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터 벤야민의 역사 이해에 기대어
대림절의 재정의: 기다림 너머 준비함의 계절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이기만 할까. 성탄절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시간이 흘러가고,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얹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기다림의 반복은 자주 지루함이 되었고, 그 기다림 끝에서 해마다 비슷한 것이 주어질 때, 결국 무기력만 남는 일이 많았다. 시간의 반복은 익숙함이 되고, 익숙함은 새로운 것이 끼어들 여지를 자주 줄인다. 이 익숙함에서 일어나는 몸과 사유의 관성은 과거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에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새 도전에 취약해지는 역설이 생기고, 그 역설은 신앙의 절기에도 스며든다. 어쩌면 대림절은 점점 더 ‘나이만 들어가는 의식’인지 모른다. ‘기다림’이라는 주제만 붙잡고 있는 사이, 정작 그 과거 사건의 숭고한 가치가 닳아버리는 것 같아 고민이 깊어졌다.
분명 대림절은 달력 위에 표시된 약속 날짜가 오기까지 그저 왔다 갔다 하는 반복 운동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대림절은 ‘기다림’이라는 말만 거의 의미 없이 순환하고 있다는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그래서 나는 이 절기를 ‘기다리는 마음가짐’으로만 두지 않고, 그 기다림이 품고 있는 과거 시간과 사건의 의미를 더 깊이 성찰해보려 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그 성찰을 견인해 줄 언어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두 개의 개념을 붙잡게 되었다.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와 발터 벤야민(Walter B. S. Benjamin)의 역사 이해, 곧 메시아적 시간이다.
쉬클로프스키는 앞선 글에서 다뤘기에, 이제 나는 벤야민의 개념을 대림절에 접목해보려 한다. 그 결과 아직 투박하지만, 대림절이 거룩한 아이의 탄생을 ‘맞이하는’ 시간이기보다, 그 탄생이 열어젖힐 새 역사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성탄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앞두고, 마치 산모가 출산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시간과 같았다. 이는 내 몸으로 다가올 역사를 직접 준비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이렇게 말하려 한다. “대림절은 그저 기다림을 통해 과거 사건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절기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찌르는 시간의 송곳 같은 절기다.” 다시 말해 다가올 탄생과 그 뒤를 잇는 새 역사를 준비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을 다시 깨워 지금-여기에 재배열하는 의식이다. 고착되어 버린 그 사건을 내적으로는 자기 성찰로, 외적으로는 오늘 우리 시대에 흩어진 가치판단을 흩어모아 재정렬하는 일로 수행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탄생의 날짜’를 기다리며 과거를 해마다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의례로 환원될 수 없다.
벤야민의 역사 이해: 과거 ‘위험’, 현재 재배열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최성만 역,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 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도서출판 길, 2008), 340.]
나는 이 문장 속에서 두 가지를 본다. 하나는 역사가 과거를 ‘원형대로 되돌리는 복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승자의 이야기에서 구출해, 현재의 시간 속에 흩어모아 재배열하는 일이 곧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점이다. 과거는 박물관 진열장 속에 안전하게 누워 있지 않다. 과거는 오히려 위험의 순간에 번개처럼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번개는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벤야민에게 역사는 ‘그때는 그랬다’로 마무리되는 설명 반복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숨을 멎게 하는 호출이며, 재배열이다.
네 가지 성격: 재배열·전복·지금 시간·저항
벤야민의 이 관점을 나는 네 가지 성격으로 정리해서 이렇게 읽는다.
첫째, 과거는 현재에 재배열된다. 역사는 보관이 아니라 배열이다. 배열이 바뀌면 의미가 바뀌고, 의미가 바뀌면 책임의 방향도 바뀐다.
둘째, 승자의 연대기는 패배자의 시선으로 뒤집혀 읽힌다. 연대기의 매끈한 직선은 금이 가고, ‘당연했던 이야기’의 이음매의 속성이 드러난다.
셋째, 그 균열 속에서 ‘지금시간(Jetztzeit)’—메시아적 시간의 문이 열린다.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고 삶을 찌른다. 멈칫한다. 그리고 그 멈칫함이 삶에 결단을 요구한다.
넷째, 예술과 문화는 그 재배열의 장에서 정치적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장식으로 소비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세계의 익숙함을 찢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
이 네 가지가 나의 대림절을 그저 기다림에서 ‘준비함’으로 전환해 준다.
성탄 의미의 재배열: 궁정 아닌 말구유, 승리자가 아닌 땅의 사람
이런 점에서 보자면, 성탄이라는 사건은, 오늘날 우리 삶에서 재배열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날 것이다. 승리자의 시선에서 패배자, 곧 땅의 사람의 시선으로 옮겨가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성탄의 첫 무대는 궁정이 아니라 말구유다. 첫 등장인물은 왕이 아니라 어린 아기다. 첫 시간은 대낮이 아니라 밤이다. 첫 청중은 도시의 귀족이 아니라 들판의 양 떼 곁에 있던 목자들이다. 별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길을 잃은 시대의 임시 표지였고, 천사들의 노래는 권력의 궁정이 아니라 변두리의 공기를 흔들었다. 점성술사들의 방문조차 제국의 의전이 아니라, 중심을 불안하게 만드는 낯선 경로였다. 무엇보다 그 사건의 곁에는 헤롯왕에 대한 경계가 있고, 피난길이 있다. 탄생은 탄생으로 끝나지 않고 곧바로 도망과 이주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이 서사의 이러한 구성요소들은 예수의 탄생이 하나같이 빛나는 승리의 전개가 아니라, 밀려난 자리에서 시작되는 생존의 시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성탄이 승리자의 연대기처럼 기념만 하려는 높은 자리에서 땅의 세계로 하향하는 것을 당연하다.
대림절의 위험: 기다림의 익숙함, 그리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음’
대림절은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날짜를 줄여가는 계산표가 아니다. 한 계절의 끝을 장식하는 불빛 의식도 아니다. 대림절은 그 탄생 사건이 품고 있는 낮은 자리의 감각—말구유의 차가움, 밤의 무게, 들판의 적막, 권력의 공포, 피난길의 서늘함—을 오늘의 시간 속으로 다시 옮겨오는 일이다. 그때 비로소 과거 사건은 박제된 이야기에서 풀려나 지금-여기를 찌르는 송곳이 된다.
그렇다면 대림절이라는 시간이 가진 가장 큰 위험은 무엇일까. 바로 ‘기다림의 익숙함’이다. 동시에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역설이다. 성탄을 향한 역사의 문이 열려 있는데도 아무도 그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그 문을 ‘역사의 정문’이 아니라 ‘축제장의 뒷문’ 정도로 가볍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문과 상관없이 어디로든 들어가 널려진 장식과 풀어진 여흥으로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즐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어쩌면 우회하며 즐기기에 더 바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시간’의 효과: 내적 자기 성찰, 외적 가치의 흩어모음
이처럼 벤야민에게 역사는 과거를 안전하게 보관해 두고 때가 되면 꺼내 보는 사건 박물관이 아니다. 역사는 오히려 어느 순간, 과거가 현재를 향해 순식간에 번개처럼 뛰어들어 파고드는 지금-여기의 균열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역사 시간은 연대기적으로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카이로스의 순간이며, 삶이 결단을 요구받는 사건이다. 그는 그 결단해야 할 순간을 ‘지금시간’이라 불렀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시간의 강은 늘 앞으로 흐르는 것 같다. 그것은 대체로 승리자의 시선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가만히 관찰해 보면 어떤 날은 고요한 강 한복판에서 물길이 솟구치는 일이 있다. 여울목이다. 흐름은 멈칫하고, 튀어 오른다. 벤야민에 따르면 과거의 사건이 여울목처럼 현재의 보수적 관성을 깨뜨릴 때, 비로소 역사의 가치가 살아난다. 과거가 느닷없이 “이것이 너에게 옳은가?” “지금 이것이 너에게 진실인가?”라고 묻는 순간. 그 질문이 도착하는 자리에서, 과거는 더는 흘러가며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나의 인습을 찔러 균열을 일으키는 ‘지혜의 송곳’이 된다.
그래서 나는 대림절을 내 삶에 다시 배열해야만 한다. 이 절기는 승리자의 위치에서 과거를 ‘현재화’하는 습관적 의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패배자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현재—신이 어둠 속으로 갇혀버린 세계—그 세계의 책임을 일깨우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각성’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성탄의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이야기를 익숙한 방식으로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승리자의 서사로 매년 반복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 습관에 길들여진 몸은 과거를 재현할 뿐, 자신 안에 일어나는 균열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벤야민의 시간 감각, 과거 역사 이해는 이런 관습적 반복을 성찰하게 한다. 그의 관점을 빌리면, 해마다 돌아오는 대림절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습적 기억의 관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일이다. 과거 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깨워 내 삶의 자리에 재배열하는 일이다. 고착된 기준과 판단을 흔들어 새 역사의 문턱에 설 준비를 하게 한다. 내적으로는 마음의 자세를 다듬고, 외적으로는 우리 시대에 흩어진 가치판단을 흩어모아 다시 가늠한다. 그래서 대림절은 ‘기다림’이 아니라 ‘준비함’이다. 기다림이 시간을 견디는 일이었다면, 준비는 시간을 역사의 사건으로 맞이하겠다는 의지다.
네 분할과 검은 안식: 대강·대탐·대시·대관, 그리고 멈춤의 윤리
이 준비를 나는 네 개의 말로 다시 쪼개어 불러왔다. 대강(待降), 대탐(待探), 대시(待視/待時), 대관(代觀)이다. 이 말들은 과거 사건을 재현하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 사건이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도록, 내 삶의 방식을 재배열하는 네 가지 시선이다.
대강(待降)은 내려올 것을 받기 위해 감각을 정돈하는 일이다. 나는 종종 너무 많은 소음 속에서 오심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감각이 과포화 상태일 때가 많다. 대강은 과포화를 멈추는 일이다. 덜 보고 더 깊게 보고, 덜 말하고 더 정확히 듣는 일이다. 이때 ‘내려옴’은 설명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대림절은 하향의 절기다.
대탐(待探)은 별이 사라진 시대의 탐색이다. 지도 위의 길이 아니라 관계의 자리로 향하는 길 찾기다. “어디에 오시는가”라는 질문은 곧 “지금 누구 곁에 오시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말구유는 낭만이 아니라 밀려난 삶의 자리다. 대탐은 그래서 낭만이 아니라 윤리다. 대림절은 탐색의 절기다.
대시(待視/待時)는 보는 법을 바꾸는 일이다. 보는 법이 바뀌면 시간이 바뀐다. 내가 무엇을 사건으로 인정하느냐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을 찍는다. 셔터는 순간을 보존하지만 동시에 묻는다. “너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프레임은 세계를 잘라내지만 동시에 고백한다. “나는 이것을 구원하고 싶다.” 대시의 시간은 오늘을 사건으로 읽는 법을 훈련한다. 대림절은 시선의 절기다.
대관(代觀)은 대신 바라봄이다. 내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현재를 심문하는 시선이다. 타자는 바로 예수의 시선이며, 하늘의 관점이다. 그 본래 관점은 지금 여기에서 사라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 말할 기회를 빼앗긴 목소리를 대신 들어주는 일, 시스템의 말로 가려진 고통을 다시 인간의 말로 번역하는 일 등이다. 그러니 이 대관이 없으면 대림절은 하늘의 사건이 개인적 경건으로 축소되기 쉽다. 대관이 시작되면 대림절은 현재를 향해 날이 선 예언자가 곳곳에서 등장해야 한다. 대림절은 그 대행자의 절기다.
한편, 이 네 가지 시선을 지탱하는 바닥이 내게는 검은 안식이다. 검은 안식은 환한 해답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상처로 남겨두는 용기다. 누구의 고통을 내 위로로 정리해버리지 않기 위해, 잠깐 멈추는 윤리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경험한 사람이 스스로 감내하는 침묵이다. 이 멈춤이 없으면, 대림절은 곧장 축제장의 불빛으로 휩쓸리고 만다. 그러나 멈추면, 현재가 두꺼워지고,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대림절은 행동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응답 가능성을 요구한다. 특히 시대에 응답하지 않는 경건은 타인과 이 세계를 더 고립무원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그래서 대림절의 첫 실천은 ‘정답’이라는 옳은 말 하기 습관의 답습과 멀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응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제의 오답이 오늘의 정답일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자기 곁에 내어줄 자리를 만들고, 말을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달려보는 의지를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또한, 대림절에 겪는 사건은 ‘큰 일’만이 아니다. 미미한 일이라도 그 ‘질이 바뀌는’ 것이면 충분하다. 한마디 말이 달라지고, 눈앞의 시선이 달라지고, 단 1초라도 그 시간 감각이 달라지는 일이다. 그 작은 변화는 지금 여기에서 거대한 세계를 떠받치는 토대가 된다.
대림절의 종교정치적 의의: 과거가 찌르는 현재, 삶의 방식 변화
대림절은 어제와 같은 오늘을 다르게 살아내는 방식이다. 미래로 빨리 달아나는 절기가 아니다. 오늘이 오늘로 지나가 버리려는 바로 그 순간, 잠깐 멈칫하게 하는 여울목 사건이다. 과거는 끝나지 않았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둘이 합쳐지면 ‘지금 여기’에 손을 얹는 순간이 살아난다. 벤야민이 말한 현재는 그런 순간이다. 그러니 대림절은 과거 회상이나 내일 전망에 기대어 그저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라, 오늘을 견디며 준비하는 삶의 방식으로 나의 삶의 결을 달라지게 하는 절기다.
이 대림절은 오늘 내게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리고 더 날카롭게 묻는다. “너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게 만들고 있는가.” 대림절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의 층을 겹겹이 쌓아가며 현재를 두껍게 만든다. 그 두꺼운 현재 안에서 나는 더 이상 과거를 습관을 따라 쉽게 지나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에 붙들려(까르페 디엠, carpe diem의 수동형) 다시 살아낸다. 대림절은 바로 그 다시 삶의 사건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정리하자면, 대림절은 달력 위의 특정 구간이 아니다. 기다림이라는 말로 시간을 가볍게 소비하는 절기도 아니다. 과거 사건이 승리자의 연대기 속에서 굳어버리지 않도록, 그 파편을 구출해 오늘의 삶 속에 흩어모아 다시 배열하는 시간의 역사다. 그것은 내 안의 습관을 찌르고, 우리 시대의 판단을 재정렬하라고 호소한다. 그러니 이 절기는 단지 ‘축제장의 입구’가 아니라 ‘역사의 문’이다. 이율배반적으로 열려 있는 그 문 앞에서, 나는 우회하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러나 대림절은 우회하는 절기가 아니어야 한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절기의 가장 큰 위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정문으로 들어가려 한다. 기다림이 아니라 준비로. 반복이 아니라 재배열로. 장식이 아니라 각성으로 말이다. 그 준비의 바닥에는, 나의 검은 안식—서둘러 끝내지 않기 위해 멈추는 용기가 놓여 있다. 그 용기 위에서 오늘 나의 대림절은 지금-여기의 사건이 된다.
변동불거: 교회의 인습 너머로
끝으로 한 가지 성찰을 덧붙이려 한다. 이 대림절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결국, 내가 속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현실에 지금 더 절실하다. 2025년 <교수신문>이 선택한 사자성어 “변동불거(變動不居)”는 말 그대로 변화는 머물지 않는다는 세계의 결을 드러낸다. 그러나 문제는 변화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변화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는 점이다. 나는 그 상실의 이름을 ‘인간 유한성에 대한 자각의 마모’라고 부른다.
한국 사회는 속도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그 미덕은 오랫동안 효과가 있었다. 우리는 쉼 없이 달리며 눈부신 성취를 쌓았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것을 잃었다. 관계의 느린 시간, 슬픔과 애도의 체류, 약자의 호소, 그리고 “잠깐 멈추자”라는 윤리를 상실했다. 변화가 가속될수록 우리는 더 빨리 적응하려 했지만, 더 깊이 성찰하지는 못했다. 변화에 가장 능숙한 사회가 변화의 대가를 가장 조용히 치르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시대를 발전시키며 인간이 유한하다는 자각을 거의 망각했다.
교회와 신앙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더 취약하다. 교회는 ‘오심’을 말하면서도 그 오심을 종종 일정표로 바꾼다. 대림절은 조용히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연말 프로그램의 도입부가 되고, 기다림의 언어는 강화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찾아 나서지도 않는다. 변동불거의 사회에서 교회마저 속도를 따라가는 데만 몰두하면, 대림절은 응답이 아니라 응급 대처가 된다. 그리하여 대림절은 더더욱 “탄생의 날짜를 기다리며 되풀이하는 의례”로 환원된다. 기다림이라는 경건의 언어는 포장지가 되고, 기다림이 요구하는 응답과 관찰과 탐구의 책임은 사라진다. 인간의 존재 이유가 거룩한 존재를 따라 유한한 생을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탄을 기쁨의 탄생 절기로만 인식하는 데에서 일어난다. 그 기쁨이 준비를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이 절기에 교회마다 붙어있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문구는 아름답지만, 지금도 땅에서 그치지 않는 무례한 폭력과 비인간적 인종 배척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그뿐인가. 성탄절 오전이 지나면 그토록 기다렸다는 예수의 삶을 뒤따르는 일을 바람보다 더 빠르게 망각해 버릴 때가 많다. 성탄절 기념 헌금도 더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돈이 과거의 낮은 자리가 오늘 높은 곳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교회의 삶을 덜컥거리게 한다는 것에 무감각하다.
그래서 나는 대림절의 새로운 이해를 나와 세계, 교회라는 구조에서 붙드는 것이다.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대림절을 기다림에서 준비함으로, 달력에서 사건으로, 장식에서 각성으로. 변동불거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잘 적응하는 기술”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기준을 잃지 않는 준비로 재배열한다. 이처럼 대림절은 그 사라진 기준을 나의 삶에 다시 세우는 재구축의 시간이다. 내적으로는 무뎌진 감각을 되살려 자기 성찰로 들어가고, 외적으로는 시대에 흩어진 가치판단을 흩어모아 재정렬하는 시간이다. 그 준비가 없으면, 우리는 변화를 따라가면서도 계속 길을 잃는다.
결국, 대림절은 내게 묻는다. 너는 어디에서 멈추고, 무엇을 붙들 것인가. 무엇을 위해 멈추고, 누구를 위해 움직일 것인가. 그리고 더 날카롭게 묻는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며, 어디서 나를 찾고 있는가.”
종결: 기다림에서 준비함으로
변화는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 변화는 머물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서두르지 않겠다
대림절은
달력의 습관이 아니라
과거의 송곳으로
오늘을 다시 배열하는
준비의 윤리다
말구유의 차가움
밤의 무게가
내 판단의 속도를 늦출 때
나는
기다림을 반복하지 않고
멈춤으로 준비한다
지금
여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