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17. 갯벌 십자가-시작노트

by 푸른킴

걸어서 건널 수 있을까

뛰어가는 석양 앞에 몸만,

질퍽대면서도

쓰러지진 않은

지난 세월ㅡ


두발로


배경

한국을 떠난 지 25년. 이민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친구가 잠시 귀국했다. ‘귀국’이라는 말은 늘 반갑지만, 오래 떠난 사람에게 그 말은 단순한 귀환이 아니다. 반가움의 온기와, 곧 다시 떠나야 한다는 냉기가 같은 시간에 붙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머무는 틈을 쪼개 서울 근교의 어느 식당에서 다른 분과 함께 셋이서 점심을 먹었다. 오랜 시간 쌓아두었던 근황을 천천히 꺼냈다. 말은 많았지만,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침묵도 있었다. 오래 버틴 사람들끼리는 그런 침묵을 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서로의 얼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끝자락에서, 그의 앞에 새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반복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일을 병행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는 조용히 말했지만, 그 말 뒤편이 무겁다는 걸 나는 알아차렸다. 그 무게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책임의 무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한번 몸으로 버텨야 하는 사람에게서만 나는, 그 특유의 낮은 긴장감이었다. 그는 곧 출국했고, 새 시작의 무대는 병원이 될 것이라 했다. 병원이라는 단어에서 온갖 표정이 섞여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기대, 부담, 결심, 그리고 조금의 떨림까지.

이번 귀국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 물었을 때, 친구는 서해안을 돌아본 여행을 말했다. 그중에서도 서천 갯벌을 유독 인상 깊게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갯벌에서 십자가가 보였다는 것이다. 남이 들으면 우스갯소리로 흘릴 말이겠지만, 평생 신앙을 붙잡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그런 작은 상징 하나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유치함이 아니라, 오래 버틴 사람에게만 남는 민감함 같은 것이다. 끝까지 남는 감각. 세상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 남겨둔 마지막 촉수 같은 것이다.


그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와서 나는 그 사진을 보내 달라 했다. 그의 지난날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앞으로 펼쳐질 날에 대한 기대도 작지 않았기에 말 대신, 사진 위에 시 한 편을 얹어 보내고 싶었다. 마침 대림절 즈음이었다. 기다림과 떠남이 겹치는 계절이라서인지, 그 사진이 내 마음에 더 깊게 들어왔다. 대림절은 성탄을 기다리는 달력의 한 칸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늘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의 걸음을 다시 세우는 절기였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 동시에 ‘기다림의 문턱’에 서는 사건이다. 별이 사라졌다고 말해놓고도 우리는 여전히 표식을 찾는다. 다만 그것이 별이 아니라, 때때로 진흙 속에서 발견되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십자가는 종교적 장식의 티를 벗어났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겠다고 다짐한 사람에게는, 나그네 삶의 표식으로 정착했다. 나는 그 표식을 유난히도 그 진흙탕 속에서 다시 읽고 싶었다.


사진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서해의 어느 갯벌, 해가 질 무렵에 찍은 풍경이다. 사진 상단에는 해가 기울며 뿌리는 노란빛이 그윽하게 퍼져 있다. 사진은 그것을 사선으로 배열했다. 색조는 하루의 마지막 화려함이 한 번 더 타오르는 순간을 잘 포착했다. 그 빛은 누구의 삶도 잠깐은 예쁘게 만들어준다. 누구라도 그 노을 앞에서는 멈춘다. 그리고 보통은, 그 멈춤이 감탄으로 끝난다.


그런데 그 순간, 친구의 시선은 발밑으로 내려갔다. 물이 빠지자 여러 갈래 물길이 드러났고, 그 사이로 바닥에 박힌 나무 표식들이 나타났다. 물이 덮여 있을 때는 길이 없었고, 나무들만 물속 바닥에 숨겨진 채 박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물이 빠지자 그 표식들은 십자가 형태로 드러났고, 그것도 한편으로 조금씩 기울어 있었다. 왼편에는 작은 십자가들이 몇 개 나란히 리듬처럼 서 있고, 화면 아래에는 더 크고 뚜렷한 십자가 모양 하나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붙잡는다. 마치 여러 개의 작은 표식들이 ‘이쪽’이라고 속삭이고, 마지막 큰 십자가 하나가 ‘여기’라고 못 박는 듯하다.

갯벌 한가운데의 그 십자가는 버려진 것인지, 의도적으로 박힌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물속에서 파도와 풍화에 수없이 깎여 마른 몸뚱이만 남은 채 서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휩쓸려 가지 않으려 무언가를 버티려 했겠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검은 갯벌 늪으로 흐르는 대로 침잠하려는 뒷모습처럼 보인다. 오래된 것들은 다 그렇다. 오래 버틴 것들은 끝내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길을 따라 스스로 내려간다. 그런데 그렇게 남아있는 과거들은 그 곁을 그저 지나가려는 사람에게 넌지시 질문한다. ‘그 길을 잘 걷고 있는지?’라고.


사진 대부분을 흑갈색 갯벌이 차지하고, 물길은 간간히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그 반짝임은 오래가지 못한다. 멀리 석양은 오래된 갯벌을 금빛으로 덮어주지만, 그 금빛은 이내 바다 뒤로 빠져버린다. 아마도 사람이 지나온 시간도 그렇게 스쳤을 것이다. 어떤 시절은 찬란했고, 어떤 시절은 검었다. 그러나 둘 다 너무 빨리 지나갔다. 물 빠진 자리에서는 길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모든 길이 걸을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길 앞에서 오히려 말을 거두고 먼 시간을 응시한다.


왼편의 작은 십자가들이 만든 리듬과, 아래의 큰 십자가 하나가 만든 무게가 동시에 갯벌 위를 가득 채운다. 석양은 서둘러 저물고, 하늘은 어두워지고, 물길을 드러낸 땅은 질퍽하다. 그리고 진흙탕 속 십자가 앞에 내가 있다. 이제 그 풍경은 곧 나의 시선이 된다. 나는 끝까지 걸어가야 할 길을 계산할 수 없다. 그래서 다만 묻는다. 나는 오늘 이 저녁에, 내 두 발로 이 갯벌을 지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친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가 지금부터 건너야 할 시간은,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표정의 갯벌일 테니까.


이 십자가와 갯벌의 조합은 삶의 비명이 잦아드는 자리, 생의 소란이 멎는 자리처럼 보였다. 나는 그 고요를 다시 ‘검은 안식’이라 불렀다. 빛으로 치장한 평안이 아니라, 질퍽한 세계에서 더는 소음이 나오지 않도록 잠잠해지는 평안이다.


시어

내 시어는 사진의 저자인 친구의 심정을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 이 시어는 전적으로 나의 상상과 우리가 나눈 말에 기대어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는 이 사진을 찍는 순간, 지난 이민 생활의 고달픔—영주를 위해 하루 한 끼, 1달러 버거로 버티던 시간들—이 스쳐 갔을 것이다. 동시에 앞으로의 길에 대한 두려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회환과 미래의 불안 사이에, 물속 풍상을 겪고 낡아버린 저 십자가가 서 있었다. 나는 그 십자가 앞에서 그의 마음을 대신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이 말을 남기고 싶었다.


“걸어서 건널 수 있을까”: 갯벌은 쉽게 걸을 수 없는 땅이다. 비옥하지만 몸은 그 비옥함을 누리지 못한다. 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질문은 가능성을 묻는 말 같지만, 실은 불가성을 견디기 위한 자기 다짐에 가깝다. 지나온 세월이 몸에 기억되었다면, 다가올 시간도 그 몸으로 지나갈 수 있으리라는—그 희미한 용기를 되묻는 질문이다. 나는 지금도 건너는 중이면서, 동시에 제자리에 빠지는 느낌을 받는다.


“뛰어가는 석양”: 더딘 걸음과 달리, 석양은 속절없이 저문다. 눈 돌릴 틈도 없이 바닷속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가 지나온 25년의 세월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았던 길이, 한 걸음도 쉽지 않은 진흙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석양은 기다려주지 않고 내달리고, 그는—나는—허우적거린다. 그래도 한 발, 두 발, 힘껏 내딛으려 한다. 갯벌에서 걷는다는 건 대개 멋진 전진이 아니라, 이런 허우적거림을 견디는 일이다.


“몸만,”: 그렇다. 끝까지 남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뜻도 결심도 다짐도 하루아침에 흔들린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생존의 실감은 몸 하나다. 나는 쉼표 하나를 남겨, 그 몸이 잠깐 빠지고 멈칫하는 순간을 표시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도, 몸은 끝내 나와 함께 남는다. 그리고 남아 있는 몸은,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질퍽대면서도 / 쓰러지진 않은 / 지난 세월—”: 이것은 친구에게 남기는 헌사이자, 그의 사진과 이야기에 대한 나의 소박한 평가다. 승리의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가 이 질퍽한 시대를 쓰러지지 않고 건너왔다는 사실이다. 수없이 넘어졌겠지만, 끝내 무너져 눕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의 대시(—)는 그 여운이다. 갯벌처럼 끈질긴 삶의 질곡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제 새길을 향해 내딛는 한 번의 숨처럼 남겨 둔 여운이다.

“출 / 두 발로 / 저 / 녁”: 이 배열에는 두 겹이 있다. 하나는 시각적 구조다. 세로축에 ‘출-저-녁’을 두고, 그 사이를 가로로 ‘두발로’가 가로지른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선언이다. 새로운 출발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에 일어난다는 나의 생각이 들어있다. 날아오름도 도약도 아니다. 그저 두 발로,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다. 석양이라는 하루의 끝에서, 아침처럼 시작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십자가의 형상이다. 사진 속 십자가 옆에 글로 세운 십자가는 곧 우리의 결단이다.


의도

나는 이 디카시에서 ‘길을 걷는다’라는 말을 다시 새기고 싶었다. 걷는다는 것은 두 발로 몸을 지탱하며, 한 걸음씩 균형을 잡는 일이다. 문제는 그 길이 번듯한 도로가 아니라 갯벌이라는 점이다. 삶의 길은 대개 이런 진창길이다. 그러니 ‘건너간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어가는 일이 아니다. 질퍽함을 견디고, 끝내 쓰러지지 않아야 가능하다.


나는 친구가 타국에서 버텨온 지난날이 바로 이 고단한 걷기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한다. 석양은 뛰어가며 저무는데, 인간은 겨우 한 걸음을 내딛는다. 마음은 달리고 싶고 능력도 있지만, 길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몸만,” 남는다. 그리고 끝내 그 몸으로, 두 발로, 저녁에 다시 출발한다. 걷고 멈추고 걷는 이 과정이 곧 삶의 시간이다.


갯벌에 박힌 나무를 십자가로 읽는 일은 개인의 성향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자기 고백으로 받아 적는 일은—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아무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내게 십자가는 종교적 장식이 아니라 나그네 삶의 표식이다. 어디서 넘어졌고, 어디서 버텼고, 어디서 다시 일어섰는지 말없이 증언하는 표식이다.


더 깊이 말하자면, 이 갯벌은 고통을 ‘승화’하는 자리가 아니라 고통과 함께 걷는 검은 안식의 토포스다. 소음마저 사라지고 멈추는 자리다. 십자가는 오랜 세월 바닷물과 함께 갯벌에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서서히 삭아 갈 것이다. 그렇게 마침내 갯벌과 십자가가 한 몸이 되는 순간, 삶의 필사성—모든 것이 가루로 돌아가는 기억—이 조용히 완성된다. 그때 의지는 수직으로 내려오는 은총과, 수평의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평화가 만나는 자리에 선다. 나는 이 사진에서 그 만남을 보았고, 이 디카시로 기억에 잡아두고 싶었다.


대림절은 늘 그런 식으로 온다. 성탄을 기다리는 종교 달력의 한 칸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 동시에 ‘기다림의 문턱’에 서는 사건으로 온다. 별이 사라진 시대라 말해놓고도, 우리는 여전히 표식을 찾는다. 다만 그것이 별이 아니라, 때때로 진흙 속에서 발견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표식은 늘 반짝이지 않는다. 진흙에 박힌 오래된 나무 조각 같다. 오히려 눅진하다. 낮다. 그러나 낮은 표식이야말로, 사람을 살린다.


정리

나는 이 디카시에 〈갯벌 십자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솔직히 고민이 있었다. ‘십자가’는 상징이 크고, ‘갯벌’은 공간 자체가 감정을 과잉시키기 쉽다. 그런데도 이 사진 앞에서 나는 십자가라는 익숙한 상징을 다시 새롭게 이해해보고 싶었다. 진흙탕에 처박힌 십자가는 현실적이다. 공중 높이 떠오른 십자가보다, 저 내려앉은 십자가가 더 인간답다. 저 가라앉는 모습이 십자가의 본질이라고 말하면 과도할까.


갯벌에 박힌 십자가는 하늘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 땅에 심긴 하늘 지혜의 못이 된다. 그리고 그 못 곁에 “몸만,”으로 버틴 “지난 세월—”이 남는다. 내게 쉼표와 대시는 사진의 물성을 언어로 옮기는 가장 절제된 장치가 되었고, 마지막 배열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십자가 곁에 조용히 서 있는 헌사가 되었다.


내가 영원의 시간과 함께 건너고 있는 이 대림절은 단지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라, 지난 과거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올려 삶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두 발로 함께 걷는 절기다. 누군가의 걸음이 질퍽한 갯벌을 지날 때, 우리도 별 대신 십자가를 따라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 옆에서 조용히 자신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오늘도, 두 발로, 해 지는 저녁에 다시 출발하자고.


이제 그는 다시 출국했다. 새로운 시작은 병원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시작을 위해 떠나는 발걸음이 그 몸과 두 발로 강건하기를 기도한다.


이 디카시를 그에게 보냈다. 이제 이 작은 시와 사진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하나의 조용한 출사표가 되길 바란다. 어디서나 삶은 치열한 전장일지라도, 잠시 비켜서 각자에게 필요한 ‘검은 갯벌’—고요하고 깊은 안식의 공간—을 기억하며 잠깐 쉬어 가면 좋겠다. 결국,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더딘 걸음을 내딛는 일은 고달프다. 그 힘겨운 일의 끝에 죽음과 소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만은 아니다. 고단한 항해를 마친 배가 닻을 내리는 따뜻한 항구일 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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