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1. 연분홍 희망-시작노트

by 푸른킴

코스모스 두 잎

아직 남겨진

노란 가을, 저녁

싱그러운

아침


배경

과일은 제철에 먹는 것이 제격이라지만, 가끔 철 지난 것이 뜻밖에 입맛을 돋우는 날이 있다. 꽃도 그렇다. 제때의 질서에서 조금 비켜선 꽃을 길에서 만나면, 괜히 살갑다. 반가운 마음과 안쓰러움이 한 덩어리로 함께 오기 때문이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쯤, 길가에서 코스모스를 만났다. 철을 앞질러 핀 건지, 바람에 먼저 떨어진 건지 분간이 쉽지 않았다. 꽃잎이 다 갖춰지지 못한 듯했고, 또 이미 많이 비워낸 듯했다. 남은 것은 겨우 두 잎이었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꽃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남은 잎이 가볍게 흔들렸고, 햇살은 의외로 살갑게 내려앉았다.


사진

꽃을 찍을 때 나는 대체로 줌인하고 클로즈업한다.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 꽃의 옆모습을 담았다. 여덟 잎이 온전히 갖춰진 코스모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질서다. 그렇다면, 두 잎만 남아 조각난 코스모스는 어떤 질서일까. 배경을 흐릿하게 물리자, 꽃의 쓸쓸함이 더 또렷해졌다. 조각난 꽃잎은 세계의 파편처럼 보였다.


나는 이 사진에서 세 가지를 분명히 살리고자 했다.


1) 시선: 정면이 아니라 사선(斜線)

내가 이 디카시에서 주목하려 했던 것은 ‘꽃’만이 아니다. 옆으로 비켜선 나의 시선, 곧 사선이다. 꽃잎과 봉오리는 화면의 중심에 걸려 있지만, 전체는 기울어져 있다. 평소 찍는 대로 꽃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대신 옆얼굴로 꽃을 찍었다. 그리하여 그 뒷모습의 윤곽으로 꽃의 결을 읽고 싶었다.


두 잎만 남은 꽃은 꽃답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꽃이다. 더구나 잎이 비워진 덕분에 꽃 안쪽의 세계가 선명해졌다. 노란 꽃술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겨울에 잎이 모두 떨어져서야 산의 속살이 보이는 것처럼, 이 결핍은 또 다른 가시성을 만든다. 떨어지는 잎은 사라짐이지만, 동시에 내부를 열어젖힌다.


2) 색: 연분홍, 노랑, 초록—공존의 윤리

코스모스 꽃잎은 연분홍이다. 연약하고 가련한 정조가 감돈다. 초록이 받치고 있지만, 아래로 처진 잎은 속절없다. 연분홍은 유채색이지만 환한 색조로서 환희가 아니다. 밝아 보이되 어둠을 지우지 못한다.


그런데 이 꽃의 중심에 노란 꽃술이 있다. 이 노란색은 소멸하는 잎을 떠받치는 생의 핵처럼 보인다. 지는 꽃은 아직 죽지 않았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 운명이라면, 그 운명 너머에서 다음을 준비하는 힘도 또한 운명이다. 분홍과 노랑의 대비는 죽음과 삶의 공존이다. 사라지는 것 속에도 중심이 남아 있는 현실. 그래서 이 연분홍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남아 있음으로써의 희망이 된다.


3) 배경의 흐림: 장소를 지우고 시간을 남기기

얕은 심도로 배경을 지우고 피사체만 남겼다. 이 흐림은 내가 오직 ‘두 잎’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표시다. 동시에, 흐림은 시간의 결을 드러낸다. 배경이 흐릿해질수록 꽃의 장소보다 꽃의 시간이 도드라진다.


나는 이 아웃포커스를 ‘효과’가 아니라 ‘상징’으로 쓴다. 아직—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시간. 이 사진의 흐림은 그 ‘아직’을 붙잡아 둔다.


정리하면, 남은 두 잎은 아래로 떨어지듯 처져 있고, 줄기는 위로 뻗는다. 이 상반된 방향이 화면 안에 미미한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은 시간을 만든다. 꽃이 지는 모양은 한 날의 저녁 같다. 기울어지는 것은 꽃만이 아니라 햇빛이다. 그러나 햇빛은 기울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밤을 지나 다시 아침으로 기울어갈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꽃의 끝’을 선언하지 않는다. 끝의 앞에 머물러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순간을 담는다. 이른 계절의 풍경이 아니라, 계절이 느려지며 사유로 바뀌는 경계다.


시어

이 디카시의 시어는 꽃을 중심으로만 서술된다. 나는 꽃을 설명하며, 그 설명의 결론으로 제목을 세웠다. 시어들은 주로 색과 시간에 기대고 있다.


“연분홍 희망”: 연분홍은 희미한 확신이다. 나는 희망을 강변하지 않고, 색의 농도로만 말하고 싶었다. 여기서 희망은 ‘있다/없다’가 아니라 ‘옅다/남아 있다’의 논리다. 그래서 연분홍은 과잉의 구호가 아니라 절제된 긍정이 된다.


“코스모스 두 잎”: 두 잎은 이 꽃에 남은 최소한의 생존 단위다. 만개한 코스모스가 아니라 두 장만 남은 코스모스를 찍은 것은, 충만보다 잔존에 주목하려는 선택이다. 그런데 이 두 잎은 불행의 표지만이 아니다. 저무는 시간 속에서도 삶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윤리다.


“아직 남겨진”: ‘아직’은 미완성, 불충만한 시간이다. 곧 도착할 무엇을 약속하는 확정된 시간이 아니다. 결론을 재촉하지 않는 태도다. 타인의 어둠을 앞지르지 않는 위로의 속도이며, 현실을 지우지 않는 기다림이며 준비함이다. 그래서 ‘아직 남겨진’은 다소 동의어 반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의미 중복을 통해 ‘아직’을 한 번 더 상기하고 싶었다. 남겨진 것은 꽃잎만이 아니라, 해석을 급히 닫지 않은 의미의 잔존, 여백이기도 하다.


“노란 가을, 저녁”: 나는 꽃 속의 노란 술에서 ‘가을’과 ‘저녁’을 끌어왔다. 노란색은 환희의 빛이 아니라 낙조의 빛이 된다. 빛은 남아 있으나 내려앉는다. 기울어지는 꽃의 모양과 상응한다. ‘노란 가을’은 단순한 계절 묘사가 아니라, 기울어가는 방향성이며 아침을 향한 변화의 전조다.


“싱그러운 / 아침”: 마침내 시어는 아침에 닿는다. 저녁에서 끝나지 않고 아침으로 나아가되, 찬란하지 않고 싱그러운 아침이다. 화려한 부활의 서사가 아니라 미세한 회복이다. 이 아침은 ‘저녁을 지워서 온 아침’이 아니다. 저녁이 스며 있는 채로 도착한 아침이다. 나는 저녁의 무게를 인정한 다음에야, 아침의 싱그러움을 넌지시 꺼낸다. 밝음은 희미한 채로, 절제된 희망으로 남는다. 결국, 이 시어들은 저무는 저녁에 여전히 남아있는 아침을 향한 희망을 지금 여기로 끌어온 것이다.


의도

나는 철에 어울리지 않는 코스모스, 게다가 여덟 잎이 아니라 두 잎만 남은 상태를 철학적으로 조명하고 싶었다. 그것을 꽃의 끝으로 닫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희망으로 그리고자 했다. 코스모스는 질서와 우주의 상징이다. 사진 속 코스모스는 질서의 완성이 아니라 질서의 축소와 와해를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이 사진에서 ‘충만’이 아니라 ‘잔존’을 읽었다. ‘아직 남겨진’은 사라짐 속에 여전히 생존하는 작은 것에 집중하려는 내 의지의 표지다.


한편, 화면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줄기는 생의 의지처럼 위를 향해 꼿꼿이 뻗어 있으나, 그 끝에 매달린 연분홍 꽃잎 두 장은 중력과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아래로 낮게 드리워져 삶의 비애를 형상화한다. 정면의 화려함을 거부하고 비껴선 시선이 포착한 꽃의 옆모습은 여덟 잎의 완결된 질서가 와해된 자리에 남겨진 존재의 파편들을 더욱 또렷하게 응시하게 만든다.


잎들이 비워진 덕분에 비로소 전면에 드러난 노란 꽃술은 저무는 가을 저녁의 낙조를 머금은 채 생의 핵으로 기능하며, 바스러져 가는 연분홍 잎을 묵묵히 지탱하는 숭고한 힘을 보여준다. 얕은 심도로 지워진 배경은 장소성을 거세하고 오직 이 꽃이 견뎌온 '아직'의 시간만을 남겨두며, 햇살은 역광의 끝자락에 걸려 잎맥의 미세한 떨림과 투명한 결을 살갑게 어루만진다. 결국 이 조각난 코스모스는 소멸의 징후가 아니라 내부를 열어젖혀 다음의 아침을 준비하는 저항적 희망의 증거이며, 저녁의 어둠을 앞지르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싱그러운 회복을 꿈꾸는 절제된 실존의 기록이다.


결국, 이 디카시에서 나의 의도는, ‘가을, 저녁’과 ‘아침’을 한 시 안에 걸어두는 것은 계절을 한 방향으로 단순화하지 않으려 것이다. 한 순간 안에 겹쳐 있는 시간의 층위를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나는 이 남겨진 것을 ‘위로의 도구’로만 쓰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그것이 현실임을 말하고 싶었다. 검은 안식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처럼, 현실을 견디되 현실을 단정하지 않은 절제, 밤을 쉽게 아침으로 치환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래서 나는 한 점에 시선을 묶고, 배경 설명을 줄이고, 결론을 재촉하지 않으며, 남겨진 것 앞에 머무는 시간을 만들고자 했다.


총평

이 디카시는 내 종말론적 삶의 감각을 반영한 것이다. 사진은 서둘러 ‘아직’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가 그 ‘아직’을 언어로 다듬어 제시한다. 다행히 사진과 시는 서로를 일방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서로의 여백을 지키는 쪽으로 붙어 있다. 그래서 이 디카시는 의미가 희미하면서도 조금씩 드러나는 아침 같은 시가 된다. 특히 이 디카시에서 단단한 대목은 두 가지다.


첫째, 희망을 과장하지 않았다. 연분홍의 색과 ‘싱그러운’이라는 시어의 선택은 희망을 단지 선언이 아니라 기미(氣味)로 남겨 둔다.


둘째, 저녁을 지우지 않았다. 어둠이 앞서고 밝음이 뒤따른다. 이 순서는 삶의 질서를 지켜가는 윤리다. 밝음이 어둠을 추월하지 않는다.


종합하면, 나는 이 작품에서 “희망”을 말하면서도 희망을 소비하지 않으려 했다. 희망을 남겨 둠으로써, 세계의 어둠과 함께 보이게 하고자 했다. 그 절제가 이 작업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절제야말로 내가 오래 밀어붙여 온 검은 안식의 문장—“위로의 속도가 타인의 밤을 앞지르지 않게”—를 사진 한 장과 몇 줄의 시로 구현하려 한 결과다. 이 작품의 희망은 ‘밝음’이 아니다. 희망은 연분홍처럼 옅지만 사라지지 않는 잔존이다. 그리고 그 잔존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이, 내가 선택한 사진의 윤리이자 시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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