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안식 시학’의 영성 —
“세계와 공존하기 위해 기꺼이 물러서 여백을 만들 줄 아는 문장의 용기”
흔적의 현상학과 권력의 고고학
나의 글쓰기는 글 안에 여백을 만드는 수행입니다. 여느 글쓰기론이 신중하게 제안하는 ‘더 잘 쓰는 법’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일반적인 작문 방식이 더 손쉬운 이해를 위해, 더 강력하게 설득하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편의 글이 매끈하게 전달하기를 목표로 삼아 글의 가독성을 성과로 높이려 합니다. 그것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좀 더 다른 기준을 스스로 제시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어떻게 기술적으로 대중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완결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이 글쓰기가 어떤 철학으로 함께 사유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편의 글이 삶의 흔적을 기억해 내고, 삶의 규칙이 되고, 심지어 사회적 권력이 되며, 나아가 저항의 교리로 공동체적 순환을 이룰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 과정을 추적하여 제안함으로써 나는 글쓰기를 단순히 표현의 차원에서 존재와 체제, 그리고 정치의 층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모색합니다.
나의 글쓰기는 글을 잘 쓰는 기술은 아닙니다. 오히려 글이 놓치지 않고 ‘축적’ 해야 하는 사유의 층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글이 만들어낸 세계, 그것은 허구로 끝나기보다 손에 잡히는 실상이어야 합니다. 내 삶에 지층을 이루며 쌓여있는 글, 또 그 글 밖의 세계 장치들의 지층을 파헤쳐 드러내는 ‘글쓰기의 고고학’에 가깝습니다.
글이 일상에 가까워지는 시대의 명암
나의 글쓰기 언어가 침묵의 미덕으로 단순화되거나, 빠른 결론을 유보한다는 점에서 ‘정의(正義) 지연’이라는 모호함으로 오독될 위험은 항상 있습니다. 그걸 감안하고서도, 나는 여백을 구조화하는 ‘윤리적 기술’로 나의 글쓰기 프락시스를 실현하려 합니다. 글쓰기의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술의 지향점을 달리 보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는 ‘나의 글을 통해 한 번이라도 더, 이 세계의 속살을 사유하는 함축된 문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글쓰기가 글의 풍요로운 이 시대에 한 번쯤 시도해 볼 문학의 저항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느릿한, 그러나 어려운 글쓰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글을 통해 한 번 더 사유하고, 서로를 향한 돌봄을 구현하고, 마침내 진정한 안식을 공유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매일 디지털과 함께 살아갑니다. 손끝의 스크롤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알림은 순간순간 의식을 끊어놓습니다. 그 사이 텍스트는 쉼 없이 생산되고 빠르게 폐기됩니다. 솔직히, 이 범람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글은 많아지지만, 사유는 종종 표면만 훑고 지나갑니다. 한병철이 말한 ‘서사의 위기’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의미의 결핍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노출되는 환경에서, 사유하는 글쓰기는 존재의 깊이보다 가독성과 검색 가능성에 최적화된 ‘텍스트 힙(Text Hip)’으로 빠르게 치환되곤 합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반응과 가시성이 문장의 기준이 되는 플랫폼 환경이 만들어내는, 나도 모르게 따르게 되는 규율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글이든 쓴 사람의 고유한 사유가 들어있기에 함부로 얕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글을 단지 ‘정보 전달의 기술’로만 보는 태도만은 경계하고 싶습니다. 글은 본래 기억의 휘발을 막으려는 시도였고, 삶의 소멸을 견디기 위한 몸짓이었으며, 동시에 공동체의 질서를 조직해 온 정치적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자기 삶을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욕망’과 ‘공동체 유지를 위해 통제하려는 욕망’ 사이의 긴장을 끝까지 끌고 가며 글쓰기의 윤리를 나에게 묻습니다. 그 응답으로 글이 만들어지는 속도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글이 처음 태어난 자리—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머물게 하던 ‘새김’—으로 내려가 보려 합니다.
글의 기원과 변모—사라짐에 저항하는 기록의 정치학
일반적으로 글, 글쓰기의 기원은 정보의 전달과 함께 존재론적 결핍을 메우려는 ‘흔적’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 흔적은 개인의 뜨거운 경험이 망각이라는 차가운 심연 속으로 추락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붙잡아두려는 보존의 본능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간절한 보존의 의지가 돌, 종이, 혹은 디지털의 표면 위에 날카로운 ‘새김(Inscription)’으로 투사될 때, 비로소 무형의 기억은 유형의 유산이 됩니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시간의 비가역성, 즉 한번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삶의 유한성에 저항하려는 가장 원초적인 ‘기억 투쟁’의 산물로 남습니다. “나는 이곳에 존재했노라”라고 세계를 향해 내지르는 존재의 비명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순수한 흔적은 필연적인 변모의 과정을 겪습니다. 흔적이 타인에게 읽히고 반복 가능한 ‘기호’로 굳어지는 순간, 글쓰기는 제도화의 길로 들어섭니다. 흩어져 있던 개인의 흔적들이 공동체의 ‘규칙’으로 정렬되고, 마침내 특정 질서를 공고히 하며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권력’으로 변화(化)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글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뒤바뀝니다. 글은 밀려와 내 삶의 기억을 밀어내버리려는 망각을 막아주던 안식의 ‘방파제’에서, 타자의 진입을 가로막고 내부의 질서만을 수호하는 견고한 ‘성벽’이 될 수 있습니다. 성벽이 된 글은 이제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보다, 누군가의 침묵을 강요하는 통치의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 권력화의 층위를 ‘고고학’의 시선으로 파헤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는 고고학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나열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시대의 언어들이 어떤 지층을 이루며 쌓여왔는지, 그 수많은 말 중 무엇이 ‘정치적 법’이라는 지위를 얻어 군림하고, 무엇이 ‘소음’으로 치부되어 지하에 매립되었는지, 그 권력에 의한 글의 배치와 단절을 찾아내는 발굴 작업입니다. 나는 매 순간 나만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미 견고하게 구축된 규칙에 길들여진 채 문법의 권력아래 교정되는 글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언어’조차 승리의 순간 또 다른 규정의 문법이 되고, 새로운 성벽이 되어버리는 이 비극적 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나는 그 시작이며 전환점이며, 출구를 ‘검은 안식 시학’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투명하게 노출하고 정의하려는 ‘빛의 강박’에 맞서, 사물을 내 뜻대로 움켜쥐려는 주체의 장악 의지를 스스로 꺾는 일입니다. 사유하는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 해방은 더 날카로운 칼날 같은 문장을 벼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글을 하나의 의미만으로 단정하고 고집하는 것을 떨쳐내는 데서 일어납니다.
내가 쥔 문장의 힘을 스스로 내려놓고, 그 글이 만들어낸 성벽의 그늘 아래에서 타자와 함께 머무는 ‘낮은 자리, 여백’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검은 안식의 글쓰기가 시작됩니다. 글쓰기의 진정한 승리는 세계를-개인적이든, 우주적이든- 자기 사유로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와 공존하기 위해 기꺼이 물러서 여백을 만들어 낼 줄 아는 문장의 용기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단순히 비판의 감정이 아니라, 글의 권력이 실제로 어떻게 낮춰질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나의 전제를 지속해서 수정합니다. 이것들은 내가 실제로 문장의 권력을 낮추기 위해 쓰는 운용 규칙입니다. 오늘 나는 이제껏 생각해 온 네 가지 전제를 이렇게 제안합니다.
나의 글쓰기의 네 가지 전제
첫째, 명료성은 때로 통치의 문법이 됩니다. 나는 그 명료함을 경계합니다. 이해하기 쉬운 글이 선호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의 글쓰기론은 조금 다른 결을 가집니다. 명료함이 언제나 선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세계를 오독(誤讀)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명료한 글은 세계를 쉽게 구분하고, 그 구분은 배제를 낳으며, 결국 통치의 문법으로 기울어질 때가 많습니다. 나는 글쓰기를 개인의 ‘능력’이 아닌 ‘권력’의 문제로 확대해서 이해합니다.
둘째, 독자는 설득의 대상에서 ‘공터의 동거자’가 됩니다. 나는 독자를 내 글을 이해해야만 하는 수용자로 설정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인 ‘후킹(Hooking)’을 설계하는 대신 글에 여백을 만들려 애씁니다. 여백은 글의 빈틈이 아니라 시적인 함축이며, 타자의 사유가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는 설계입니다. 글이 어렵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독자가 자유롭게 글 속에 멈춰 설 자리를 제공한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글쓰기는 설득의 기술이 아닌 공존의 형식을 유지해야 합니다.
셋째, 논지는 글 속으로 들어가는 선명한 ‘문고리’입니다. 나의 글쓰기론에서 문법이나 논리는 단순히 중립적인 도구가 아닙니다. 모든 글은 직조되는 법칙을 따라 만들어져야 할 건축물과 같습니다. 나는 글에 담긴 ‘규칙이 누구에게 인식 가능하게 열려 있는가’를 되묻습니다. 논지는 한 두 문장으로 선명히 제시되는 것이 좋습니다. 글쓰기는 개인의 경험이 사회적 의식까지 아우르는 의도적 조각품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철학이 필수적입니다. 검은 안식은 저항의 교리화에 대한 경계입니다. 글쓰기가 새로운 교리가 되거나 감시의 잣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저자는 독자를 장악하려는 의지 자체를 해체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자기 성찰의 윤리를 지향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자기 해체의 윤리가 구체화된 것이 ‘검은 안식의 철학’입니다. 결과적으로 나의 글쓰기는 선형적 구조가 아니라 ‘존재→제도→정치→윤리’의 지층을 따라가려 애씁니다. 특히, 글에 담을 나의 철학이 무엇인지는 중요합니다. 그것은 글쓰기 이전에 이미 몸 안에 쌓여있는 지층(智層)이어야 합니다.
검은 안식의 시학: 권력의 자기 해체와 근원적 비움으로서의 글쓰기
오늘날의 글쓰기는 ‘더 빨리, 더 명확하게’라는 과잉된 활동성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투명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강박은 모든 존재를 설명 가능하고 지배 가능한 데이터로 만들려 하며, 명료함이라는 미명 아래 세계를 토막 내어 분류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멈춰 묻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밝게 비추어 명명할 때,
그 빛 뒤로 영영 밀려나 버린 어둠의 진실들은 어디로 가는가?”
내가 제안하는 ‘검은 안식’은 지식의 부재를 뜻하는 무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억지로 밝히지 않음으로써 대상을 보호하는 윤리’이며, 주체의 장악 충동이 스스로 멈춰 서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타자의 침묵과 고통을 억지로 조명하여 서사화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며, 규정하려 서둘렀던 손을 천천히 거두는 인내입니다. 주체가 스스로 그늘이 되어줄 때, 타자는 주체의 조명 아래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본연의 빛과 어둠 속에서 비로소 숨을 쉽니다.
이 시학은 한병철이 말한 ‘관조적 삶’의 글쓰기적 실천이며,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말의 권력을 스스로 낮추는 수행입니다. 이를 위해 나는 ‘검은 안식’을 실현하는 구체적이고 치밀한 ‘윤리적 기술’들을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정의(定義)를 지연시키기: 마침표를 늦추면, 타자의 숨이 들어올 시간이 생깁니다. “~이다”라는 단정적 마침표는 세계를 고착화합니다. 나는 대신 “~일지도 모른다”라는 쉼표의 공간을 남깁니다. 결론을 유예함으로써 글은 닫힌 감옥이 아니라 사유가 흐르는 통로가 됩니다.
대표 대명사를 점검하기: ‘그들’이라는 한 단어는 종종 얼굴을 지웁니다. 사실, 나는 얼마나 자주 “그들,” “약자,” “소외된 자”라는 편리한 범주 속에 개별적인 삶의 표정들을 지워왔을까요? 나는 집합적인 명사 뒤에 숨은 삭제의 폭력을 경계하고, ‘우리’라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언어적 폭력을 거부합니다.
설명보다 증언을 선택하기: 설명은 의미의 변화를 닫아버리지만, 증언은 남겨둡니다. 타자의 삶을 해석하여 나의 논리 체계에 편입시키기보다, 어떤 논리로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삶의 결을 있는 그대로 들려줍니다. 글쓴이가 심판관이나 해석자가 아닌, 곁을 지키는 증언자가 될 때 글은 비로소 윤리적 힘을 얻습니다.
여백의 구조화: 나에게 여백은 편집의 결과물이 아니라 전략적인 ‘공간의 설계’입니다. 문장과 문단 사이에 의도적인 단절을 두어, 저자의 논리가 독자를 압도하며 질주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빈 공간은 독자가 자신의 맥락을 가지고 들어와 머무는 ‘접속 단자’가 되며, 저자의 권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공터가 됩니다.
수행적 자기 해체: 비판의 언어는 가장 쉽게 교리가 됩니다. 권력을 비판하는 내 글이 다시 누군가에게 감시의 잣대가 되지 않도록, 글의 말미에 나의 한계를 명시하고 해석의 여지를 열어둡니다. 이는 저자의 주도권을 독자에게 반납하는 행위이며, 문장의 오만을 덜어내는 안전장치입니다.
이런 기술들은 나의 글쓰기를 하나의 ‘수행’으로 이끌어갑니다. 결국, 나의 글쓰기는 문장과 문단 사이에 의도적인 단절을 두어, 저자의 논리가 독자를 압도하며 질주하지 못하게 막는 ‘쓰기 영성’을 실행합니다.
쓰기 영성은 곧 검은 안식의 시학과 잇대어 있습니다. 이 시학은 명쾌한 글로 빨리 나아가기 전에, 한번 뒤로 물러서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어두운 길에 들어서 천천히 걸어가며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져 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글이 투명해야 한다는 단견에 맞서 낯설고 복잡한 어둠의 권리를 복권시키는 일입니다. 글시작을 가장 낮은 곳에 두고 점차 느리고 깊은 자기 저항으로 이어가는 글쓰기입니다. 경험과 사유의 연속, 명사와 명사 이어가기, 동사와 명사의 도치, 짧은 문장의 점층적 연속 등이 그 예입니다. 이것들은 쓰기의 기교가 아니라, 쓰는 행위를 서두르지 않고 늦춰가려는 내 몸의 태도들입니다.
결론: 검은 안식의 윤리적 프락시스—하향성의 문장으로 열어가는 샬롬
지금까지 나는 글쓰기가 지닌 존재론적, 인식론적, 정치적 지층을 따라가며 그 권력성을 해체할 가능성을 탐색했습니다. 글쓰기는 본래 소멸에 저항하는 처절한 ‘흔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질서의 형식을 갖추며 ‘규칙’이 되었고, 삶을 견인하고 막아주는 ‘방파제’로 자리매김되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의도하지 않게 타자를 규정하고 배제하는 지배의 ‘성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어떤 성벽을 부수는 망치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글쓰기, 글의 양면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저항의 망치조차, 역설적으로 그것을 휘두르는 순간 다시 누군가를 내리치는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비판의 언어 속에 숨은 ‘장악하려는 의지’를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해방이 주도권이 글로 힘을 가지려는 ‘의지 자체의 자발적 퇴각’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천착하는 ‘검은 안식 시학’은 바로 그 퇴각 지점의 경보음처럼 세워진 윤리적 비움의 실천(Praxis)입니다. 이것은 타자를 나의 문법 체계에 가두어 요약하지 않겠다는 성찰적 약속이며, 글을 쓰는 주체 내부에 자기도 모르게 견고하게 올라가는 성벽을 자각하고, 스스로 허물어 타자가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빈터’를 마련하는 돌이킴이기도 합니다. 투명성이라는 요구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기준일 때가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투명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투명한 글이라는 기준도 조금 달라져야 합니다. 논지 전개의 촘촘함과 ‘여백’이라는 빈터를 허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다 밝히지 않아도 스스로 말하는 글 자체의 권리가 글 속에 이미 안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글쓰기론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더 강한 문장’이 아니라 ‘더 부드럽고 낮은, 여백을 가진 문장’입니다. 하여,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멀어버린 시대에, 나는 잠시 불을 끄고 어둠에 익숙해지며 사물의 본연의 윤곽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제동(齊同)의 문법’을 선택하겠습니다. 쉬운, 명료한 글을 쓰는 중에도 다양한 사유를 촉발한 개념 하나를 이정표처럼 세우는 일을 간과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오늘날 글쓰기가 여전히 힘을 가질 수 있다며 잘 쓰인 글을 요구한다 해도, 그 글이 언제든 다시 권력으로 굳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책의 출판도 자칫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라져 가는 모든 흔적을 유물처럼 아끼고, 마침표보다 쉼표를 사랑하며, 저자의 자리를 비워내는 이 느릿한 보행을 더 잘 수행하겠습니다. 그 걸음을 빠르게 걷는 순간, 나의 글은 다시 높은 성벽으로 세워질 위험을 직시하겠습니다. 그렇게 고요한 안식의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새겨지는 자취로, 또한, 문장의 촘촘함을 글자 이어 붙이기 아닌 단어의 여백으로 성취하는 글쓰기야말로 문자의 폭력을 넘어서는 가장 깊은 저항이자, 나의 시대에 바치는 마지막 돌봄의 언어라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영원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