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새로웠던 육체노동
일주일에 한 번, 새벽 6시에 출근했다. 지난 10년간, 단순한 아르바이트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달 말로 끝내게 되었다. 일하던 지점이 갈수록 어려워져 폐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퇴직하자마자 의료보험자격이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보험료를 내 손으로 내고 나니 비로소 실감 났다. 특히 겨울 출근이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이 시간은 늘 같은 길, 비슷한 사람, 반복되는 리듬으로 꾸며진 음표 같았다.
그 풍경은 대체로 이렇다. 밖은 아직 새벽빛이 짙은 어둠이다. 찬바람이 여전하다. 전철역까지 가는 길은 오히려 비어있고 호젓하다. 천천히 걸어 15분이면 충분하다. 타려던 급행열차가 가끔은 정해진 시간 앞뒤로 오지만 않는다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보폭을 서둘러 바꾸지 않아도 여유롭게 탈 수 있다. 급행은 내가 가야 할 역에는 서지 않는다. 서너 정거장 앞에서 내려야 한다. 불편하지만, 나름 괜찮다. 열차를 환승하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기차를 타는 기분이 늘 좋다. 대체로 서서 가는 날이 많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먼저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잠을 청한다. 어제 피곤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 출근하는 탓이리라. 남겨진 고생에 새로운 고생이 매정하게 쌓일 것이다. 어느 날은 사람 사이로 영상만 난무할 때도 있다. 아침을 여는 의식은 사람마다 다양했다. 나는 그들 틈에 조용히 눈을 감는 날이 많다.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중간역에 도착한다. 다시 계단을 내려서 올라야 한다. 건너편에서 일반 열차로 갈아탄다. 갈아타기 전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사람들이 계단으로 밀려 내려가기 때문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뛰어 내달리는 사람도 많아진다. 어둠은 채 걷히지 않았다. 움츠린 사람들은 남아있는 어둠을 뚫고 뛰어 내려가기도 한다. 아래로, 위로. 그들을 조금 비켜나 나도 평소보다 조금 빨리 걷는다. 그들이 달리기 편하도록 계단 한쪽을 비워준다. 그 틈에 숨도 좀 돌린다.
이렇게 새벽은 매일 역동한다. 흐트러지지 않는, 반복되는 일상이다. 겉으로는 별 것 아닌 듯하다. 하지만, 새벽의 단정한 표면 아래, 오리 발질 같은 분투가 쉼 없다. 그 장면이 매번 나를 깨운다. 하여 나는 새벽을 깨우는 이들에게서 배운다. 삶은 표면이 아니라 내면을 관조할 때 비로소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내면은 치열하다. 그들과 같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나의 새벽도 쉽게 버려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삶의 내면을 보는 눈
겨울 새벽은 세월에 정면대응하는 이들이 어디서든 달리는 시공간이다. 한적하고 고요하며 내면을 되짚기 좋은 시간이라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날카로운 시간일 수 있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걸쳐도 몸 밖에서 피부를 찌르듯 스며드는 바람에 몸을 움츠리기 일쑤다. 나도 다르지 않다. 일터에 도착하면 몸부터 깨워야 한다.
말없이 습관처럼 장치를 조작하고, 지점장이 건네주는 작업 하루 분량을 훑어본다. 늘 부담 없이 마칠 수 있는 정도다. 내 몸으로 일하기에는 적절한 배려다. 어느새 내 몸도 기계처럼 작동한다. 이제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다. 식사시간과도 겹치지 않게 한다면, 이 작은 공간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않아도 된다. 오롯이 서너 시간(아주 짧은 날도 있지만) 불과 만날 콩과 익혀진 콩 사이를 기웃거린다.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떼지 않고, 적절한 때 말을 듣고, 말을 쏟는다. 잘 다독여진 원두를 만들어내는 나의 책임이다. 사실, 긴장하지만, 이 시간은 내가 누리는 환대다. 지난 세월 이 카페는 무엇보다 지역 직장인들, 근처 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모닝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그냥 가볍게 아침을 맞이하려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위한 자기 환대를 베풀기 좋았던 공간이었다고 자부한다.
아침엔, 드나드는 손님들이 일정하다. 아침 커피를 마시거나 가져가려는 분들이다. 그들은 달리던 걸음을 잠시 멈춰 카페로 들어선다 내가 일하는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분들도 많다. 정해진 시간, 정해놓은 그 음료를 들고 곧바로 다시 차를 움직이거나 가던 길을 간다. 몇 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하다. 새로운 분들이 드나드는 광경을 보며, 이제는 안 보이는 분들을 기억해 본다. 건물관리를 맡았던 노신사는 어느 날 조용히 뒷전으로 물러나셨다. 새로운 분들은 늘 반갑다. 아마도 그분들도 예전 분들처럼 매일 아침 이 짧은 시간, 따뜻하거나 시원한 음료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건네며, 자신을 위한 환대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매일 새벽, 아침을 깨우는 자신을 다독이고, 몸이 움츠러들 시간을 이 작은 동네 카페를 통해 자기를 환대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지켜냈다. 늘 한결같았던, 일관된 삶의 습관이 나에게도 작지 않은 교훈이었다. 매일 이른 아침, 스스로를 환대하는 그 짧은 의식을 보며 나도 나를 다독이는 작은 기도를 드렸다
나의 일은 대체로 마감 시간을 내가 정할 수 있었다. 일이 많으면 늦게, 적으면 일찍 끝낼 수 있었다. 대체로 일정한 시간에 일을 마쳤다. 일 끝에 예측 못한 새로운 주문이 들어오면 조금 더 걸린다. 일을 마치면 광화문 광장을 거쳐 서재로 나갈 때도 있다.
아침에 내렸던 역으로 되돌아 다시 도심으로 더 들어간다. 한낮 전철은 느릿하다. 걸어오는 것 같다. 내 목적지는 얼마 가지 않는 역이다. 광장을 지나 다시 조금 걸은 뒤, 마을버스를 탄다. 겨울에는 이 미니버스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 적절하게 떨어져 앉을 수 있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도로는 사람들을 위한 길 넓히기 공사가 많다. 다행히 버스는 막힘없이 달린다. 차창 밖 풍경도 아침 출근 시간만큼이나 한결같다. 건물 담벼락과 광장 주변으로 일정하게 늘어선 정복 입은 사람들도 있다. 눈과 카메라로 오가는 사람을 의심하는 일만 없어도 저 길은 한층 넓어질지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이라지만, 늘 이 광장을 지나다닐 때마다 그 풍경이 아쉽다. 그 생각이 들면, 습관처럼 길 건너편 저 위를 쳐다보았다. 글판의 시구가 언제나 훈훈했다. 격려의 글은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는 법이다.
시처럼 치열하게 살아갈 남은 세월
지난 10년 세월, 손끝 하나로 희비가 갈리는 후지로열 로스팅기의 불꽃처럼 세월이 사라졌다. 그새 광화문의 한 서점에 매달린 글 판도 수없이 달라졌다. 올해 가을 글 판이 마음에 싱그럽게 남아있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설명에 따르면, 이 구절은 최승자 시인의 시집『‘즐거운 일기』(문학과 지성사, 1984)에 담긴 「20년 후에, 지(芝)에게」에서 따왔다 한다. 이상하게 이 시구에 공감하게 된다. ‘아슬아슬’하다는 말은 정말 내 삶에 아직도 살아있는 부사어다.
내 기억에 남은 인상적인 글판이 또 있다. 지난 2020년 겨울, 김종삼 시인의 시, ‘어부’의 후반부 한 구절이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이 시는 1979년 시집『북 치는 소년』(민음사)에 실렸다. 시의 흐름상 이 부분은 작은 고기잡이 배를 앞두고, 어부가 ‘중얼거’리는 독백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시가 절망을 이겨내는 어떤 방법을 은근히 건넨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희망을 중얼거리는 것이다. 혼잣말로 자기를 위로한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자신이 오히려 희망의 주체라는 알아채는 독백이다. 지난 세월 지난한 삶을 함께 살아온 뒤 덩그러니 남아있는 배 한 척을 바라보며 자신을 다독여 준다. 밀려든 절망에서 가장 먼저 희망으로 사랑받아야 할 존재가 자신이라는 자기 선언이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실패한 노인이 다시 그물을 만지는 모습이 겹쳐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득 이 계절에 더욱 빛나는 시인 김종삼의 시를 좀 더 뒤적였다. 그중 ‘북 치는 소년’(전문)도 마음에 새겼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시인은 12월 성탄절, 거리를 가득 채운 불빛과 캐럴을 들으며 삶의 모순 같은 이 축제가 부디 희망의 별빛으로 빛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소년의 북소리가 어린 왕자의 소행성 B612처럼 작지만 바오바브나무같이 씨앗을 품고, 식사를 만들어내는 활화산같이 빛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남겨진 이 시구들은 내 삶의 불빛처럼, 내가 어둑한 길을 돌고 돌 때 내 안의 작은 불을 다시 켜 길을 밝혀 주었다. 이 시들은 내 삶의 등대처럼 정해진 시간, 자리에서 고요하게 내 길을 비춰 주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시 덕분에 더 밝아진다. 내 삶에 등불 하나가 더 켜졌다
다시, 격려와 응원
한 곳에서 퇴직했지만 아직 다른 일은 여전하다. 살아가는 동안 서너 가지 일을 아무 어려움 없이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큰 특혜다. 가르치는 일도, 원두를 볶는 일도 이제는 내 인생에서 추억으로 남겨졌지만 괜찮다.
마지막 로스팅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전철은 언제나 그랬듯 한적했다. 아침에 비해 자리도 여유 있
었다. 따스한 기온에 졸음이 밀려들기 딱 좋았다. 눈에 들어오는 아무 자리에 앉았다. 평소처럼 전철을 타기 전까지 읽으려 했던 책을 꺼냈지만, 바로 다시 가방에 밀어 넣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 생각 없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비로소 배웠기 때문이다. 사실 책을 오래 읽지도 못한다. 그것보단 몸을 쓰는 일을 했으니 그저 몸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멍하게 건너편 차창 너머를 방관했다. 아주 즐거웠다. 여유롭게 마지막 귀가여행을 마쳤다. 그날 나의 일기에는 이런 글이 남겨져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좋고 바람직하게 생각하기를 원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그래서 보통은 자신의 긍정적인 점들은 더 크게 부각시켜 평가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이처럼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동력이다.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해야 살맛이 나기 때문이다. [정태연, “내 삶의 심리학, mind-관계와 소통이 어려운 진짜 이유 3,”「교수신문」(2020.11. 30, 4면)]
이 칼럼에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대, 자신에 대한 가장 큰 격려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위로가 들어있다. AI 같은 기계 문명의 친구가 등장하고, 주식지수 상승이 행복한 경제를 보장하는 것 같은 시대다. 하지만, 그것들로부터 소외된 이들, 자신도 포함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삶의 자리가 온갖 쓰레기 같은 더미에 둘러싸일 수밖에 없는 이들은 갈수록 늘어난다. 실직하거나 비자발적 퇴직을 요구받거나, 정년 연장의 희망만 커지는 시대다. 부디 겉은 화려하고 안은 고통으로 가득한 시기가 잘 지나가길 기도한다.
무엇보다 시대가 속으로 더 각박해진다 해도 나의 삶마저 그럴 수는 없다. 이런 때일수록 자신을 다독여 하루하루 멋지게 성장하는 ‘자신’에게 한마디 칭찬을 남겨두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사실 가뭄에 곳간 비듯이 자기 격려가 점점 더 비워져 간다. 그래서인지 이제야 겨우 도종환 시인이 남긴 이 시를 아주 조금 이해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며 피는 꽃, 전반부-
아직도 불꽃처럼 흔들리는 세월을 관통하는 중이다. 비틀거리면서도 가야 할 길을 가야 하는 삶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이 한 편의 시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나는 나를 지긋이 격려한다.
그대, 나여, 지난 세월, 아니 오늘 잘 살았다.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