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믿음, 믿으려는 의지(2)

모호성과 동행(2)

by 푸른킴

믿으려는 일은 모호성의 현실 지혜

내가 경험한 믿음, ‘믿으려는 의지’는 장자 철학의 무위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무위는 삶의 범주를 현실에서 초월적 세계로 확장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었다. 걷고 책을 읽고, 세계를 대면하면서 나는 현실의 끝에 닿으면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초월의 삶과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알려져 있듯이, 무위는 장자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이는 인위적인 무리한 억지 노력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삶이 아니다. 시대를 포기하는 비겁함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시대의 질서, 드러나지 않은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맞춰가려는 지혜추구 수고다. 이해 불가한 세계로 들어가더라도 내면의 질서를 흔들지 않고 자아를 향유하는 것이다. 자연의 흐름과 움직임에 자신을 맡기려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 무위는 사실 장자가 직접 썼다고 하는 소요유 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장자는 이런 관념을 직접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물, 동물에 이입하여 서술했을 뿐이다. 이를 통해 현실 너머를 말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우화를 통해 말함으로써 사람을 상상의 세계로 안내하려 했다. 장자에게 무위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직접 경험하는 지혜다. 다시 말해, 노자에게서 발원하고 후대에 덧붙여졌을 무위라는 개념이 장자에 와서는 ‘초현실의 세계관으로 자연과 일치하는 노력’으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무위는 현실에서 현실 너머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믿음과 연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 의미에서 믿음이라 할 수는 없다. 무위는 절대자를 인식하면서도 행위를 하는 자신을 믿으려는 의지에서 성취된다. 즉, 장자에게서 무위는 ‘자연과 일치하려는 인간 자신의 의지’로 성취하는 삶의 방식이다. 달리 말하면, 이 무위에서 나는 ‘믿으려는 의지’의 범주가 초월의 세계에서 인간 자신의 기원까지 넓게 확장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득 나는 장자의 무위와 코헬렛의 헤벨은 어떤 관계일까를 생각했다. 분명 비슷한 듯하지만, 다른 의미도 농후했다. 믿으려는 의지에서는 같지만, 그 믿는 대상은 확연히 달라진다. 헤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지만, 무위는 인간 자신에게 기울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다음 두 가지 관점이 둘 사이에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첫째, 핵심 개념의 강조 방법이다. 코헬렛은 인생의 허무를 독자에게 철저하게 인식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헤벨'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면서 반복했다. 마치 망치로 쇠를 두들기듯 그 메시지를 각인시켰다. 또한, 코헬렛은 세상의 모든 현상(지혜, 쾌락, 부, 노동 등)을 자기 경험으로 나열한다. 그 후, 그 모든 것이 결국 '헤벨'이었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이 반복과 최종선언은 삶에 대해 단순히 허무주의를 주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삶에서 겪는 덧없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려는 것이다.


한편 장자는 자기 핵심 주장이라 할 수 있는 무위를 자기 저서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이런 세계의 허무를 아예 ‘초월’하게 만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것이 장자의 의도였던 것 같다. 이 용어 대신에 장자는 붕(鵬), 매미, 척안(斥鷃=자기 눈의 자, 좁은 생각) 같은 구체적인 비유를 활용한다. 아예 시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에게 ‘무위’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자유로운 경지였다. 그것을 상상하며 ‘믿으려는 의지’만이 이 무위에 도달하는 것이다.


둘째,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다. 코헬렛은 글 전반에 걸쳐 헤벨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불확정과 모순, 부조리로 점철된 세계마저 믿으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 같다. 따라서 ‘헤벨’ 직접 서술과 여러 반복은 자신은 물론이고 독자를 자기 현실에서 허무의 심연까지 내려가게 한 뒤, 그 어둠의 끝에서 지혜를 끌어올린다. 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로 귀결한다. 이는 모순과 부조리의 삶에서도 ‘믿으려는 의지’를 강화하는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수사적 의도를 보여준 것 같다.


이에 반해, 장자는 처음부터 초월적 태도를 보인다. 코헬렛의 ‘헤벨’처럼 세상의 덧없음을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장자의 관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위’'의 경지에 이르기만 하면, 모든 상대적인 가치(크고 작음, 옳고 그름 등)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상 현실의 허무함에 아예 매몰되지 않고, 그 위로 올라가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소요유’를 즐기는 것이다. 결국, ‘무위’는 ‘믿으려는 의지’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현실에 함몰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삶으로 이끌어간다. 장자의 '무위'는 상상 속에서 우화를 통해 세상의 범주를 넓힘으로써 이 세계를 향유하는 자신을 ‘믿으려는 의지’를 일깨웠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 매이지 않는 ‘자유롭게 노니는’ 삶을 천착하고, 인간 스스로 자연스럽게 무위의 삶을 동경하고 따라갈 수 있도록 안내했다.


요컨대 코헬렛과 장자는 헤벨과 무위라는 핵심 개념을 자기 방식으로 내세워 이 세계의 범주를 확장한다. 코헬렛은 땅에서 하늘로, 땅에서 스올까지 아우른다. 장자는 현실에서 초현실로 삶의 장을 확장한다. 나는 멀리 있는 길을 두 발로 걸으면 깊고(深), 넓게(廣) 확장된 ‘믿으려는 의지’로 ‘믿음’을 재개념화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믿음은 몸을 움직여 자기 삶으로 관찰하고, 탐구하고, 실현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목적에 국한된 명사의 삶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동사의 삶을 지향하도록 안내한 것이다. 나아가 나는 ‘믿으려는 태도’가 바탕이 된 ‘자기 실천적 의지’를 함양했다는 점에서 같은 결을 갖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에 이해되지 않는 삶의 자리, 설령 ‘빈 곳’에서도 충만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실제로 적용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새롭게 깊고 넓게 보여준 이 믿으려는 행위, 또 의지, 지혜를 우리 시대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정리하면, 나의 멀리 걷기, 헤벨, 무위는 이해 불가한 시대에서도 현재를 즐기면서 현재 너머를 지향하는 삶과 연동된다. 알지 못하는 길을 걸었을 때, 그 두려움은 정의가 어그러진 코헬렛의 시대, 현실도피처럼 보이는 소요유만 향유하는 장자의 시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여 나도 여전히 ‘주어진’ 삶을 믿으려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이것은 삶이 아무리 불가항력적, 수동적으로 주어진다 해도 그 삶을 가꿔가는 것은 나의 능동적인 실천 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 의지가 삶의 중심에 이르도록 깊어지고, 나와 무관한 삶에까지 멀어지며, 그 반경이 우주까지 넓어지면서 지속해서 이어지는 행동으로 유지되도록 애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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