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아래 삼 형제
모양도 제각각
오랜 세월 한자리
모처럼 가족사진
붉은 신호등 사진사
"찰칵“
배경
내가 사는 도시는 큰 산이 품어주는 모양이다. 평소 사람들이 자주 오르고 내려 아주 친근한 길들이 곳곳에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산에 대한 나의 추억 중 겨울 산 눈 내린 풍경이 선명하지 않았다. 분명 폭설도 자주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눈 덮인 설산의 아름다움에 관한 기억이 아예 없다. 그러다 지난 일요일, 아이들과 함께 도심을 빠져나가다 커피를 주문하려고 차를 세웠다. 잠시 쉬는 중, 문득, 멀리 떨어졌지만 바로 앞에서 보는 듯, 그 눈 덮인 산이 내 앞으로 밀려왔다. 머뭇거리지 않고, 사진을 찍으려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데 프레임 속에 들어온 풍경을 보니 재밌었다. 거기에 성당과 교회 건물이 산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늘 보던 건물들이지만, 오늘은 정겹다. 마침, 사거리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잘됐다 싶어 멀리서 얼른 사진으로 남겼다. 세 개의 건물은 모양도, 종파도 다르지만, 가족 같다는 생각이 우연히 스쳤다.
사진
차 안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사진을 줌으로 끌어당겼다. 화질은 다소 아쉽지만, 구도는 아주 맘에 들었다. 산을 사진 뒤에 큰 배경으로 잡았다. 사진 아래에는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으로 일부분만 담았다. 그리하여 산은 침묵하나 큰 품으로 아래 세 개의 첨탑과 도시의 물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품어주는 모습을 담아보려 했다. 정겨운 모습이 그려졌다.
이 사진은 크게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는 산자체의 풍경이다. 오랜만에 보게 된 눈 덮인 산의 풍경을 잘 담아보려 했다. 또한, 그 설산이 도시를 향해 시선을 내려주는 것을 상상했다. ‘위’로부터 아래로 말을 건네는 모습도 연상했다. 화면 대부분을 설산으로 담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산은 사진의 큰 배경이다. 그러나 이 눈 덮인 산을 그저 풍경으로만 소비되는 대상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이 사진은 산과 도시의 건물을 조화롭게 담았다. 이 둘이 어우러지게 하여 자신이 오래 간직해 온 모습을 서로서로 드러내놓는 자기 드러냄의 주체로 묘사했다. 특히 이들은 저 눈에 덮인 산속으로 지난 일 년, 사계절의 변화를 함께 목도한 친구들이다. 그들이 나누는 무언의 이야기 아래서 올해도 이 산과 도시는 함께 숨을 쉬었다. 평소 거대한 건물들이 오늘 이 사진에는 ‘사람 크기’ 정도로 보인다. 심지어 그 안에 함께 서 있는 세 개의 첨탑은 묘하게도 한 덩어리의 사람처럼 보인다.
이 건물들은 서로 다른 재질, 서로 다른 색, 서로 다른 높이를 가졌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 같은 얼굴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상하게 처음부터 거기에 그렇게 어울려 있던 것처럼 보인다. 산이 태고부터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이 첨탑들은 어느 일상, 도시가 시작된 이래 하나둘씩 모였다. 산은 영원의 시간을 보여주지만, 도시의 이 건물들은 그저 짧은 순간을 암시할 뿐이다. 이처럼 산과 건물들은 서로 다르지만, 이 사진 안에 잘 담겼다.
그런데 산과 그 건물 사이로 한 줄 붉은 신호등이 걸쳐있다. 그 순간, 흰 눈밭의 세계, 흰빛으로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듯한 산 아래 빨간색은 더욱 선명하다. 사진에는 담지 않았지만, 그 색 아래 모든 차는 멈춰 서있다. 신호등은 또한 저 산에 말하고 싶은 걸까 싶었다. 아니 그 아래 도시의 건물들에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잠시 멈추라’고.
시어
이 디카시는 다른 것들과 달리 제목부터 정했다. 시어를 쓰기 전부터 시어를 종합한 제목으로 ‘가족사진’을 떠올렸다. 자연이라는 사진관에 흰 산을 배경으로 도시의 건물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둘러 서 있는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저 삭막한 건축물들은 꽤 오랜 시간 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에게 저 건물들은 서로 오랜 세월 관계의 자리를 잘 지켜온 것이다. 따라서 이 시어들은 가족사진을 주제로 그 사진을 찍어가는 과정과 가족사진의 의의를 묘사하고 함의한다.
설산 아래 삼 형제/ 모양도 제각각/오랜 세월 한자리: 건물은 성당과 교회들이다. 처음에는 모두 진갈색 건물이 두 채, 흰색 건물이 하나였는데, 이제는 하나, 둘로 달라졌다. 하지만, 늘 서로 살갑게 지내는 모습처럼 보여 자연스럽게 ‘삼 형제’라는 말을 떠올렸다. 속은 어쩔지 모르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삶의 공간은 공유하는 이들을 가족이라 한다면, 저 건물들은 그 자체로 가족이다. 삼 형제다. 생활감—다투고, 견디고, 닮지 않은 채 함께 살아가는 감각—이 그들 사이에 풍경처럼 스며있다.
모처럼 가족사진/붉은 신호등 사진사: 나는 이 풍경 피사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이해하자마자 이들이 가족사진을 찍는 것으로 상상했다. 특히 사진의 오른쪽 아래 선명한 붉은 신호등을 사진사로 의인화했다. ‘붉은 신호등 사진사’는 이 풍경을 지나치지 않는다. 하여 모든 풍경에 잠시 멈추라고 신호를 보낸다. 사진사가 무엇인가를 찍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필요하다. 사진사는 ‘멈추게 하는 자’이다. 신호등은 기다림을 강제하는 도시의 기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기다림’이 삶의 선물처럼 다가온다는 것도 일러준다. 초록색 불로 바뀌기 전 붉은색은 필연적이다. 도시의 삶은 이 규율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도시의 핏줄이고, 호흡이다. 이런 기다림이 없다면 장면은 쉼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고, 스쳐 지나간 것은 기억될 여지가 거의 없어진다. 사진 속 신호등은 창조세계에서는 창조주의 안식과도 같다. 전진과 멈춤의 교차, 위와 아래의 만남, 산과 도시의 한자리가 일어나는 것은 이 멈춤이 있을 때이다. 멈춤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삶의 제어장치라 할 만하다. 가족들이 한 장의 가족사진을 남길 방법은 뭘까? 아마도 자기 시간과 걸음을 잠시 멈춰 서서 한자리에 잠깐이라도 모이는 것 아닐까.
찰칵: 마침내 사진이 남겨졌다. 이 차가운 기계음은 사진사가 호흡을 멈추고, 손 떨림을 최대한 조심하는 찰나를 암시한다. 그 결과 따듯하게 풍경과 건물과 사람이 담긴다. ‘찰칵’은 역설이다. 차가움과 따듯함의 공존. 또한, 순간의 사건이 영원의 저장고에 들어갈 때 열리는 소리다. 그래서 경쾌하면서도 가볍지 않다. 그 소리는 소유하는 욕구가 아니라 환대하는 공동체의 나눔을 실어오기 때문이다. 눈 덮인 산이 보여주는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서 도시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와 너가 한 관계 아래서 가족처럼 한순간 한 장 사진에 남겨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실행해 보는 것이다. 가족사진이라는 순간의 영원을.
의도
이 사진의 서사는 산도, 도시 건물의 종교적 첨탑도 아닌 ‘잠시 멈춤’이라는 규칙이 주도한다. 나도 사진 속 그들처럼 멈춰있다. 그렇게 이 사진 속 피사체들은 이 땅 어딘가에서 무엇인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자기 길을 잠시 정지’ 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잠시 멈춰 서서 가만히 올려다보니 눈이 내려 산을 덮고, 그 아래 도시의 숭엄한 십자가 탑, 그리고 도로에 멈춰 선 차들, 그 틈을 조용히 걷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이 풍경이 인간의 삶의 한 단면 같았다. 그들은 그저 사물이지만, 나는 무슨 이유인지 그들에게서 우리 시대의 어떤 가족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가족사진’ 한 장 남길 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 디카시에서 나는 가족을 다시 정의하려 했다. 가족이란 사람들만의 고유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진’에 담기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가족이 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그런 기능을 한다. 프레임 안에 담긴 것들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며, 이는 무엇이 가족으로 선택되고 배제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프레임 안에서 모든 피사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내더라도, 현실의 프레임 밖에서는 모두가 실제 가족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반추해보고자 했다.
가족이라는 의미는 사람마다, 사회마다, 시대마다 달라진다. 심지어 ‘가족처럼’은 가끔 함부로 대한다는 역설적 의미로 비난받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가족이 ‘닮아가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이점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가족은 신비한 관계이다. 하나의 아름다움에 갇혀 동일성만을 추구하는 미화된 공동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지만, 가족은 ‘다르면서 같은 관계여야 한다’라는 불편한 정직함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마치 저 설산 아래 세 건물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디카시는 설산과 도시라는 차가운 사물을 통해 따듯한 가족의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들은 ‘오랜 세월 한자리’에 있는 것으로 잘 드러날 수 있다. 가족은 단지 감정을 쏟아내고 저장하는 감성 집합체가 아니어야 한다. 그보다는 서로 자리를 지켜주는 질서와 조화의 윤리에 근거하는 것이 더 필요해 보인다. 오래된 시간의 관성이 무심한 듯 작동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또한, 가족은 알 수 없지만, 그 알 수 없는 이유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사람-사물’의 총합적 관계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가족은 따뜻한 감정의 교류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라는 시공간의 간극과 연결이라는 ‘공동체성’의 공유로 엮인 것들이라 말하고자 했다.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것은 감정 이전에 시간과 자리의 지속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진 속 설산과 그 아래 세 개의 건물은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다. 닮지 않았고, 추구하는 삶도 제각각이다. 아마도 사람이라면, 서로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오래된 자리의 지속이야말로 가족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일 것이다.
동시에 나는 ‘기다림’ 멈춤이라는 의미로 말하고 싶었다. 기다림은 종종 무능의 표정처럼 오해된다. 하지만 이 사진에서 나는 기다림이 안식하는 사건의 조건으로 이해했다. 붉은 신호 앞에서 누구든 멈춘다. 그 멈춤은 지켜야 할 규칙이다. 멈춰야 풍경이 ‘보인다.’ 멈추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눈에 다가오지 못한다. 그저 지나칠 뿐이다. 결국, 이 디카시에서 나는 가족사진으로 담긴 이들을 통해 가족이 서로 다른 채로 함께 자기 자리에서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최초의 단위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리
많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디카시를 정리하다 보니, 꽤 다행스러운 의미를 남길 수 있었다. 사진 자체의 작품성이나 시어의 문학완성도, 의도의 명확성은 조금 부족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렇게 이 디카시는 나의 사유를 한번 더 자극하는 데 유익했다. 특히 가족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동시에 나는 이 사진을 통해 ‘멈춤’의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과거는 현재의 멈춤을 통해 역사 속에서 재생된다. 이 점에서 과거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머무는 사건이 된다. 오히려 머물게 하는 사람이 존재할 때 과거는 역사 안에서 멈춘다. 따라서 ‘찰칵’은 그 멈춤의 순간을 알리는 신호음이다. ‘사진사의 순간’이다. 모든 사진은 사진사의 냉철한 ‘찰칵’으로 지난 과거를 따뜻하게 ‘멈추게’ 한다.
이처럼 이 디카시에는 멈춤의 의미가 재정립되어 담겼다. 설산의 흰빛은 아름다움이기 전에, 오래된 시간의 침묵이다. 그 침묵 아래, 작은 관계들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버텨왔다. 붉은 신호등은 방해가 아니라 사진사다. 멈춤을 통해 세계를 찍히게 한다. “찰칵”은 영원을 붙잡는 소리가 아니라, 영원 앞에서 잠시 주어진 순간을 받아 적는 겸손한 기록이다. 나는 이 한 장의 풍경을 ‘가족사진’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결국, 이런 고백에 가깝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삶 아래에서, 제각각인 채로 한자리에 오래 서 있던 존재였다고. 그리고 그 오래됨을 알아보게 한 것은, 늘 어떤 ‘빨강’—멈춤의 신호—이었다고. 바로 안식이었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디카시는 나에게 ‘멈춤’이 가족사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