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거친 소리
하늘의 가는 소리
가는 비
보일 듯 떨어지는
광화문 사거리
선 따라
다른 시선들ㅡ
나란나란
배경
시청역 2호선에는 내가 자주 걷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덕수궁을 지나 인왕산 쪽 숲으로 스며드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광화문 광장을 통과해 삼청동과 삼청공원 쪽으로 흘러가는 길이다. 둘 다 그냥 걸어도 좋고, 생각하면서 걷기에도 좋다. 두 길은 특징이 뚜렷하다. 전자는 도심에서 숲으로 넘어가며 도시의 소리를 가라앉는 방향이고, 후자는 문명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며 도시의 소리를 온몸으로 만나는 방향이다. 이 둘은 내 삶에 늘 나란히 존재하지만 쉽게 겹치지 않는다. 내게는 어떤 의미에서 사유의 ‘평행선’ 같은 상징이다. 조금 길지만, 나의 디카시가 잘 읽혔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두 길을 설명해 두려 한다.
먼저, 인왕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시청역 2번 출구로 나와 시청 청사를 바라보며 걷다가, 마당세실과 영국대사관 쪽으로 틀어 들어가는 길이다. 조금 오르면 덕수궁 안으로 이어진 쪽길을 거쳐 고종의 길로 이어진다. 새로 복원된 그 길은 말끔한 담장이 하얗게 이어진 골목이다. 그러나 그 말끔함은 오히려 경계의 감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역사(歷史)라는 것은 때로 ‘단장된 표면’과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 피난의 길 끝에 솟은 옛 러시아 공사관은 그 역사의 암운이 남긴 그림자의 깊이를 암시한다. 그 길 넘어 다시 경희궁 쪽으로 내려와 인왕산을 넘어가면 한양도성길이나 북악산 산책로로 이어진다. 도심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그 전환은 나에게 적절한 사유로 안내하는 철학의 길이다.
또 다른 길은 시청역에서 곧장 앞으로 걸어 나가 광화문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광화문 월대까지 쭉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틀어 동문각을 앞에 두고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삼청동으로 빠진다. 삼청동 끝에 삼청공원이 있다. 그 사이 오솔길을 지나면 북악산으로 오르는 숲길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능선에 서면 청운대 쪽으로 나갈 수 있는 도성길과 만난다. 이 길은 한적하고 운치가 있어, 가볍게 산책하듯 걸으며 역시 철학하기에 좋다. 나는 날이 맑으면 숲으로 기울어지는 인왕산 길을, 날이 궂으면 문명의 표면을 가로지르는 광화문 길을 택하려 한다.
그날은 원래 인왕산 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날이 나쁘지 않아서다. 그런데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빗방울이 흩뿌렸다. 겨울비는 대개 차갑고 성급한데, 그날의 비는 달랐다. 마치 ‘술비’ 같았다. 이 비는 농한기에 반주 한 잔의 여유를 허락하는 비, 일의 속도를 잠깐 늦추어 주는 비라는 뜻이다. 물론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런 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도시에는 농한기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어울리지 않음이 오히려 내 감각을 자극한다. 가장 바쁜 도시 속으로 가장 느슨하게 이름 붙여진 배가 떨어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내리는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어, 숲 대신 광화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점심 무렵이라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한두 사람은 이미 우산을 펼쳤다. 그 틈에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대체로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빠르게 도시 한복판, 광장까지 걸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췄다. 건너편 D신문사 옛 건물 옆 신관 벽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성탄절 영상이 쉼 없이 장면을 바꾸고 있다. 빛은 무질서하게 도시로 쏟아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맞은편 K문고 건물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난가을 이후 오랜만에 이 길을 지나는 터라 이 겨울에, 저 건물 현판에는 어떤 새로운 문장이 무엇이 걸렸는지 궁금했다. 눈에 들어온 내용을 보면서 휴대폰을 꺼내 찍었다. 그 옆으로 화려한 도시의 건물의 광고 문구가 함께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 사진 모서리를 조금 잘라내니 두 문구의 대비가 평행선처럼 선명해졌다.
그런데 이 사진이 단지 건물과 문구의 대비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여기는 광화문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화려한 도시의 건축이 빚어내는 수많은 선(線)이 곧 사회의 의식을 반영하는 선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내 눈에는 열린 공간, 광장과 도로 건너편에 공간을 가로막은 숱한 건물들 사이에 알 수 없는 이질감이 평행선처럼 굳게 놓여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하게 들어왔다. 어쨌든 광화문은 늘 ‘현재의 정치’와 ‘오래된 역사’가 맞닿지 않고도 충돌하는 토포스다. 국가의 얼굴이 있고 시민의 함성이 있으며, 기억의 층이 화석처럼 박혀 있다. 그리고 오늘 이 공간은 도시의 기계문명과 인문(人紋, 인간의 무늬)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 사진은 풍경을 찍은 것이면서 동시에, 풍경이 들려주는 어떤 이야기를 눈으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사진
나는 이 사진을 아래에서 위로, 왼쪽 사선으로 이어지는 시선으로 찍었다. 도시의 건물답게 벽면은 거대한 유리창으로 이어지고, 그 유리 위에 수평과 수직의 선들이 격자처럼 교차한다. 사진 오른쪽 2/3를 차지하는 건물은 갈색 벽돌빛 벽면과 유리창의 선이 일정한 크기로 층층이 쌓여 조화를 이룬다. 수평의 면과 수직의 검은 선이 안정된 리듬을 만든다. 반면 왼쪽 1/3 정도를 차지하는 건물은 전형적인 신축 건물이다. 진하고 옅은 색의 통유리가 한 면 전체를 채운다. 차가운 광택이 그대로 드러난다.
두 건물은 실제로는 간격이 넓다. 그러나 사선 구도 안에서는 그 간격이 사라지고, 마치 모서리를 맞댄 채 한 덩어리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붙어 보이되 만나지 않는다는 것, 한 건물인 듯 보이되 끝내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이 어긋남은 시선의 습관이 만드는 자연스러운 착각이다. 이런 착시는 도시가 늘 보여 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광화문만 아니라 어느 도시에서나 고층 건물 사이에는 종종 이런 구조가 잘 나타난다. 가까워 보일수록 멀고, 함께 있는 듯할수록 서로에게 닿지 않는 상태다. 어쩌면, 평행선은 눈앞의 물리적 도형이 아니라, 도시에 숨은 관계, 그것이 드러내는 윤리의 구조일지도 모른다.
사진의 전체 색은 차갑고 단단하다. 회청색 유리, 갈색 벽돌, 술비가 떨어지는 회색 하늘이 기본 톤을 이루고, 그 위에 연갈색 현판과 검은색 한글 문장, 검은 바탕 위의 흰 영어 광고 문구가 겹쳐진다. 거기에 사진 오른쪽 아래, 붉은 신호등이 미미하게 자리한다. 그런데 그 빨강은 오히려 강렬하다. 단순한 포인트가 아니라, 선과 문장이 자기 길로 내달리는 순간을 잠시 멈춰 세우는 정지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멈춤은 도시에서 흔한 명령이지만, 이 사진 속에서 그 흔함이 오히려 낯설게 보인다. ‘멈추라’는 익숙한 명령 하나가, 지금 이 사진에서는 건너편의 소리를 다시 ‘들으라’는 따뜻한 권고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불빛에 내 몸을 기울이는 이유다.
결국 이 사진은 우연처럼 찍혔지만, 어떤 의미를 필연처럼 일깨운다. 평행선처럼 떨어진 채 자기 길로만 달리는 도시의 질주를 잠시 멈춰 세우는 하늘의 소리다. 동시에 그 평행을 유지한 채로도, 길 건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조용히 말하는 내면의 소리다. 이 사진은 건물과 나 사이에 들려오는 소리의 풍경이다. 달리는 도시가 아니라, 멈춰 서서 듣는 거리의 겨울그림이다.
시어
이 디카시는 사진에 새로운 시어가 필요 없을 만큼 사진 자체의 문구가 선명하다. 왼편 건물 광고판에는 “voices of Galaxy”라는 문구가 있다. 오른편 K문고 건물 현판에는 박소란 시인의 시구,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가 살렸다. 한쪽은 짧고 단단한 명사형 구문이 영어로 박혀 있고, 다른 한쪽은 길고 온화한 서술형 문장이 한글로 걸려 있다. 게다가 그 문장에는 먹는 일, 살아내는 일, 궁금해하는 일 같은 사소하고 감정적인 관심이 담겨 있다. 공적 공간의 거대한 갈색 벽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연갈색의 사적 감정이 선명하다.
이 대비는 단순히 ‘기계 對 인문’으로만 정리되지 않는 관계가 담겨있다. 중요한 것은 ‘목소리’라는 개념이다. 도시에는 언제나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처럼 서로 다른 언어가 한 공간에 공존한다. 이 공존은 곧 화해를 뜻하지 않는다. 공존은 때로, 서로 다른 언어가 끝내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나란히 지나가는 분리 자체다. 내 경험으로 광화문은 그 다성성이 가장 다양한 음량으로 표출되는 장소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사진 속 문구들의 거리를 조금 좁혀 보고자 몇 마디 말을 그 사이에 잇는다.
“평행선”: 제목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정해졌다. 그런데 이 제목에서 말하는 평행선은 단지 수학적 도형이 아니다. 서로 무관하게 흐르는 도시의 윤리적 상태를 가리킨다. 도시는 직선으로 이어지고, 직교하는 선들로 질서를 만든다. 그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스치며 지나가지만 쉽게 만나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만날 조건이 사라진 것을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멀리서 보면 거의 붙어 있는 듯해도 가까이 가면 큰 간격이 있다. 안도현의 시 ‘간격’은 숲을 노래하지만, 오히려 이런 도시의 정서를 그대로 담는 것 같다. 간격은 물리적 거리이면서 관계의 거리다. ‘평행선은 만나지 못하는 것’이 공리다. 하지만, 삶의 가치는 그 공리가 낯선 질문이 될 때 더 높아진다. ‘도시에서 우리는 왜 서로의 세계에 닿지 못하는가’
“땅의 거친 소리 / 하늘의 가는 소리”: 첫 연은 비가 흩뿌리는 도시의 풍경을 소리에 담은 것이다. 사람과 차와 건물이 내는 소음을 ‘거친 소리’로 두고, 술비 같은 겨울비를 ‘가는 소리’로 표현했다. 실제로 걷는 내내 땅은 온갖 잡음으로 요란했지만, 비를 내리는 겨울하늘은 회색빛이면서도 고요했다. 그런 점을 반영하여 내가 쓴 ‘가는’은 물리적 질감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식의 질감이다. 거친 것은 몸이 직접 부딪힐 때 더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가는 것은 멀리서도 몸을 기울여 듣는다면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는 정서일 것이다. 내가 만난 광화문의 이 풍경은 이 대비를 통해 감각의 층위가 다르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도시는 하나의 감각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여러 층이 나란히 서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채 교차하는 다성성의 공간이다.
여기서 잠깐, 술비라는 나의 해석을 좀 더 부연해두려 한다. 이 이름은 ‘가는 소리’에 다른 결을 더한다. 겨울비를 일컫는 ‘술비’는 차갑기만 한 비가 아니다. 삶의 속도를 잠깐 늦추어 주는 여백의 비다. 그러니 ‘가는 소리’는 단지 미세한 소리가 아니라, 여가를 만들어 내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렇게 내가 걷는 도시에는 땅의 거친 소리와 하늘의 가는 소리가 나란히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도시에도 농한기의 리듬이 잠깐 들어설 수 있음을 상상한다. 낯설게 하기는 이런 방식으로 시작된다. 익숙한 광화문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 하나가 도심에 떨어질 때, 그 낯선 감각은 조용히 깨어난다.
“가는 비 / 보일 듯 떨어지는 / 광화문 사거리”: 둘째 연은 ‘가는 소리’를 시각으로 옮긴다. 가는 비는 앞 연의 가는 소리와 조응한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비는 하늘의 소리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소리는 보일 듯 말 듯하다. 여기서 “보일 듯”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 감각이다. 내리는 비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걷는 내 옷 어딘가에는 분명 흔적이 남는다.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잘 보이지 않으나 선명하게 들리는 것, 드러나지 않으나 확실하게 남는 것은 모순이다. 그런데 이 모순이 광화문의 건물들 풍경에도 그래도 들어있다.
광화문은 오래전부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대의 소리’로 가득한 곳이었다. 권력의 충돌, 여론의 평행선, 기억과 망각의 대결, 무심과 집착의 교차가 동시에 얽힌 곳이다. 그래서 광화문이라는 지명은 단지 도시의 한 좌표가 아니다. 이 사진을 압박하는 프레임이며, 개인 감상을 공적 현실의 장으로 끌어가는 장치다. 나는 이런 곳에서 “세미한 음성”을 떠올린다. 이 광장은 큰 소리가 저절로 들리는 곳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는 소리는 스스로 들으려 해야 한다. 광장 한복판에서 어딘가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여기서 소리는 ‘보는 것’이다. 광장에서 소리는 듣기의 윤리가 시각의 수련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보인다.
“선 따라 / 다른 시선들ㅡ ”: 셋째 연은 이 디카시의 논지다. ‘선’은 사진 속에서 도시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풍경이다. 보이지 않지만 도로의 차선이고 사거리의 구획선이며, 건물의 수평·수직 구분이고 유리창의 격자다. 그것은 도시의 삶을 규정하는 규칙이기도 하다. 법의 질서는 ‘선’을 유지하려 한다. 비록 꺾인 선이라 해도 사람들은 그 선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 선은 삶의 동선을 결정한다. 판결한다. 그 선을 따라 움직일 때 행복하다 하고, 그 선이 왜곡될 때 불행하다 한다. 이처럼 도시의 선은 사람들의 삶을 조용히 구획한다. 다른 점에서 이 선은 도시의 자동화를 획책한다. 익숙하게 만들어 무감각까지 내몰기도 한다. ‘선’의 얼굴은 이처럼 이중적이다. 반복되는 격자, 반복되는 신호 체계, 반복되는 이동의 패턴이 익숙함을 통해 질서를 강조하면서도 그 익숙함으로 삶의 감각을 둔화, 퇴화시킨다.
한편, 도시에는 ‘다른 시선들’도 무한하다. 이것은 그 선 위에 얹힌 타인의 시선이다. 기계의 시선이기도 하다. 건물마다 도로 곳곳에 세워진 CCTV(Closed Circuit Television)의 시선도 인간의 삶에 불가항력으로 얹혀있다. 이 시선이 지배하는 광화문 사거리 같은 곳에서 사람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는다. 각자는 타인의 시선을 피해 자기 방향만을 주시한다. 그러나 나의 주시 역시 누군가에게 타인의 시선이 된다. 나도 누군가를 감시하는 인간 폐쇄회로로 바뀌는 것이다. 이처럼 도시를 포함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보이는 감시도 있고 보이지 않는 감찰도 있다. 이 도시는 특히 그 여러 시선이 ‘함께’ 있는 방식으로 생존의 기본값을 설정한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이런 시선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시선들을 스스로 해방하자는 것이다. 그 방법이 이 시어의 마지막에 둔 ‘나란나란’의 삶이다.
“나란나란”: 이 표현은 귀엽거나 가벼움을 표현하는 의태어가 아니다. 감성이 아니다. 오히려 기계적인 표현에 가깝다. 나란히 서 있지만 마음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이다. 같은 신호에 멈추고 같은 비를 맞는 도시의 기본 속성도 담겨있다. 동시에 나는 이 단어에 아주 얇은 틈을 담아두었다. 획일적 평행이 아니라 일말의 틀어짐이다. 좁힘의 가능성이다. 평행선은 끝내 만나지 못한다는 확정된 선이다. 하지만, 나는 그 평행이 기적적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둘 사이의 간격은 끝내 사라질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이 마지막 시어가 ‘나란나란’이라는 조어는 그 만남을 상징한다.
이처럼 이번에 이 시어는 사진을 해석하거나 사진의 도움을 받는 시가 아니다. 그보다 사진 자체가 말하는 의미와 나란한 새로운 층위를 다시 창출한다. 그 의미는 결국 어느 지점에서 잘 만날 것이다.
의도
이 시어들을 통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두 건물 사이에 평행하게 걸린 문구들이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려는 것이다. 평행선의 만남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의식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계와 문학의 만남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도시의 삶을 급히 평가하지 않는다. 이 디카시에서 보는 것처럼 “voices of Galaxy”가 인간을 차갑게 만든다고 단정하지도 않고, 시가 언제나 따뜻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시의 언어는 원래 혼성적이다. 차가운 언어 속에도 사소한 관심이 있고, 부드러운 문장 속에도 시대를 겨누는 칼날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어느 하나의 선이 우세해야 한다는 결론을 서둘러 내리지 않으려 했다. 그저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는 상태를 보여 주고 싶었다.
한편, 나의 이런 의도를 좀 더 세분하면 크게 세 갈래로 정리된다. 특히 대림절의 감각을 바탕으로 하면, 그것은 자동화의 경계, 세미한 음성을 보기, 나란함의 희망으로 풀어볼 수 있다.
(1) 도시의 자동화를 깨기
도시는 익숙함의 공간이다. 습관이 되지 않으면 삶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디카시에도 그런 점을 반영했다. 반복되는 유리창, 이어지는 검은 수평 선, 반복되는 신호 체계. 이 반복을 통해 도시는 자동화를 촉구한다. 도시의 삶을 익숙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도시의 권태를 불러온다. 삶의 감각을 둔화시킨다. 인간의 간극을 고정한 채로 그대로 둔다. 나는 그 익숙함을 ‘선’으로 읽는다. 선은 손대지 않아도 흘러가는 흐름이고, 그 흐름이 빠를수록 사람은 사유 없이 생존한다. 도시에서는 그 선 위에 “다른 시선들”이 얹힌다. 그런데 이 타인의 시선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선의 자동화는 잠깐 멈칫한다. 그 시선이 경계의 창끝이 아니라 따뜻함의 통로라면 도시의 삶은 낯설게 하기에 이를 수 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삶은 새롭게 역동한다. 익숙한 광화문에 어울리지 않는 술비의 이름이 떨어질 때, 그 감각은 다시 깨어난 이유다.
(2) 소음 속의 세미한 음성을 보기
광화문은 늘 ‘보여 주는 것’이 강한 장소다. 구호, 현수막, 뉴스 화면 같은 시각 자극이 쏟아진다. 동시에 광화문은 ‘소리’로 가득하다. 문제는 그 소리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쉽게 소음처럼 치부된다는 것이다. 거친 소리가 가는 소리를 가차 없이 덮어 버린다. 그러나 이 광장에는 오히려 ‘가는 소리’가 가득하다. 내가 만난 술비는 그 가는 소리를 은유한다. 가는 소리는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 소리는 ‘보는’ 소리다. 나는 듣기의 윤리가 종종 시각의 훈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여러 삶을 통해 경험했다. 작은 소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가 광장에서는 스스로 부여된 책임이 된다.
(3) 나란함의 희망
‘평행선’은 만날 수 없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나는 이 상징을 절망으로만 쓰지 않으려 했다. 당장 화해나 통합의 선언이 아니다. 적대하지 않는 동시성을 상상한 것이다. “나란나란”을 붙여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법적으로는 어색하지만, 그 어색함이 결론의 빠른 닫힘을 피하게 한다. 끝내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란히 걷는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윤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대림절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종말의 성급한 도착을 거부하면서도 기다림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오히려 기다림이 새로운 출발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믿어보는 것이다. 아직은 평행이지만, 그 평행 속에서 서로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는 어떤 작은 확신이다.
총평
내가 이 작품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사진의 구조가 이미 시의 논리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 점이다. 디카시에서 사진은 단지 배경이 아니다. 사진 자체가 이야기이고, 사진 자체가 문장이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만난 이 풍경은 그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여기에 덧붙인 나의 시어는 사진이 이미 품고 있던 “평행선”을 다시 읽게 하는 해석의 층으로 작동한다. 사진이 보여 준 것을 시가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속에 잠복해 있던 시를 끌어올려 다른 각도로 재배열하는 것이다. 사진과 시어는 같은 사실을 두 개의 층위로 나란히 말한다. 이것이 이 디카시에서 어느 정도 나타난 것 같다.
또 하나의 유익은 “소리는 시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점이다. 소리를 경청한다는 것은 그 발원지를 관찰하는 일이고, 그 관찰이 깊어질수록 한 소리 안에 수많은 소리가 층위로 쌓여 있음을 알게 된다. "땅 /하늘”, “거친/가는”은 짧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소리다. 광화문은 기억과 역사 때문에 식상해지기 쉬운 공간이다. 하지만, 그 오래된 감각의 층위가 오늘의 나를 찌르고, 그 감각이 지금-여기에서 재배열 되록 열어 두면 그곳의 공기와 리듬은 날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도시지만 숲길을 걷는 것과 같다. 내가 만난 며칠 전 그 술비는 정서 장치가 아니라 사유와 인식의 기제였다. 보일 듯 말 듯 떨어지는 것, 드러나지 않으나 확실하게 남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많은 부분과 닮아 있다는 것을 나는 다시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란나란”이라는 조어를 하나 더 얻게 되었다. 이 말은 그 자체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하나를 둘로 늘여 쓰는 방식은 여운을 만든다. 결론을 닫는 대신 과정을 이어 준다. 시의 끝에서 내 발걸음이 다시 광화문 사거리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역으로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나란히 서 있는가. 끝내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란히 걸어갈 의지가 있는가.’ 이 질문은 간단하지 않다. 오히려 복합적이고 철학적이다. 하지만, 차갑고 기계적인 도시의 리듬 속에 인간이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아주 얇은, 그러나 따뜻한 윤리를 남긴다.
정리하면, 이 디카시는 사진과 시어가 서로 다른 층위로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평행선은 단지 도형이 아니라, 도시의 감각이며, 삶의 윤리이며, 기다림의 사유 장치로 확장할 수 있는 사유의 도구다. 결국, 그 사유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순간, 이 디카시에서 말하는 광화문 사거리는 평행선을 따라 사건의 장소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평행선의 한쪽을 조금 틀어 결국에는 한 곳에 만난다는 희망을 가져온다. 그 희망으로 기울어지려는 투쟁을 토대로 삼을 때, 나의 삶은 이성의 공간에서도 감각의 기술로 조화롭게 소생할 수 있다.
평행선도 서로 만나려는 힘이 있다.
Credo illud! 나는 그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