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진료를 다녀온 뒤 질병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질병과 더불어 사는 삶
몇 년 전 생일에 ‘성인병’ 진단을 받고 관리 수첩을 선물로 받았다. 낯설었다. 그날 이후로 나를 둘러싼 삶의 환경은 생각보다 격하게 달라졌다. 식사는 투박했고, 몸은, 걷는 것도 조금 불편했다. 투약은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과 식사 약속이 쉽지 않았다. 설령 약속이 있더라도 식사 시간을 피하거나 아예 도시락을 준비했다. 식당에 가면 입맛보다 몸의 수치를 먼저 떠올린다. 마땅한 메뉴가 없으면, 미리 양해를 구한 뒤 준비한 도시락을 먹곤 했다. 불편한 정도는 아니지만, 괜히 미안했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몸의 수치가 최대의 관심사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삶의 질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요즘 다시 조금씩 오르는 중이라 마음도 예민해졌다. 내 책임이 아니라 그저 기온이 떨어진 탓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자책한다. 생각해 보니 이번 가을엔 여러 음식을 거리 두지 않고 즐기다 보니 잘 유지되던 이완기 혈압이 다소 높아진 것 같다. 걱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대로 다시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메뉴를 구별하고 그릇에 식사량을 맞추고, 식사 시간과 횟수도 일정하게 해야 한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몸에 익숙한 방식이라 어렵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나를 압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제는 나의 이 삶의 태도를 잘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의 수치 변화를 기록으로 남긴다. 그런데 이 일은 한 번씩 증명사진 찍는 것과 닮았다.
언젠가 증명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앞에 앉으니 안경을 벗고 찍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어디 한번 그렇게 해보자 했다. 아무 일도 아닌 데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이 사진 앞에서는 괜히 몸이 경직된다. 손은 놓여야 할 방향을 잃고, 눈은 괜히 허공을 헤맨다. 힘없어도 잔뜩 힘이 들어가 경직된 몸은 마음 같지 않아 스스로 어색하다. 그래도 이리저리 가벼운 웃음으로 긴장을 풀고 서너 번 셔터가 지난 뒤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어차피 보정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보정된 나는 순간 나와 다르게 느껴지더라도 그 또한 나의 모습이다. 잠시 기다렸다 출력 전 사진을 먼저 보겠냐는 말에 그러자고 했다. 거기에는 세월이 지나간 자연스러운 내가 아니라 나의 세월과 싸우느라 힘겨워진 내가 있었다. 결국, 평소대로 안경을 쓰고 다시 찍고 싶다고 부탁했다. 너그러운 카메라맨은 씩 한번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나는 나대로 나에게 보기 좋으면 충분하다. 그런 나도 나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처럼 수치 변동의 기록과 사진을 남겨두는 것은 모두 나의 현재를 확인해 두려는 시도이며, 지나온 시간에 일어난 나의 변화의 척도를 나 스스로 남겨두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보정은 아름다움을 주지만, 지속을 증명하는 건 기록뿐이다. 이처럼 질병의 추이를 기록하는 일과 가끔 나의 사진을 남기는 일은 온갖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세계에서 나로 ‘지속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자기 보존 의식이다.
완치가 아닌 재발저지의 관리
나의 하루 생활 중에 세 끼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거를 수 없는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일정한 시간에 밥을 먹는 일은 부담이 큰 노동에 가깝다. 음식을 거르거나 양이 일정하지 않거나 식사 순서가 달라지는 것은 스스로 이 질병을 악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경고가 늘 몸과 마음을 누른다. 외출할 때마다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준비해서 들고 다니는 일도 쉽지 않다. 식사 전엔 손가락 끝을 찔러 채혈하고 숫자를 확인한다. 아무렇지 않게 하다가도 괜히 스트레스다. 수치가 높아지면 마음이 쓸리고, 너무 낮아지면 괜히 무거워진다. 하루에 두 번 알약 먹기도 신경 쓰인다. 식구들과 같은 메뉴로 식사를 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삼 개월이 지났다. 하루 세 번의 정기 식사와 정해진 시간의 약 복용, 채혈과 기록이라는 반복되는 일상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관리 의례다
지난 10월 중순 병원 정기 검사 날이 되었다. 금식하고 채혈하고 결과를 듣기 위해 주치의를 찾았다. 진료실에 들어서니 환한 얼굴로 수치는 정상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다독인다. 하지만 늘 조심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 준다. 약은 더 늘리지 않아도 되고, 하루 한 봉지를 잘 유지하길 바란다는 말로 응원해 주었다. 끝으로 지난 3개월 ‘애썼다’라는 말끝에 여전히 위험 인자가 사라지지 않았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음식을 잘 관리해야 한다며 매번 똑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주치의의 말은 언제나 같다. 관리, 조심, 유지. 반복이 곧 처방이다.
그런데 사실, 이 단순하고 동일한 행동의 반복이야말로 나의 생을 유지하는 생존 리듬이 된다.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 질병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데는 이만한 반복 처방도 없다. 그러니 나는 이 단순한 관리 지침을 따라 식사, 운동, 투약의 조화를 더 탄탄하게 유지하면 된다. 다시 삼 개월 뒤를 기약하고 진료실을 돌아 나오는 순간, 나는 언제나, 재발 위험 인자를 지닌 몸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제 다시 삼 개월을 수치와 함께 나를 돌보며 지내야 한다. 삶의 반경을 좁혀야 하며 최대한 그 안을 벗어나지 않고 깊게 살아야 한다. 뭔가에 집중하고 나면 이 수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치솟는다. 금지 식품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요동한다. 걱정할 상태는 아니라는 권고들도 끝없다. 그래도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없는 상황은 반복된다. 나는 매일 자기 암시하듯 아픈 몸으로 강건하게 사는 법을 더 배워야 한다고 되뇐다. 중요한 것은 내 몸이 아무리 완치선언을 해도 아직 치유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제 나에게 완치는 없다. 재발저지가 더 중요하다.
되돌릴 수 없는 몸, 세계 유지의 윤리
사실 지금 나의 몸 상태가 예전 정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결과를 들으면 마음 한편에 ‘완치’라는 단어가 고개를 든다. 당연한 욕구다. 아니 단순히 말해, 그저 편한 식사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평소 채소, 닭가슴살과 살코기와 거의 염분(나트륨) 없는 나물, 빼놓지 않는 단백질, 최소한의 탄수화물을 찾는 일이 번거롭다. 그러니 호전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무엇보다 이참에 식사를 편히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살아나는 것이다. 다행히 평소 식사에도 수치가 급상승하지 않는 것도 한몫한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보통 사람들보다는 위험한 수준이다. 한번 진단받은 경우는 좀처럼 완치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나의 ‘췌장’은 어떤 이들보다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위험 요소는 언제나 몸 안에 도사리고 있다. 상승을 막아야 하고, 동시에 하강도 지켜내야 한다. 수치가 언제든 요동칠 수 있으니, 내 몸은 작은 기폭 장치와 같다. 조금 슬픈 일이지만, 나는 아무리 건강해져도 옛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몸의 질서가 무너진, 회생이 힘겨운 인자를 품고 사는 것이다. 나의 삶이 직면한 전면적 투쟁은 바로 이 점에서 기인한다. 회복은 처음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현재를 지켜내는 지속의 형식이다. 다른 균형으로의 정착이기도 하다.
그런데 병원을 다녀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내 몸 하나 그렇다 쳐도 이 세계도 그렇다. 세계 역시 내 몸처럼 한번 어긋나면 되돌릴 수 없다. 이유를 불문하고 불가역적이다. 나는 그것이 조금 슬프다. 내 몸이든 땅의 삶이든 한번 발명한 질병은 완치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재발을 저지하는 쉼 없는 투쟁으로만 치유의 끝에 이른다. 나는 그 새로운 경험 속에서 가족들의 인내와 지지, 내 삶 안팎의 친구들 격려로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누린다. 그래도 다행히 몸은 가벼워졌고 마음은 상쾌해지는 것, 그것이 작은 위로다. 큰 즐거움이다.
어느 드라마에서 푸른 바다를 앞에 두고 서 있는 어린 친구들은 서로 격려하며 삶을 버텨낸다. 소년/소녀들에게 바다는 치열한 삶을 격려하는 응원의 터전이다. 하늘과 맞닿은 저 바다는 거친 감정과 청춘이 공존하면서 나의 삶을 지탱하고 추동하는 힘이다. 고요하나 타인의 생존을 위해 쉼 없이 스스로 출렁거려 베풀어주는 생존 동력이다.
소년들에게 바다는 정중동한 불루(不淚)의 터였다. 울지 않는 터전인 것이다. 나에게는 이 질병이 그러하다. 고요하되 끊임없이 움직이며 나를 살게 하는 푸른 슬픔의 장이다.
지속가능한 몸과 세계를 위한 유지의 지혜
나는 병원을 오가며 나의 치료과정을 통해 이 세계의 지속가능을 다시 생각한다. 거창한 윤리라 할 수는 없지만, 아래 세 가지를 자기 성찰적으로 되새겨본다.
첫째, 무너지지 않게: 사전 보호와 생활 수칙이다. 이는 곧 예방의 윤리(Ethics of Prevention)다. 파괴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태도다. 다시 말해 단순한 조심이 아니라 존재의 유지를 위한 자기 책임이다.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곧 생명을 보존하려는 윤리적 책임의 실천이다.
둘째, 무너졌다면: 치료 후 유지 체계를 설계한다. 이는 회복의 기술(Technē of Recovery)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파괴 이후의 복원은 원상 복귀가 아니라 다른 균형으로의 정착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치유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변형된 현재 속에서 새 질서를 구성하는 창조 행위다.
셋째, 치료 이후: 재발저지 중심의 지속 가능성 확보이다. 이는 지속의 윤리(Ethics of Sustaining)로 수렴한다. 다시 말해 완치가 아닌 재발저지는 불가역적 세계 속에서 가능한 최선의 돌봄이라는 의미다. 유지와 조율을 위한 분투를 통해 존재는 자신을 지탱하며, 나아가 세계와 함께 생존한다. 그것이 곧 몸과 세계의 공동 치유의 완성이다.
이런 지혜는 창조질서에 대한 인간의 책임 윤리를 새롭게 일깨운다. 원상복구의 불가능은 창조질서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재발저지라는 차선의 창조적 노력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파괴된 몸과 상처 입은 세계를 완전히 되돌릴 수 없지만, 그 불가역성 속에서 새로운 균형과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창조의 지혜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 세계를 돌보는 존재’로 살아가는 가치가 이 점에 깃들어 있다. 즉 완치보다 지속으로 이뤄내는 치유의 철학이다. 그리고 이 지속의 윤리 한가운데에 ‘검은 안식(Black Sabbath)’ 철학이 깃들어 있다.
검은 안식은 파괴 이후의 고요 속에서 태어나는 내면의 치유적 정-지(靜-止) 상태다. 끝이 아닌 멈춤으로써 재구성되는 삶의 리듬이다. 그것은 절망의 어둠을 부정하지 않고, 그 어둠 안에 생의 재구성과 돌봄의 시간을 품는다. 내가 주창하는 검은 안식은 침묵과 돌봄, 상실과 지속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깊은 호흡이다. 이 호흡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몸의 시간과 세계의 시간을 함께 감당하며 살아간다. 나이 든 몸이든 세계이든, 치유는 완치가 아니라 재발을 저지하는 지속의 윤리에 있다. 나는 그 윤리를 실현하기 위해 어둠의 고요에 기대어, 검은 안식의 평화를 배운다.
오늘도 매일 아침, 내 몸의 수치 변동을 기록한다. 가끔 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둔다. 더는 옛 모습으로 완전히 되돌아갈 수 없다 해도, 지금 나의 모습이 다시 악화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재발저지야말로 이제 나에게 부여된 창조질서 회복의 현실적 과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매일 나의 음식 질서, 운동 질서, 사유 질서를 스스로 점검한다. 할 수 있는 대로 과도한 수치에 이르지 않도록 나를 조절하는 처방을 스스로 내린다.
나와 세계는 여전히 아프다. 복구도 요원하다.
그러나 이 아픔은 역설적으로, 돌봄을 멈추지 않으려는 생의 신호다.
나는 오늘도 어둠의 고요에 기대어, 검은 안식의 평화를 배우며 산다.
그 평화의 터 위에서 우리는 비록 완벽한 복원이 아니라도, 재발저지를 위한 숭고한 공동 투쟁을 이어간다. 더 악화하지 않는 세계를 함께 지탱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