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덕분에 감사합니다. 지난 9월부터 지금까지 부족한 글을 좋게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 해 끝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 더 건강하고 평안하게 보내시길 응원합니다."
0.
어쩌면 산다는 건 말야
지금을 추억과 맞바꾸는 일
온종일 치운 집안 곳곳에
어느새 먼지가 또 내려앉듯
하루치의 시간은 흘러가….
<심현보, 「늘 그대」 / 곡 성시경 / 노래 양희은, 성시경>
1.
허락받은 일 년치 낮과 밤이 하루 남았다.
서재의 차가운 공기에 왼쪽 종아리가 몸을 확 잡아끈다.
이제 몸도, 남은 날들이 지난날들보다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아쉬운 듯 아침부터 티백을 두 개나 꺼냈다.
날은 화창하다. 창밖 하늘이 바다 같다.
창을 열자 오히려 따뜻한 공기가 훅 밀려든다.
나의 서재도 힘겨운 시간이었을 테지만,
그래도 사계절을 음미하며 나와 함께 잘 지냈으리라.
정해진 원고 하나를 마감하고,
남은 일이 무엇이든
습관처럼 추억을 꺼내 만지작만지작한다.
2.
올해는 솔직히, 용의 머리를 잡았다가 뱀의 꼬리를 만난 해였다.
손수첩을 꺼내니 지난 9월 이후 빈틈이 많다.
하루 한 편 논문, 그 약속을 가을 들어 훌쩍 넘어간 날도 제법 있다.
무슨 이유인지, 습관처럼 써 내려가던 글들을
낯선 이방인 앞에서 설익은 관계를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짧은 글 몇 개를 끄적여 멈춘 날도 있다.
매일 단상을 적었던 수첩은 이제 햇수로 5년.
마지막 한두 장 남은 날들을 채우는 것으로 마무리해야겠다.
비록 내가 나의 유일한 독자지만,
이 글 속에는 나를 밀어가는 세월의 강이 도도히 흐르고,
나도 그 강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3.
강길 사이로 내가 오롯이 담겨 있다.
‘내 삶이 끝나면 누군가 읽어줄까?’
오지랖이다.
수첩 옆에 언제나 만년필이 함께 있어 준다.
이들 덕분에 손글씨가 즐거웠다.
잘 쓰지 않았던 펜들을 꺼내
펜촉을 가볍게 씻는다.
맘에 드는 잉크를 골라 가득 담아 준다.
다시 글자가 살아 나온다.
종이 위에 매끄럽게 얹힌다.
또 한 해가 간다.
그리고 이별의 속도는 대개, 손끝보다 먼저 향기에서 시작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만델링 원두를 받았다.
곱게 갈아 커피를 내려 막 컵에 담았다.
4.
지난주, 멀리 독일에서 공부하며 공무원으로 일하는 이가
휴가차 들어왔다고 연락을 주었다.
어느새 20년도 더 지난 추억이 어제처럼 스친다.
추억은 말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어떤 물컹한 것.
어릿한 시절의 이야기들을 굳이 나누지 않아도
살아온 삶을 다독여 주는 어떤 손길.
어제 일처럼 선명한 짧은 이야기들이 속 깊은 곳에 자리한다.
그래, 한 해가 끝나가면
해마다 비슷한 문장이지만 해마다 새로운 인사여야 한다.
몸은 멀고 마음은 가까운 이들 사이에
짧은 감사가 다리를 놓아
무심한 나의 삶이 한 번쯤은 그 감사로 씻겨야 한다.
5.
돌아보면
사람이 다독여 준 하루가 있고, 글이 다독여 준 하루가 있다.
어제저녁 서재에서 마지막 원고를 다듬는 동안
문득, 이 많은 글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내 삶의 저수지에 갇혀 맴돌다 끝나지는 않을까?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글을 꺼내
화석처럼 남기는 이유는 뭘까?
올해는 유난히, 여러 글 속에서 평소와 다르게
글 앞에서 치열한 내 모습이 엿보인다. 생경하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탓일까.
그래도 글에 담긴 표정을 보니
잘 지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읽어 준 이가 있고, 응원해 준 이가 있었다.
6.
글을 살피는 중에 예전
‘늘 그대’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늘 첫 가사가 유난히 찌른다.
“어쩌면 산다는 건 말야”
그래, 올해도 치우고 나면 다시 먼지가 내려앉을 테지….
그러나 그래도….
그렇게 올해 끝 무렵, 나의 ‘하루치’ 시간은 잘 흘렀다.
습관처럼 나도 나에게 인사를 남겨 둔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받아 챙긴 은혜와 같다.
비록 체감 못할 현실이라 해도
‘감사와 은혜’ 고백을 빼놓을 수는 없다.
또 나를 기억해 준 분들에게 인사를 남겨야 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손짓이 저에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다시 해가 저물고 또 해가 떠오르는
이 계절에 내 삶에 남겨진 문장은 결국,
‘덕분에 감사하다’는 것,
‘죽음은 삶과 함께 흘러간다’는 것.
두 해 전, 제주 사는 살가운 공무원 신 씨가 그려 준 그림
<2023. 12. 25 인사하는 사람들>이
오늘따라 더 새롭다.
인사할 기회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