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의 상징(2) 숲길, 공간해체의 의의
성소의 재개념화. 성스러움의 해체, 세속의 정화
이제 거의 숲길의 끝이다. 나는 느리게 내달렸다. 몸이 피곤해졌다. 솔직히, 숲이라는 안식 공간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하이데거가 생각한 대로, ‘거기에 있는 존재(da-sein)’로 역동하기 위해서는 나를 올바르게 정위해 줄 그 자리로 가야 한다. 그곳이 바로 이 숲의 끝일 것이다. 해체의 관점에서 그 끝은 곧 시작이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숲길에 끝으로 갔다. 어딘지 몰라도 나는 거기가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만났기 때문이다. 끝은 시작과 맞물린다.
숲은 도심으로 도심은 숲으로 이어지고 그사이에 광장이 있다. 나는 안식월 동안, 이 숲과 저 도심 사이에서 가고 싶은 곳까지 걷고,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반복했다. 이런 과정으로 나는 안식 공간을 충분히 사유했다. 그 공간은 건물 안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벽 너머까지 이어진다. 그 공간에서 나는 나를 해체한다. 즉 성찰한다. 따라서 안식은 인간과 예배 영성을 해체하면서 재건축하는 과정이다.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대상으로 실현된다.
첫째, 주일의 습관적 예배당이 그 대상이다. 걷기는 나에게 하나의 새로운 예배다. 이제 예배당은 길이다. 길은 무벽이며 무시의 공간이다. 이 길의 예배를 거친 나는 자신이 ‘길 위의 존재’라는 정체성을 새롭게 한다. 나는 길에서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웅크렸던 자기 몸을 일으키는 순간, 더 분명히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걷기는 나를 세계에 던지고, 동시에 세계 속에 다시 붙드는 실존적 행위다. 거기가 나의 예배 자리다.
둘째, 나 자신이다. 해체는 나를 미적분한다는 의미다. 안식월의 모든 길 걷기는 나를 최대로 미분하며 적분하는 노력이다. 최대한 미미하게 해체한다. 동시에 그 미분을 최대한 적분한다. 이 분해와 축적이 내가 치러야 할 의식(ritual)이다. 이로써 나의 의식(thought)도 해체되고 결합한다. 미분은 발골하듯 굳어진 생각을 잘라내 버릴 것을 버린다. 적분은 그 남은 것을 다시 충전하듯 긁어모은다. 또한, 이 의식(儀式)은 자기 두 발로만 걷는 단독자의 예전이다. 미분은 홀로 걷는 고독을 의미한다. 적분은 홀로 걷다 경계 너머에서 동행하는 타자와 연대하는 동행을 함의한다. 이로써 ‘홀로 그리고 함께’라는 공동체성을 실현한다.
셋째, 걸었던 모든 길이 그 대상이다. 성소라는 것은 예배당의 무효성과 전혀 무관하다. 예배의 공간은 절대적으로 거룩한 곳이다. 그 성소는 창조주가 좌정하는 곳이다. 숲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숲은 절대적 성소가 아니다. 도심의 광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 앞에 놓인 모든 길은 언제나 비판적으로 성찰되어야 한다. 그 길이 세계와 구별되고 관계하는 공간인지 물어야 한다. 보이는 벽에 막혀있지 않는지 무언의 경계가 견고한지 질문해야 한다. 길마저도 보이는 경계를 해체하고 보이지 않는 경계 너머로의 확장할 때만 성소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길은 그저 물리적 길이다.
나는 안식월에 길을 걸으며 수많은 열린 예배 공간을 경험했다. 산 아래까지 이어지면서 사방으로 멀리 펼쳐진 논둑길, 호수를 지척에 옆에 두고 오래전 만들어진 오솔길, 바다를 끼고 우두커니 서 있는 듯한 섬길, 비슷한 듯 펼쳐져 있는 산길, 도시를 관통하면서 변두리와 산으로 이어지다 다시 도시로 되돌아오는 길은 그저 평범하다. 그러나 아무리 좁고 험한 길, 사전에 걸어본 적 없고 본적 없는 낯선 길도, 내가 예배당의 의식으로 기꺼이 선택한다면 그 길 위에 선 나는 곧 예배의 공간에 나를 밀어 넣은 것이다. 길은 걷는 자에 의해서만 비로소 길다운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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