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탄생과 죽음이 뒤섞인 날들의 추억

by 푸른킴

“이 죽음들은 올해 성탄절을 보내면서 마주한, 우리 삶의 가장 처절한 흔적들입니다. 죽음의 이유나 원인은 그것이 누구의 소멸이든 아무리 세심히 귀를 기울여도 온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죽음 그 자체보다 더 아픈 것은,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지난한 삶이 우리 사회에 깊은 고통의 파편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2023. 12. 27. 기록 중에서)


신의 섭리와 인간의 역설, 그 경계에서

꽤 오랜 세월 동안 성탄절을 뜻깊게 보내왔습니다. 부활절이나 석가탄신일도 그만큼의 무게로 다가왔겠지만, 유독 기억의 한 자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성탄절이 있습니다. 그즈음에 저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과 한 어른이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사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은 우리 곁에서 늘 일어나는 일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삶과 깊이 연결된 소중한 이들에게서 이런 상반된 소식을 한꺼번에 전해 들은 일은 제 생애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저는 탄생의 즐거움을 상상하며, 함께 나눌 선물을 고르는 일에 마음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암과 싸우며 희망을 일구던 친구의 아내가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몸이 보내는 아주 작은 신호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날에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찾아온 죽음을 막을 도리는 없었습니다. 어제까지 온기를 나누며 함께 잠들었던 이의 숨결이 멈춘다는 것은 어쩌면 삶과 죽음에 대해 누구도 자기 결정권이 없다는 인간의 유한과 희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에게는 ‘검은 안식’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잠들기 전까지 생생한 말을 주고받았던 삶이, 새벽 해가 뜨기 전 말 없는 주검으로 남겨졌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떠난 이는 삶과 죽음의 주권을 신의 지고한 뜻으로 믿으며 정성껏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은 어떤 예고도 없이 자신의 권한을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행사했습니다. 덩그러니 남겨진 가족들은 이 가혹한 처분 앞에서 화조차 내지 못한 채, 다시 삶과 죽음의 주관자에게 위로를 부탁합니다. 죽음을 허락한 이에게 다시 죽음에 대한 위로를 탄원해야 하는 이 모순적인 처지가 바로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문득 이 역설이 인간만 당하는 일일까 생각하다가, 신 또한 자신이 만든 이 모순된 세계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자기모순을 감내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대답 없는 질문만이 무성한 장례를 치르며, 저는 개념이나 언어가 불필요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질문에 답이 없다고 해서 그 질문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사유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용기, 신마저도 사유의 제단에 올려두는 특권은, 비록 실권은 아니라도 해도,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산. 책(Live-Book)’에서 마주한 억울한 죽음의 풍경

서재를 집 안이 아닌 집 밖의 별도 공간에 두는 일은 불편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줍니다. 때로는 서재로 향하는 길이 귀찮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세상 무엇보다 행복한 여정이 됩니다. 추운 날은 고된 길이지만,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따뜻한 날이라면 무작정 길을 걷는 근사한 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초겨울, 날이 좋아 길을 나섰습니다. 이른 봄날 같은 공기가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서재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산길도 그날따라 걷기에 참 좋았습니다. 산등성이에서 아래로 불어오는 바람은 도시의 바람보다 훨씬 차가웠지만, 걷느라 따뜻해진 몸을 상쾌하게 씻어주었습니다. 길가에 핀 잔설은 마치 하얀 꽃처럼 보였고,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은 초록 잎들이 햇살 아래 살랑거리는 모습이 참 예뻤습니다. 저는 이런 걸음을 ‘산. 책(山.冊)’, 즉 ‘살아있는 책을 읽는 시간’이라 부릅니다.


산길을 걷는 동안, 종이에 인쇄된 어떤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유익한 배움을 얻습니다. 나무와 바위, 흙길과 하늘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높지 않은 고개에 이르면 도시가 훤히 보이는 너른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앉아 두 다리를 뻗고 숲 아래를 내려다보면, 복잡한 빌딩 숲도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하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다시 얼마쯤 걸어 내려오면 서재에 닿습니다.


서재에 오면, 저만의 정결한 의식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산으로 난 창문을 활짝 엽니다. 안과 밖의 공기가 서로 뒤섞이며 공간이 정화되는 이 순간을 참 좋아합니다. 창밖에는 지난봄 활짝 꽃 피웠던 아카시 나무가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서 있습니다. 다음으로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멍하게 밖을 내다봅니다. 삶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가만히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서재 서가의 먼지를 가볍게 털어냅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인간의 유한함에 대하여

서재에서의 다음 의식은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커피나 차를 앞에 두고 창밖의 아카시아 나무를 바라보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오월에 그토록 푸르던 나무가 십이월이 오기 전 모든 잎을 떨구고 노랗게 변해버린 모습은 볼 때마다 내 삶의 길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저 나무는 다시 오월이 오면 향기로운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나무의 생명력을 상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삶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육체와 마음은 저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말라가는 것 같아 씁쓸해질 때가 있습니다. 낡은 물건이야 새것으로 갈아 끼우면 되고, 나뭇잎은 기다리면 다시 돋아난다지만, 사람의 몸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차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낯설지 않은 반복된 생각에 이릅니다. 그런 생각이 반복될수록, 나는 한 가지 기억을 더 자주 꺼내게 된다. 죽음은 개인의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기억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진정한 새로움이란 노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될지 모릅니다. 부정할 수 없이, 삶이 저물어갈 때쯤에야 비로소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젊음이나 늙음을 가리지 않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은 언제나 감당하기 힘든 과제입니다.


개인 너머 사회의 죽음이 주는 슬픔

문득 새로운 기억이 있습니다. 죽음은 개인의 슬픔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지난 2023년 겨울, 이 의식을 거의 마쳐갈 무렵이었습니다. 성탄절이 지나고 이틀 뒤, 의외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저와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사실, 그를 통해 누렸던 위로가 적지 않았으니 그는 멀리 나와, 아니 이 사회와 깊이 연결된 한 사람이었습니다. 느닷없이 그가 삶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의 죽음은 제가 서재로 오기 위해 늘 걷던 그 산길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제가 산을 멀리 돌아 서재로 향하던 그즈음, 그 짙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은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했습니다.


그와 나는 같은 시간, 조금 다른 공간에 있었을 뿐인데 삶과 죽음의 경계가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던 셈입니다. 저는 그 죽음을 ‘억울한 사회적 죽음’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끝까지 누릴 권리가 있는 사람이 그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났다면,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명백한 ‘사회의 책임’ 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한 이들의 공격이 그의 삶의 창을 강제로 닫게 했을 그 절박한 순간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부고는 저에게, 돌아오는 성탄절마다 여전히 붉은 기쁨과 푸른 슬픔이 뒤섞인 ‘레드-블루 크리스마스’의 아픈 증표로 남아 있습니다.


9회 말 투아웃, 배트를 휘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응원

죽음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결심은 많지 않다. 대신 사회가 보낼 수 있는 응원은 무한할 것입니다. 그 무렵, 또 다른 부고를 접하며,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던 것도 생각납니다. 그는 인생이 9회 말 투아웃 투 스트라이크 만루 상황이라며, 무조건 배트를 휘둘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연한 표정이 참 당차 보였고, 저도 그 말에 멋진 문장이라며 맞장구를 쳐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삶에서 마지막 배트를 한 번 휘둘러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참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마주하는 타석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멋진 공이 들어왔는데도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온 힘을 다해 휘둘렀지만, 헛스윙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결과가 결코 한 개인의 실패나 책임으로만 몰아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절벽 끝에 스스로 설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내몰린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배트를 휘두르라고 재촉하기 전에,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고요히 관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지금 당장 공을 쳐낼 힘이 없어도, 이번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해도 당신의 인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격려를 보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직 끝은 오지 않았다’라는 따뜻한 목소리를 사회와 정치가 함께 내어주길 기대해 봅니다. 이 예측할 수 없는 삶은,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경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따뜻한 연대

올해도 성탄절을 보내며 저는 제 삶의 태도를 깊이 되돌아봅니다. 타인을 향해 제 힘을 앞세워 위협하지는 않았는지, 누군가의 삶을 진심으로 경청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는지 살피게 됩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최근 어느 철학자는 ‘인간다움’을 세 가지 기준으로 말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 능력, 그리고 그것을 독립적인 자아로 자유롭게 실현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책임을 맡은 분들—종교인,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들이—이 ‘인간다움’이라는 말의 무게를 다시금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라도 죽음까지 내몰린 척박한 삶에서 반드시 꽃은 핀다는 희망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내야 합니다. 절망의 순간에 마주했을 때, ‘아직 이 세계는 살아갈 만한 곳이며,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도 나를 받아주는 사회’라는 따뜻한 용기를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을 존중할 책임을 가진 자들이 인간을 조롱하는 일만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다움은 정치, 사회의 지지를 통해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성탄절 즈음에도 가슴 아픈 죽음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무리 깊이 사유한다 해도 모든 죽음은 그저 슬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보듬을 때, 다시 걸어갈 용기가 쉽게 시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슬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익어 열매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상담을 공부하는 어느 분이 보내 준 짧은 글귀가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우리는 더 나아져서 하나님께 가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 앞에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믿음’을, 다 마를 듯한 순간에도 한 걸음 더 내딛게 하는 ‘믿으려는 용기’로 받아들입니다. 나의 글쓰기는 슬픔을 열매로 만들어가는 그 용기를, 스스로에게 되묻고 다시 일깨우려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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