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포크송: 데굴데굴 흘러와 이어진 기억

— 유지연, 〈소확행〉휫셔뮤직, 2019. 1.

by 푸른킴
삶은 때때로 우리를 의도치 않은 변두리에 세워두곤 합니다. 그런데 그 때는 나만의 소중한 추억이 새롭게 움트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나의 경우, 1980년대 초반 서슬 퍼런 긴장이 감돌던 전방의 안갯속에서 나는 내 삶에 저장된 노래들을 다시 들으며 작지만 강한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그날 거친 스피커를 타고 데굴데굴 굴러온 동전 한 잎 같은 노래들은, 수십 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내 삶의 층위에 단단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음악은 들려지는 순간 휘발되는 듯하지만, 특정한 시대의 공기와 개인의 절박함이 만날 때 ‘맥락적 기억(Contextual Memory)’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화석이 됩니다. 아주 우연히 유지연 님의 〈소확행〉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청년기—그 ‘던져진 존재’ 같았던 불안—와 장년기의 ‘관조적’ 평화가 노래 안에서 긴밀히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문득 故 김민기의 〈철망 앞에서〉가 내게 묻고, 안치환의 함성이 답하며, 다시 유지연의 나긋한 읊조림이 이를 갈무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궤적은 포크송이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삶의 본질적 긴장을 직시하는 태도’ 임을 증명해 줍니다.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밖에서만 길을 찾으려는 나에게 ‘안으로 나 있는 길’을 일깨워준 나의 포크송 사유가, 당신의 삶을 견인하는 이름 모를 노래들과도 깊이 공명하기를 소망합니다.

1. 노래들, 그 맥락적 기억

1-1. 노래 하나

노래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서슬 퍼런 시대의 공기 속에서 대학생이었던 내게는 전방 입소 훈련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의무가 주어졌다. 훗날 군 복무 기간을 며칠 감해준다는 조건은 그저 명분에 가까웠을 뿐, 젊은 날의 내게 그 길은 결코 내키는 여정이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악지대 부대 끝자락, 허름한 내무반에 짐을 풀었다. 이튿날 새벽, 영문도 모른 채 밀려 들어간 철책 경계 초소에서 나는 낯선 긴장감과 마주했다.


함께 초소에 올라간 현역병은 내내 한 걸음 비켜서 있었다. 나와 같은 나이였을 테지만, 조금은 도도하고 무심한 자세로 나를 방관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전날 은근한 말로 괴롭히던 이들과는 다른, 그 고요한 방관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시간은 시나브로 밤의 어둠을 밀어내고 새벽의 문을 열었다. 그때 습한 안개가 철책 너머 산맥을 두텁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여기’와 ‘저기’를 가르던 서슬 퍼런 철책의 경계가 안갯속 어딘가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장관이네’라고 읊조렸다.

낯선 막사의 을씨년스러움과 전장의 긴장은 어느새 안개 너머 신비로운 경외감으로 치환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낸 이틀 동안 아침마다 노래가 흘러나왔다. 상투적인 선율이었을지 모르나, 고립된 환경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법이다. 그 노래는 거친 스피커를 타고 북녘을 향해 소리를 굴려 보내듯 애잔하게 울려 퍼졌다. 2박 3일의 일정을 마치고 전방에서 내려온 뒤에도, 그 새벽 초소에서 들었던 두 곡—이재성의 〈기타 하나 동전 한 잎〉과 사랑과 평화의 〈던져진 동전이 굴러가듯이〉—은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1-2. 다시 만난 노래

대학 교정으로 돌아온 뒤, 나는 그 노래를 다시 마주했다. 당시 대학 가는 수업을 이어가기에는 지나치게 음울하고 척박한 사회적 환경 속에 있었다. 최루탄 연기가 가시지 않은 캠퍼스를 뒤로하고, 아침 햇살이 비치는 푸른 잔디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보던 시간들. 그 틈을 타 교내 방송국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는 전방에서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질감으로 다가왔다.


잔디에 누워 들으면 삶이 이유 없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았고, 걸으면서 들으면 내 몸 자체가 평화를 찾아 굴러가는 작은 동전이 된 듯했다. 특히 “던져졌다”라는 표현은 당시의 내게 매우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울림을 주었다. 비록 그 평화로운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북소리와 최루탄 소리가 교정을 뒤덮곤 했지만, 노래가 흐르는 그 찰나만큼은 나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간이었다.


1-3. 노래에 대한 맥락적 옛 기억

내 기억 속에 상주하는 이 두 곡의 공통점은 ‘기타와 동전’이다. 이 소박한 고리는 옛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층위에 깊이 스며 있다. 사실 그 시절에는 가수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예술 세계를 지향하는지가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이 노래들은 내게 하나의 ‘맥락적 기억’으로 남았을 뿐이다. 20대 초반, 그 특수한 상황과 공기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깊이 각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저 들려지는 것’과 ‘기억하며 들으려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 노래들이 휘발되지 않고 오히려 또렷해지는 것은, 지금의 내 상황 역시 노래가 담았던 그 원초적인 희망을 여전히 갈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4. 새로운 맥락적 기억

기억은 가벼운 일상 속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붙잡아 주는 내면의 힘이다. 지나친 의미 부여는 경계해야 마땅하나, 삶이 건네는 타당한 의미를 놓쳐서도 안 된다. 그런 내게 새로운 맥락적 기억을 선사한 계기가 찾아왔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과거 ‘사랑과 평화’의 일원이었던 분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 그는 나를 몰랐지만, 나는 그를 보는 순간 저장된 기억의 창고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기타 하나에 실려 데굴데굴 굴러가던 동전처럼, 내 삶의 궤적을 함께해 온 음악의 주인공, 유지연 님을 만난 것이다. 예배와 연주가 있던 어느 모임에서 마주한 그는 ‘육십 이순(六十 耳順)의 끝’이라며 자신을 낮추었으나,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연주와 노래는 청춘의 그것보다 더 생동감이 넘쳤다. 활기찬 목소리와 몸동작을 보며 나 역시 잠시나마 그 시절로 회귀하는 행운을 누렸다.


2. 새로운 노래를 만나다

2-1. 새 노래들

그로부터 한두 해가 지나, 유지연 님과 친분이 있던 지인으로부터 CD 한 장을 선물 받았다. 유지연 님이 부른 노래들이라는 설명에 반가운 마음으로 재킷을 살폈다. 다소곳이 세워진 기타 하나, 그리고 월계수 잎 같은 나뭇잎이 그려진 이미지는 마치 과거의 그 동전이 시간의 숲을 지나 우리 곁에 멈춰 선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앨범에는 열 곡이 수록되어 있었고, 그중 여섯 곡이 새로운 곡이었다. 제목 하나하나가 마음을 끈다. 타이틀곡인 〈소확행〉과 〈오랜 시간 걸었을 거야〉가 앨범의 중심을 잡고, 그 사이에 윤동주의 〈서시〉가 음악적으로 우뚝 솟아 있다. 시에 곡조를 붙인 〈서시〉를 제외하면, 모두 그가 직접 쓰고 다듬은 삶의 편린들이다.

2-2. 생기 넘치는 읊조림

이른 아침, 커피 한 잔과 쿠키 하나를 두고 새로운 노래들을 들었다. 트랙이 바뀔 때마다 서랍 속 낡은 기억들이 제 발로 걸어 나왔다.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었음에도 기억이 소환된 이유는, 이 음악들이 결코 과거와 절연된 채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번 트랙 〈사랑과 평화〉가 상징하듯, 노래들도 가수와 함께 자연스럽게, 그리고 제대로 나이 들었다.


옛 노래들이 세상에 부딪힐 용기를 호소했다면, 이순의 끝에서 태어난 이 노래들에는 현자의 관조가 깊게 배어 있다. 역동적이지 않다며 아쉬워할 이도 있겠으나, 이것은 나긋한 외침이자 생기 넘치는 읊조림이다.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며, ‘소확행’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마시는 커피 한 잔 속에 담겨 있다는 그 평범한 진리가 가슴을 친다. 삶은 그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파고드는 변화의 연속임을 노래는 증명하고 있다.


2-3. 삶의 궤적을 따라온 노래들

시대를 관통하는 노래에는 여러 결이 존재한다. 리듬에 몸을 맡기게 하는 노래도 있고, 과거를 소환해 새 생명을 불어넣는 노래도 있다. 하지만 유지연의 노래는 무엇보다 ‘가수의 삶의 궤적’을 정직하게 따라 흐른다는 점이 특별하다. 젊은 날 저 먼 하늘을 향하던 노래가, 이제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삶을 음유하는 노래로 변모하여 한 인생의 지평 위에 놓인 것이다. 시대가 열광하지 않아도 좋다. 노래가 부르는 이의 인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4.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서시의 정신

특히 이 음반에서 나는 윤동주의 〈서시〉를 다시 노래한 것을 주목해서 들었다. 많은 이들이 〈서시〉를 노래해 왔지만, 유지연의 〈서시〉는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는 자기 고백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조금 달랐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이 고백은 앨범의 다른 곡들에도 은은한 향기처럼 스며 있다. 젊은 날의 〈서시〉가 푸른 의지였다면, 나이 들어 부르는 〈서시〉는 인생의 신산(辛酸)을 겪어낸 뒤 비로소 내는 깊고 짙은 갈색의 노래다.



2-5. 나의 포크송

그렇게 데굴데굴 굴러온 기억의 동전은 세월이 흘러 故 김민기 님의 〈철망 앞에서〉에 잠시 멈춰 서서 다시금 나에게 묻는다. 그날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그 비운의 철책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너는 어떤 장벽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 앞에서 또 다른 노래를 부르며 그 답을 모색한다. 세계 곳곳의 새로운 장벽에도, 또 녹슬어 가는 철망 너머로도 여전히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듯, 안치환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 어찌 가난하리요, 우리 어찌 주저하리요”라고 나를 다독인다.


동시에 단호하게 응답한다. 젊은 날의 포크송이 고립된 마음을 어쩔 수 없이 어루만진 위로였다면, 지금 나의 포크송은 추억을 견고한 디딤돌 삼아 삶이 오롯이 나아갈 길로 나를 이끄는 견인(牽引)의 힘이다. 시대를 관통해 온 저항의 노래는 그저 혐오와 선동의 긴장이 아니라, 삶의 본질적 긴장을 직시하게 하는 노래였다는 것을 나는 점점 더 깊이 알아가고 있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고 불러야 할 노래가 있는 한 영혼은 결코 빈곤해질 수 없으며, 나의 노래는 세계 속에서 내가 부름 받은 소명의 다양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니 주저앉을 이유는 없다. 나의 포크송은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여 오늘 여기에서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게 하며, 마침내 모든 날을 ‘오늘’로 받아들이며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게 하는 가장 뜨거운 생의 동력이다.


3. 포크송에 실려 가는 나의 삶

음반을 다시 꺼내 들었다. 세 번째다. 내가 살아온 ‘맥락적 기억’ 속에 이 노래들을 하나씩 이정표처럼 세워 두고 싶다는 젊은 날의 후기가 다시 나를 깨웠기 때문이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위험과 긴장의 공간인 철책선 근무를 다시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긴장은 전혀 다른 곳에서 보이지 않게 스며들고 있다. 삶의 경계를 세워야 할 이유는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기타 하나로 자기 경계의 삶을 담아내려는 노래들을 ‘포크송’이라 다시 명한다. 드러나지 않은 채 인생의 궤적을 위협하는 힘을 경계하며 과거와 현재를 관조하고, 때로는 음유하고 저항하며 삶의 속살을 들춰내는 분투의 흔적, 이것이 진정한 포크송의 힘이다. 오늘의 시대에 포크가 다시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래와 노래를 연결하는 플랫폼은 많지만, 그 노래와 사람 사이의 접촉은 생각보다 얕고 헤어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사실, 나는 포크송을 조금 다른 결로 정의한다.
정해진 장르로만 생각하기보다, 느린 리듬으로 사유의 감각을 재조율하며 경계를 허물고, 불필요한 긴장을 조장하지 않는 노래의 태도로 이해한다. 무엇을 사랑할지, 어디서 다시 설지를 묻게 하는 노래의 철학으로 정의한다.


신경림 시인의 시어처럼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하다. (신경림, 〈길〉 중) 삶에서 자기 안으로 길을 만들어 내는 노래를 만난다면, 그것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가볍게 부르는 듯하나 우주를 내 삶의 방 한 칸으로 이끄는 이 노래들이 더 널리 알려지길 소망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잔
마시며 하루를 시작해
내게 주어진 시간들 얼마나 감사한지
진한 커피 향에 내 마음 덩달아 행복해지는 순간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것이 소확행 (…)
— 유지연, 〈소확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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