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포켓걸이 등장했었다. 가녀린 체구에 귀여운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티비에 나왔었고 그녀는 각종 프로그램의 MC와 패널을 맡으며 활약했다. 앨범도 내고 가수로도 활동했었던걸로 기억한다. 다재다능한 여인이었다. 그밖에도 TTL소녀도 있었고, 이의정이나 장나라도 요정느낌으로 사랑받는 여자연예인들이었다. 티비에 그녀들이 등장해 인기를 얻는다는 건, 현실에서도 많은 포켓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붙이긴 무례한 표현인 건 안다만, 연예인이란 외모적으로 일반인들의 상위호환 버전일 것인 바, 수요가 많고 시쳇말로 현실에서 먹어주는 스타일을 트렌디하게 반영해 흥행하고 인기를 얻는 연예인도 결정되는 것일테다.
그 땐 그랬었다.
'큰 것 보단 작은 게 낫지.' 무슨 물건, 음식도 아니건만 여자들을 바라보는 그 때의 시선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때엔 나도 범이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기 때문에 세상무서운줄 모르는 안하무인 격의 쬐그만한 여자애였고 그래서 세상이 나에게는 여러모로 퍽 호락호락했다(고 느꼈다). 여자는 큰 것 보다는 작은 게 낫다는, 그리고 귀여워야 제맛이라는 이분법이 세상을 지배했다. 아니, 중간일 수도 있는건데 왜 큰 것과 작은 것만을 비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보고 주변인들은 큰 것보다는 내가 낫다고 했다.
156cm에 47kg 몸무게. 수치를 보면 알겠지만 자랑이 아니고 오히려 숨기고 싶은 쪽에 가깝지만 이 글을 진행시키려면 반드시 밝혀야 할 내 신체 스펙이다(그마저도 44세 건강검진에서는 155cm에 48kg으로 변경되었다). 나를 이렇게 낳아준 엄마에게 왜 나를 이렇게 콩만하게 낳았냐는 컴플레인을 셀 수 없이 했지만, 엄마에게 돌아오는 대답도 당시의 시대상에 맞게 매번 같았다. 여자가 껑충하게 크면 뭐하냐, 아담하고 소담스러운게 낫다는 거였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 본인은 166cm에 49kg 라는 놀라운 몸의 소유자였다. 아닌게 아니라 엄마는 자라는 시절 내내 150cm 후반대의 친구들을 내려다 보는 일에 익숙했고 눈높이가 비슷해보이는 남자들로부터 수도 없이 너무 크다, 여자다운 맛이 없다, 서양년이냐, 저렇게 커서 누가 데려가냐 라는 비극적인 평가를 들어왔다. 지금으로서는 니가 작은거다, 여자다운 게 대체 뭐냐, 동양년이다, 누가 날 데려가길 기다리지 말고 내가 데리고 오면 된다, 고 맞받아칠 수 있지만 엄마는 칠순이 넘으신 연세다. 그땐 그렇게 여자가 당차게 받아칠 만한 환경이 아녔다. 오래도록 그런 평가와 함께 지낸 엄마는 작은 남자와 결혼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았고, 그 남자와 똑 닮은 딸이 작게 태어나 꾸준히 작았고, 결과적으로 작은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가 아니라 오히려 안도했다고 한다.
보통 어른들은 오랜만에 성장기의 아이를 보면 "많이 컸네" 라는 말로 아이들의 망설임없는 성장에 놀라움을 표현하는데 우리 외할머니는 방학때 나를 볼 적마다 "뽀독뽀독/ 돌크듯이/ 크는갑다" 라고 하셨다. 그 사투리의 박자와 억양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엄마는 그 얘기가 시조같이 리드미컬한 발음이 나는 게 좋았고, 정말 할머니가 정확하게 내 키를 측정하는 눈대중을 지닌 것으로 할머니의 총기를 확인하며 안심했다고 한다. 입에 붙은 뻔한 노인네들의 말보다 진정 손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시다고 여겼다나.
엄마의 안도감처럼 나는 아픈 데 없이 컸고(키가 아니라 마음이 컸다), 그 키를 가지고도 대체로 반에서 가장 달리기가 빠른 소녀, 제자리 멀리뛰기에서 가장 멀리 뛰는 소녀였으며, 목소리도 컸고 자기 주장도 강했다. 아마도 하체가 튼튼한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어디에서도 밀리지 않고 두 다리를 적절히 벌리고 서서 낮은 무게중심을 팽팽하게 유지할 수 있어서였겠지만, 그렇게 다리를 벌리고 무게중심을 아래로 향하게 하려할수록 키는 남들보다 더 작아졌다.
친구들이나 또래들이 나보다 윗공기를 쐰다는 그런 알량한 자존심이나 열등감같은 것이 아니라, 나는 실생활 속에서 포켓걸의 비애를 한껏 느꼈는데 그건 바로 내가 옷을 너무 좋아하는 옷순이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늘 나와 아빠의 바지를 사면서 '오늘 날씨가 맑네' 라는 얘기를 하듯 '우리집에는 10만원짜리 바지를 사면 5만원어치를 잘라내야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네' 라며 나와 아빠의 의도없이 비효율적인 소비를 짚었다. 그렇지만 진짜로 5만원어치까지는 아니더라도 2만원어치 정도는 잘라내야 하는 게 사실이었고, 밑단 마무리라는 공정이 필요하기때문에 그건 수선 집에 맡겨서 처리해야 했으므로 같은 가격을 주고 샀어도 2만 5천원 정도 남들보다 비싼 바지를 입는 셈이었다. 그러나 내 문제는 그런 몇 푼에 불과한 돈 문제가 아니었다. 옷을 아무리 비싸거나 고급스러운 걸 입어도, 멋있거나 포스있는 걸 입어도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느낌이 났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태가 안났다. 뭘 입어도 아이가 어른옷을 입은 느낌이 났고, 아가씨 시절에는 42kg 언저리로 빼싹 곯은 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극대화되었었더랬다. '그놈의' 평균에 맞춰 나오는 여러 기성복들은 나에게 평균에 한참을 못미치는 몸에 대해 매번 자각시켰고, 그건 나에게 맞는 옷을 찾기 위한 시간과 노력을 더 들여야 하는 일이라 나는 항상 고달펐다. 55사이즈, 그 55의 기원이 무엇인지 의견은 분분하지만 나한테 안맞는다는 건 확실했다.
또 나의 슬픔은 내가 전혀 귀엽고 싶은 마음이 없고 실제로 귀엽지도 않다는 데에도 있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친구들을 보면 부러워하던 나에게 그녀들은 자신들은 귀여운 사람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면서 그녀들만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요즘 나오는 이영지라고 키가 176cm인 여가수가 올해 'small girl' 이라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담은 곡을 발표했는데 아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작고 귀여운 걸이고 싶었지만 176cm의 키로는 귀여울 수 없었을 것이니까. 나의 슬픔은 정확히 그 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나는 전혀 귀엽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공감해주기 위해 많은 키큰 친구들이 '나는 귀엽지 않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녀들에 못지않게 '나도 귀엽지 않았다'. 나는 단 한번도 귀엽고싶지 않았고 실제로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작다는 건 귀여움 면에서는 월등히 유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원치않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워낙 내 체구와는 관계없는 성격을 가진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답게 위아래로 트레이닝복을 한껏 갖춰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묶고 헌팅캡을 쓰고 학교에 갔던 어느 날, 동기 남자아이로부터
"주니어 국가대표선수같다!" 는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하, 나는 그랬던 거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예전과는 분위기가 바뀌어서인지 세상이 나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걸 드디어 자의반 타의반 알게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크고, 크고 멋진 여성들이 티비에 차고 넘친다. 남편은 사춘기 시절 부모님과 부딪혔던 순간을 덩치 내지는 키로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최초로 부모님에게 덤벼봐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가 어머님의 키를 넘어서며 어머님의 눈을 내려다보게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자신이 어머님을 이길 수 있을것 같다고 본능적으로 느낀 그 때, 그때 반항심이 시작되었다고. 어쩐지, 나는 크는 내내 엄마의 그늘에서 엄마를 무서워하며 지냈는데 그게 키때문이었구나, 를 알게 되었다. 내 키는 한 번도 엄마를 앞지른 적이 없었다. 우리엄마는 이제 할머니가 되어가시며 키가 많이 줄었다. 166에서 언젠가 164가 되더니 요즘은 건강검진에서 163까지도 나온다고 하신다. 그래봤자 나보다 8cm가 크다. 우리엄마가 더 꼬부랑 할머니가 되고 그에 맞춰 내가 중년의 여인이 되어 엄마를 부축해줘야 할 때, 호호할머니보다 키가 얼추 10cm나 작은 보호자란, 얼마나 볼품이 없으며 든든한 느낌이 안날까. 정말 별로인 그림이다.
맞다. 나는 권위없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딸아이가 내 키를 넘어선 것은 한참 되었고, 길을 가도 크고 늘씬한 아이들이 나를 '내려다' 보면서 존댓말을 하고 쉽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백화점을 가도, 문화센터를 가도, 사람들은 나를 무람없이 대한다. 남편은 그게 내 매력이라고 하고 나도 굳이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렇지만 그 쉬운 마음이 왜소하고 작은 덩치에 한몫 단단히 기대고 있는거라면 사양하고 싶다. 나도 집에서도 밖에서도 위엄있고, 아우라있고, 내 한마디로도 공기가 바뀌는 어른이고 싶다. 풍채좋고 압도적인 할머니이고 싶다.
요즘은 2000년대 초에 횡행하단 세태가 완전히 뒤집혔다. 그건 작은 것보다 큰 게 낫다는 식의 이분법이나 그 둘의 비교치로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은 작은대로 큰 사람은 큰대로 인정받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박나래도 멋지고 김연경도 멋지다. 둘 다 멋지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나도 예전부터 그러했듯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 한켠에서는 박나래를 응원하지만, 대부분의 내 마음속에 들어찬 건 김연경이나 장은실, 방신실 선수들처럼 멋있는 피지컬로 활약하는 운동선수들이다. 그녀들은 나의 카타르시스다. 몸에도 유행이 있는건지, 한때는 포켓걸이 지금은 슈퍼걸이 티비에서 '먹어주는' 것 같지먼 나의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156cm에 47kg. 이 몸에 갇혀 평생을 지내야 하는 나는 다시 태어나면 175cm에 70kg쯤은 되는 운동 선수로 태어나고 싶다. 절대로 이 풍진 세상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귀여움과는 엮이고 싶지 않다. 어떤 소품샵에서는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 고도 하더라만, 나는 원치않는 귀여움은 극구 사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