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최근 지인의 아이가 준비하는 대입 논술전형을 잠깐 봐준 일이 있다. 오래 전의 일이긴 했지만 결혼 전, 대입 논술을 지도해 본 경험이 있었다.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그 아이는 원체 똑똑한 아이여서 대강 얼개만 짚어줘도 잘 해낼 거란 마음에서 흔쾌해 그러겠다고 했다. 아이가 들고 온 지난 기출 문제를 분석하다가 익숙한 지문을 보게 되었는데 김애란 작가의 소설 <입동> 이었다. 영우라는 아이를 잃은 후 부모의 일상을 그린 단편 소설이다. 그 소설이 지문으로 실린 문제의 요지는 그거였다. 영우의 엄마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천 명의 기립 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마냥 울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마냥 내가 붙들고 선 벽지 아래서 흐느꼈다."
그 아이는 이 부분을 '극도의 슬픔' 이라고 표현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식의 죽음을 목도하며 꺼억 꺼억 우는 부모가 있다면 그이의 눈물은 슬픔의 깊이를 채 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을 품은 눈물일 것이다. 그러나 책 안에서 그 눈물의 역할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그리고 그게 고3 아이와 40대 중년인 나 사이의 차이점일 것이다.
살아봐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언젠가 나와 남편은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나 각종 매체의 발달로 쓸데없는 지식과 상식이 많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는 모르던 많은 것들을 실제로 요즘 아이들은 많이 알고 있기도 하다. 기술은 자고 일어나면 발달해 있고, 우리가 책이나 상상에서만 접했던 여러가지 문명을 공기처럼 물처럼 마시는 게 요즘 아이들이다. 언젠가 당시 7세였던 우리 둘째가 나에게 "엄마 어릴 때는 냉장고가 있었어?" 라든가 "엄마는 조선시대 사람이야?" 라고 물어오던 질문들이 요즘 아이들과 나 사이의 기술의 간극에 대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진화하는 사이 인간의 감정도 그러한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기술과 문명이 진보해도 사람이 느끼는 감정들은 비슷하다. 옛날 사람들이라 해서 슬픔에 무디거나, 요즘 사람이라고 해서 기쁨에 예민하달 수 없다. '감정' 이란 책에서 본다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글로 배워서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누군가 설명해준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직접 겪어 보아야 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체화해야만 그 감정은 내 것이 되고 그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살아봐야지만이 알게 된다. 감정에 발달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이유다. 시대가 변하고, 아무리 기술과 법이 발달해도 인간의 감수성에는 순환만 있을 뿐, 발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영우 엄마는 기립 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마냥 흐느끼면서 이제 서서히 슬픔을 극복할 준비를 한 거였다. 내가 본 영우 엄마의 마음은 그거였다. 회복을 품고 있는 눈물. 소설을 읽으면서 어렵지 않게 나에게 그 마음이 와닿은 이유는, 회복에는 바닥을 치는 어떠한 시점이 필요하다는 걸 살면서 나는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이나 심각한 경제적인 실패, 그에 못지 않는 인생의 질곡을 나는 겪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고비라는 건 있고, 남의 아픔이나 고통에 대해 쉽게 얘기하지 말라는 이유역시 자신의 문제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하고 크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문제 안에서 사람은 누구나가 바닥을 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문제들 사이에 경중이나 대소를 가리는 일은 무의미하다.
간절히 원하던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이 끝나버렸을 때, 이 악물고 준비했던 시험에 낙방했을 때, 칠전팔기로 '이번이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한 도전이 수포로 끝났을 때, 그 다음은 좌절이다. 그러나 '그 일만 마지막'이지 내일은 또 온다. 맞이하고 싶지 않은 그 다음날부터 상처입은 마음은 끝이 어딘지 모르는 터널이나 계곡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터널이 어두울 수록, 계곡이 깊을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는 극복이 같이 들어 있다.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이르렀을 때에라야 비로소, 알게 된다.
'아, 나 이제 좀 괜찮아지고 있구나.'
스스로 그걸 느꼈을 때 포기하든, 절치부심하든, 미련을 버리고 떠나보내든 각자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실패와 슬픔을 극복해 나가게 된다. 그걸, 성인이 아닌 아이가 알 수는 없다. 어린 나이에 상상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본 아이들에게 '빨리 어른이 되었다' 고 얘기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커나가면서 각각의 시기에 맞는 경험이라는게 있고 그 경헌들이 쌓여 감정세계는 점점 크고 깊어지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머리좋은 아이도 겪어보지 않은 일과 그에 따른 감정을 알 수는 없다. 이건 어린 아이의 가능성과 역량을 낮잡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몇 해 전, 초등학생이던 첫째가 그려 할머니께 선물한 그림에 이런 얘기가 적혀있었다.
"할머니가 익어가고 있어요. 늙는 게 아니에요."
나이들어 가는 것은 노화지만, 거기에는 몸과 정신이 늙어간다는 의미만이 있는건 아니다. 어리거나 젊은 시절에는 미처 보지 못했거나 보기 싫었던 일들을 겪어내며 성숙해지고 야물어가는 과정도 함께 들어있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그런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걸 연륜이라고 부른다. 나도 나이들어가는 내 얼굴을 보는 건 싫지만, 내 안에 지혜와 슬기가 생기고 그것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얘기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고 생각하니 늙음이 그리 싫은 일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물론, 그런 이야기들을 잔소리라고 치부하지만, 그래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내 이야기들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지만, 그리하여 내 말의 의미를 모를테지만, 그리고 결국에는 스스로 겪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겠지만 그래서 나는, 잔소리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아이가 커가는 길에 맞이할 좌절과 시련의 계곡이 너무 깊지는 않기를, 분노와 슬픔의 터널이 너무 깜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게 얼마나 혹독하고 아픈지 나는 알기 때문에 아이는 조금은 얕게 앓고 지나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참으로 이기적이게도 한편으로 나는 그런 쓰리고 뼈아픈 경험들을 통해 아이의 감정세계가 넓고 깊고 풍요롭기를 바란다. 아픔은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그 아픔의 바닥까지 가보고 나서야 비로소 극복해낼 힘도 생긴다는 걸 알고 있어서다. 아이가 그렇게 '익어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고3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가 되지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걸 모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런 문제를 내는 게 맞는가 하는 문제를 잠깐 고민했지만 문제와는 별개로 얘기해줬다.
"○○이도 나중에 알게 될거야. 이 문제로 예방주사 하나쯤 맞아두었다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