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포용의 세계로

내러티매진 Narratimagine-사도들의 길, 우리의 걸음

by 푸른킴

로데가 나갔는지도 모르고, 데오빌로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끝에 약간 상기된 얼굴로 L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내려갔습니다. 편지와 로데의 말이 겹쳐져 재생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사도들의 이야기 중에 그 사건이 가장 슬프고 마음이 아팠을 것 같았습니다. 가룟인 출신 유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을지 내심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가장 기쁘고 놀라운 기적이었던 선생 예수의 부활 소식이 역설적으로 그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아예 삶의 이유를 송두리째 빼앗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너무 아이러니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불안이 얼마나 심했을지, 그의 아픔을 알아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슬퍼졌습니다. 문득 자신이 겪었던 지난 세월도 그 슬픈 사건에 겹쳐졌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며, 책임인지를 묻기 전에 사람에게는 누구나 유다처럼 여린 본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왜 인정 못 해주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도들이 말하는 저 전능한 신마저 그의 죽음을 버려뒀을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데오빌로는 유다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 본성을 솔직하게 보여준 인물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끝내 저 유다가 혹시 데오빌로 자신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온몸에 약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 L의 이야기에는 예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의 불안감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L이 제자들의 불안감을 늦게서야 느낀 것 같았습니다. 메모가 그 증거입니다.


데오빌로는, 이 메모를 들고 이리저리 읽어보다 메모지 뒤에 장문의 편지가 있다는 것을 늦게 알아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선생 L도 역시 자신처럼 제자들의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던 모양입니다.

데오빌로님! 아마도 지금쯤 이 대목을 읽으시면서 제 메모도 함께 보셨을 것 같습니다. 몇 마디 덧붙이려고 좀 더 길게 설명해두었습니다. 부언한 글의 요지는 그날 베드로가 아주 불안했고, 그 불안을 해결하려고 보궐선거를 제안했다는 것입니다. 불안의 원인은 결핍에 대한 조금 예민한 대응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채워져서 다행이지만, 그 예민함은 여전히 그가 자기 전통에, 권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선생 예수는 안 그랬는데 말입니다.
선생 L은 예수의 부재보다 사도의 결핍이 그들에게는 더 큰 불안 요소였던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선생 L에 따르면, 사도들은 이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 몰라 또 불안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 기다림이라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데오빌로는 생각했습니다. 전력을 재구축하는 일, 그래야 권위를 갖고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결국, 그들도 정형적 조직이 비정형적 조직보다 결속력이 강하다는 일반적인 견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전통의 중시를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눈앞에 결핍을 먼저 채워야 한다는 것은 선생 예수의 말과는 조금 결이 다른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 결핍을 가장 참지 못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데오빌로도 결핍을 힘들어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결핍이 불안감의 원인이고, 그래서 반드시 해소되어야 한다는 욕구가 가득했습니다. 그날 12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다락방에 모였다 했습니다. 선생 L도 그날 거기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유 있거나 한적한 시공간은 아니었지만 모든 사람의 기대감은 하늘을 찌들 듯했다고 합니다. 선생 L의 말을 들으니 ‘사도의 보궐! 전통의 계승’이라는 현수막이 이상하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의 첫 말이 사람들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던 것 같습니다. 가룟 유다의 이야기 때문입니다.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보니 그가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진 않았습니다. 데오빌로의 생각에, 그저 이유라면, 결핍을 채워야 하는 불안감 말고는 없었기에 충격 요법을 쓴 것 같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한 극한 처방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말해 질 자리는 아니었던 것 같긴 했습니다.


그날 베드로는 평판과 달리 수려한 언술로 그 방을 압도했다고 했습니다. 시편 등을 인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가룟 유다의 행적을 차분한 어조로 말하면서 그를 대신할 한 명의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합니다. 일의 정당성을 정통성에 의존했다는 것입니다. L은 선생 예수가 시편을 좋아했다는 것도 인용의 이유였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베드로가 힘주어 연설한 주장의 요지는 ‘수를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사도들의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확정된 도데카(12명)라는 고유한 이름을 명분에 맞게 되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12명이어야 하나의 완전한 정체성을 확보하고 그에 상응하는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데오빌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정당성은 선생 예수 이전, 아니 예수의 시대에도 여전히 전통의 권력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유연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데오빌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로데의 말과 달리 선생 L의 편지를 읽다 보니 그가 베드로와 이 보궐선거에 대해 조금 장황하게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선생 L의 말은, 사안의 시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베드로가 서둘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좌충우돌하는 듯한 옛 모습을 싹 바꿨다는 것도 L의 비판적인 입장을 암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가 평소와 달리 확정적이고,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지금 베드로가 곁길로 가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지는 선생 L의 말은 좀 더 흥분된 것 같았습니다. 그가 가장 의아해했던 것은 선출을 위한 후보자의 자격이었다고 했습니다. 엄격했던 모양입니다. 그 자격은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부터 부활하고 승천하실 때까지 항상 함께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한 사람이 다급한데 이런 엄한 자격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모두 의아해할 정도였던 모양입니다.


베드로의 제안에 따르면,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던 12명 외에도 처음부터 늘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 같았습니다. 데오빌로는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런 사람의 이름조차 몰랐던 것일까? 왜 그 당시에 도데카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또 이 이름이 알려진 12명은 무슨 이유로 선발되었을까?’


사실 듣자 하니 사도들이 선출된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선생 예수가 부를 때 바로 따라나선 사람이 사도가 된 것입니다. 돌아보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3년간 따라다닌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12명은 평범하게 그들을 대표하는 이름일 뿐이어서 권위나 우월한 지위와는 별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L이 보기에 한 명의 결핍은 채워지지 않아도 별문제 없었을 같다 했습니다. 오히려 그 결핍을 그대로 둘 때 상징하는 바가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빈자리는 상상의 공간입니다. 누구나 12번째 사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누구도 그 자리를 꿰찰 수 없다는 의미의 공간일 수 있다고 데오빌로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그날 베드로는 무척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평소에도 그는 빈자리는 퇴락의 원인일 수 있고, 기다림의 동력을 해치는 방치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결핍을 여유 있게 보지 못하면, 그것을 채운 뒤에도 불안은 여진을 일으킬 때가 많다는 것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20명과 논의를 통해 최종 두 명이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말에 데오빌로도 괜히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런데 데오빌로는 새로운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선생 L이 말이 옳은지, 사실인지를 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결핍, 불안’이라는 단어가 꼭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 같이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왜 문제일까? 인류 역사는 결핍을 채워가며 발전하는 것 아닐까? 선생 L이 본 예수는 이런 결핍을 그대로 두었단 말인가? 왜? 그런데 사도들은, 특히 베드로는 여전히 그걸 모르고 있다? 아이러니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다시 L의 메모를 읽어내려갔습니다.


데오빌로님! 의구심이 드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도들이 채워졌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결핍과 불안은 아시다시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실존의 문제입니다. 흔들린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런 결핍과 불안에 대해 채우는 것으로 해법을 찾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완벽 추구’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완벽하다’라는 말은 성립 불가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완벽한 삶’은 가능성이 문제일 뿐 현실에서 일어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결핍이 인간에게 그대로 남겨져 있는 것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저의 주장이 도출됩니다. 바로 결핍을 채우는 방식입니다. 또한, 결핍은 불안의 요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완벽주의가 불안의 요인입니다.


데오빌로는 이 대목에서 펜을 떨어뜨렸습니다. 차를 벌컥 마셨습니다. ‘결핍이 아니라 완벽주의 자체가 불안의 원인이라니’ 그것이 베드로의 문제였다니!


데오빌로는 평소 완벽주의란,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라고 여겼습니다. 완벽하다는 말 속에는 자신의 의도대로 주관하는 삶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 L의 말에 의하면, 완벽의 반대말은 과정입니다. 한 걸음씩 걸어가는 삶과 처음부터 완벽한 삶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삶은 거의 없지만, 과정으로서 삶은 보편적입니다. L에 의하면 선생 예수는 과정을 우선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데오빌로도 완벽은 인간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갖출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데오빌로는 뭔가 이해되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 예수가 죄인이 의인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생 예수는 죄인을 죄인으로 품고, 결국 그를 의인처럼 대우해주었습니다. 결핍은 결핍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뜻 같았습니다.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것은 완벽주의자 인간의 욕구일 수 있다고 데오빌로는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의 신은 바로 자기 세계를 넘어 존재하는 낯선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구나. 세계의 결핍을 자기 결핍으로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구. 그것은 단순히 채워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있는 그대로 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일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신의 자기 결핍’이군. 신이 결핍하다는 주제는 불경할 수 있지만, 히브리인들의 신은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인 세계 유일의 신이네. 예수는 신의 자기 결핍의 현현이며, 이 해결책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자기 비움의 태도’에 있다는 거야. 케노시스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선생 L의 글쓰기가 이해되었습니다. 이 대목을 다 써놓은 후 왜 자신이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적어야 했는지 고민이 많았던 것입니다. 선생 L이 고충 흔적이 눈에 선합니다. 사도들의 수장인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그가 생각보다 심각한 고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그나저나 데오빌로는 ‘기도’가 왜 필요한지가 궁금했습니다. 그 말을 써놓았는지 빨리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데오빌로님! 기도는 그런 자기 완벽의 욕망을 스스로 내려놓은 거의 유일한 삶의 방식입니다. 제 첫 편지에 이 점을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부디 이 점을 잘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데오빌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베드로의 기도에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 바로 이점을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기도는 요구를 성취하는 도구가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 기존 사도들이 밀지 않고 여론전에서도 조금 밀렸던 맛디야가 선출되지. 기도는 아마도 다른 의미가 있을 거야.’ 이 말끝에 데오빌로는 오래전부터 고민해오던 말들을 마음에서 막무가내로 옮겨적었습니다.


기도는 신에게 자신의 욕구를 위임한다는 서약. 그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허용한다는 자기 포기 선언. 기도는 대화. 그 대화는 잡담이나 요구를 관철하려는 말의 나눔이 아님. 오히려, 당신의 뜻을 듣겠다는 경청의 허락’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자신만 간직했던 신을 향한 기도의 정의였습니다. 오늘 그 옆에 새로 이해한 것을 덧붙였습니다. ‘기도는 자기 완벽 욕구를 버리고 결핍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불안의 요인이어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한 존재로서 인간이 과정의 존재라는 것을 입증함.’ 데오빌로는 이를 요약하면서, ‘기도는 인간이 불안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불안의 요인인 결핍을 받아들이면서 신과 함께 자기 길을 걷겠다는 서약이라는 것. 여기까지.’


그러고 나서, 데오빌로는 선출을 위한 기도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약속을 기다릴 때’도 ‘기도’였고, 지금 사람을 선출할 때도 ‘기도’라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하나님!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주께서 택하신 사람이어서,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결국, 어긋났지만 만났군.’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시종 디스마가 문을 열고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아차’ 데오빌로는 얼른 편지를 다시 덮었습니다. 겨우 몇 절 정도의 짧은 대목이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그 탓에 데오빌로는 중요한 약속 시간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새벽부터 이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오래전 괜한 이유로 어긋났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그가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실로 나가는 그 짧은 시간, 마음은 소요하듯 두근거렸습니다. 이렇게 다시 눈앞에 나타나 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데오빌로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보기도 전에 어린아이처럼 웃는 자신이 좋았습니다. 결핍과 불안, 자기 완벽함에서 해방된 듯한 기쁨. 기도가 그런 의미라는 것을 발견한 흥분이 친구에게로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이 기다림도 결국 이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습니다.


편지도 편지지만, 기다리던 친구를 만난 덕에 오늘은 가장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그때 데오빌로는 친구와 나누는 웃음 속에 자신의 몸 안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 바람, 깊고 높은 소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데오빌로는 잠시 방으로 되돌아와 일단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그대 완벽주의자여, 그대의 불안을 인정하라, 그대의 결핍을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친구로 받아들여라. 그대의 완벽은 과정이 끝나는 날 이뤄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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