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9일 자 <교수신문 종이본 게재> 책으로 책 너머를 읽다
*
<출처:교보문고>
오늘날 우리는 예측불허의 세계와 직면하며 살아간다. 이 현실 속에서 ‘어떤 사건’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우연이 아니라 ‘나의 일’로 받아들이는 최종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책이다. 2011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진행된 강연을 묶은 이 글이 오늘날까지 회자하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 자기 결정’이라는 무거운 화두를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기 결정’이란 충동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의 자기기만을 걷어내고 스스로 동의할 수 있는 삶의 기준을 세우는 정신적 능력이다. 비에리의 강연은 이를 글쓰기, 타자와의 관계, 문화적 정체성의 층위에서 고찰하며, ‘자기’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증명되는 수행적 과정임을 역설한다.
표지의 붉은 바탕에 쓰인 부제는 ‘행복, 존엄, 결정’이라는 책의 핵심 가치를 선명히 드러낸다. 또한 ‘지혜의 나무’ 삽화에는 자기 결정이 일상을 주도하는 지혜가 뻗어 나가는 통찰이 흐른다. 이 지혜는 외부 권위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발흥하는 ‘자기 계시’다. 결국 자기 결정이란 삶을 억지로 끌고 가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납득하고 동의를 구하며 써 내려가는 내적 서사(inner narrative)의 방식이다. 책은 총 세 번에 걸친 강연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 강연에서 비에리는 자기 결정을 자아상과 현실 자아의 일치, 나아가 ‘공상적 유토피아’의 실현과 연결한다. 이 공상이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미지의 가능성을 현재로 소환하는 실천적 상상력이며, 곧 스스로 동의한 내적 규범을 따르는 주체적 기획으로 이어진다. 이를 위해 인간은 ‘언어’를 가꾸고 경험을 문학적 서사로 엮는다. 또한 타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도, 그들과 소유가 아닌 책임의 거리를 유지하는 ‘도덕적 친밀감’을 형성해 나간다.
두 번째 강연은 자기 인식과 글쓰기를 다룬다. 인식은 끊임없는 질문으로 일의 동기를 파악하고, 그를 통해 사유의 신경망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이는 곧 시선의 문제로서, 자기 내면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훈련이기도 하다. 이 훈련은 글쓰기로 이어진다. 글쓰기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문학적 건축물’로서 자기기만의 민낯을 대면하게 한다. 나아가 글쓰기는 타인의 눈으로 나를 비추는 새로운 인식을 내면의 거울로 만들어, 자기기만적 합리화에서 벗어나게 한다. 마침내 자기 결정을 가능케 하는 자기 인식을 형성한다. 곧 글쓰기는 자기 결정이라는 사유 공정의 토대이며, 이러한 자기 인식이 자기 자유의 원천이다.
세 번째 강연은 문화적 정체성과 교양을 다룬다. 세밀한 언어 습득으로 자기 근거를 밝히고 선택의 지평을 넓힌다. 이를 통해 저자는 정해진 정답에 의존하기보다 삶과 타인에 대한 책임을 감내하는 태도가 존엄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친밀성’과 ‘낯섦’이라는 관계의 밀도가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한편 교양은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이자 방식이다. 지식의 단순한 소유를 넘어 지식과 경험이 조우하는 방식이며, 풍부한 언어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해 가는 축적의 과정이다. 이런 친밀감과 교양 쌓기의 방식에 의해 인간의 자기 존엄성 여부가 결정된다.
이러한 비에리의 주장은 리처드 로티의 ‘시로서의 철학’에 호응하는 ‘소설로서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그는 철학을 논설이나 설교로 제시하기보다, 일상을 토대로 소설처럼 상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경험을 축적하고 이를 글쓰기를 통해 삶의 양식으로 만든다. 비록 저자가 말하는 ‘자기’의 개념이 관계 속에서 다소 모호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의 사유에는 타인의 시선을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관계 속에서 자기 존중을 지키는 인간형이 살아 있다. 이를 명명하면, 자기를 즐거워하며 행복을 일구는 ‘낙인(樂人, 호모 펠리키타스)’일 것이다.
한편 현대인들에게 비에리의 글쓰기 권면은 새겨둘 만하다. 그에 따르면 글쓰기는 흩어진 경험을 자기 언어 개념으로 엮어 만드는 주체적인 사유의 집적 행위다. 이는 자기기만을 걷어내고 내면의 자리를 확보하는 ‘사유의 건축’이자, 자신의 삶을 타인의 편집에 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결국 그의 글쓰기는 철학을 일상으로, 일상을 철학으로 전환하며 ‘자기 결정’을 스스로 입증해 나가는 존엄한 실천이다.
이 책은 철학이 일상에 스며들어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기’의 방향을 잃어버린 시대, ‘타인을 사랑하듯 자기라는 타인을 존중하는 삶’을 권한다. 마치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도 나만의 언어와 서사로 삶을 건축하라는 저자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