y”?.


Y가 저렴한 와인을 다품종으로 먹어본 경험에서 우러나온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 그것도 Y의 와인 취향이 친구들에게 잘 전파되는 이유 중의 하나 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친구들이 집중하는 포인트를 가만히 살펴보니, 그들은 Y가 와인에 대해 하는 설명보다는, 와인보다 더 맛깔나게 풀어내는 그의 일상의 이야기에 매료된 듯 하다.


오늘도 또 “얘들아“ 하면서 카톡에서 풀어낸 와인 이야기에 각각의 자리에서 실제로 추천 와인을 꺼내드는 나머지 친구들.


이제는 “얘들아” 이 말이 건배사로 들린다.


문자로만 이루어진 이 카톡방에서 와글와글 거리는 소리가 난다. 째쟁 잔 부딪히는 소리도 울린다.


건배사에 따라 하나같이 올린 술잔이 마음에 들었는지 와인 글 쓰는 친구, 다시 말해 Y가 목청을 드높인다. “즐겁게, 적셔!”


응? 이 문장 뭔가 어색한 것이 번역 문체 같기도 시적 표현 같기도 한데.  


언어를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라 이상한 기시감이 드는 이 표현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분명 영어로도 이런 표현이 있는 것만 같아 얼른 용량 얼마 되지도 않는 나의 뇌 한구석을 열심히 뒤져 본다. 튀어나올듯 말듯 혀끝에만 말이 맴돌아 결국 검색엔진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그런데 ‘적시다, 젖다’ 이런 의미의 영단어로 검색되어 나온 문장들은 온통 좀 야릇하고 요상하다. 그렇다고 괜시리 얼굴 발개져서 후방 살피며 기대하진 마시길. 말은 필터없이 내뱉아도, 글은 평생 남는거라 안타깝게도 검열과정을 거치니까.


“와인으로 적시다“라.. ”wet yourself in wine” 하면 말이 될 법 한데, 실제로는 이렇게 쓰이지는 않는다. wet yourself 와 wine으로 같이 검색하면, ‘술 먹고 왜 자꾸 침대에 실례를 하나요’ 라는 고민이 쫘악 나온다. wet 이란 말자체가 소변실수 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



술 때문에 침대를 소변으로 적시는 행위( 으웩. 이렇게 표현하니 비위 상한다..), 혹은 소변 실수(bedwetting)는 몸이 알코올을 더이상 통제하지 못하는 신호다. 우리 거기까지 가진 말자 친구들아. bedwetting 했다 들키면 평생 놀림 받을거야.


적시다라는 또 다른  영어 단어로는 soak이 있는데 soak yourself in wine했더니 와인으로 하는 목욕 wine bath 가 등장한다. 오 흥미롭다. 와인 한병 따가지고 한두잔 밖에 못마시는 나에게는 오래된 남는 와인을 활용할수 있는 좋은 방법이겠다.


와인에 관해 글쓰는 친구 Y에게 wine bath를 직접 경험해 보고, 연구해서 글 써달라고 졸라봐야지. 혹시나 사진은 부담되니 거부한다고 미리 못박아두자. 욕실을 가득 채운 와인향에 취해서 와인배쓰 브이로그라도 하겠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우리들의 눈은 소중하니까.

 

적시다 라는 단어가 딱 맞지 않는다면, 그러면 젖을 정도가 되려면 들이부어야 되니까 들이붓다 퍼붓다라는 “pour”는 어떨까? pour wine into your mouth라고 검색창에 입력한다.


진짜로 목에 병째로 들이부어먹는 다소 대담한 와인 먹는 방식이 나온다. Porron이라는 와인병을 사용한단다. 어머나 식도 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문득, 고등학교 수학여행때, 목구멍으로 쏟아 부었던 나의 생애 첫 보드카와 식도의 작열감이 생각난다.



잡다한 생각을 접고 다시 집중해보자. 분명 와인으로 적시다라는 말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였을까.


열심히 고민하다 머리가 아파와서 머리 빠질까 봐 포기하려 할 때쯤, 마음 속 저 멀리서 감미로운 재즈풍의 선율이 나즈막히 들려온다.


I waited til I saw the Sun..

아침해를 볼 때까지 그저 기다렸어요.

I don’t konw why I didn’t come.

왜 나는 당신에게 가지 않았을까요.

 left you by the house of fun

즐거운 추억이 있던 집에 당신을 남겨두고 난 떠났어요.

Don't know why I didn't come

왜 나는 당신에게 가지 않았을까요

Don't know why I didn't come

왜 난 당신에게 가지 않은걸까요..

When I saw the break of day

동이 트는 장면을 보며,

I wished that I could fly away

내가 날아가 버릴 수 있기를 소망했어요.

Instead of kneeling in the sand

모래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Catching tear-drops in my hand

내 손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My heart is drenched in wine

내 마음은 와인에 젖어있어요. (내 마음은 완전히 취해버렸어요)

But you'll be on my mind forever

그래도 당신은 영원히 내 마음 속에 머물겠죠.


https://youtu.be/1LH4vnrM-Vs?si=sxHVm_U-4E2vdnlv


노라존스의 don’t know why 라는 곡. 나른하면서도 약간의 슬픔이 어린 선율의 후렴구에서 몽롱한 목소리로 반복하던 문장이 바로 이 ”와인으로 내 마음이 젖어 있다 “ 는 내용이다.


“My heart is drenched in wine.”


기쁨에 무릎을 탁 치며 뿌듯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이 문장을 알려줬다.


Y의 반응은 시덥잖다.


“적셔 라는 말, 술잘먹는 사람끼리는 잘쓰는 저렴한 말인데?”


“(마음이 아니라)  ‘간’ 을 술에 적시라는 말인데?“


약간 김 빠지고 어이없어 웃음이 나지만, 그래도 오늘 이렇게 시적인 영어 표현 한 조각과 술쟁이들의 은어를 하나 배워가니 이 또한 좋다.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나는 술이 몸에 잘 안 받아서 간을 와인에 폭 담글 정도로는 못마시지만, 친구들이 와인을 안주삼아 떠들어대는 수다는 마음에 잘 받는다. 즐겁게 푹 빠져들어도 세상 멀쩡하다.


고로, 술 잘 못하는 초보 와린이(와인+어린이)도 건배사에 함께 당당하게 잔을 든다.


“즐겁게, 적셔!”


<참고> 적시다와 가까운 다양한 단어들

- wet: 날씨가 비가 오는 상태, 사람이나 물건이 젖은 상태.  

-soak: 빵을 우유에 푹 담근다거나, 비로 인해 카펫이 물에 흠뻑 젖었다던가 할 때. 젖게 하다 라는 뜻

-drench: soak과 비슷한 의미인데 그보다 더 심함.

- pour:물을 붓다. 혹은 비가 쏟아진다라는 뜻.


아래는 해당 단어들과 함께 잘 쓰이는 표현 몇 개.


I‘m soaking wet! 비땜에 흠뻑 젖었어!

I hope the rain will drench the dry land. 비로 가뭄이 좀 해소되었으면 좋겠어.

Let me pour you a drink. 술 한 잔 따라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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