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7일 vs 2026년 1월 27일
같은 날짜가 다시 왔다. 4년 전에 남겨둔 기록을 꺼내보니 거기에 오늘 해야 할 과제가 하나 들어있었다.
“언젠간 시들어 사라질 날을 정중히 맞이할 나의 사랑이 언제나 필요하다”
라는 대목이다.
오늘 그 일을 해야 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대단한 사건은 없었다.
다만 물을 주었고, 잎을 만졌고, 어떤 날에는 잊었다.
그리고 오늘 그 마지막 잎이 삶을 다했다.
새싹 (2022년 1월 27일의 글)
1.
이천 로뎀의 집, 지난해(2021년 12월) 초겨울.
마당 한편에서 시들어가던 넝쿨 식물이 안쓰러워
나는 그 화분을 서재로 옮겨왔다.
어젯밤,
뿌리까지 물을 흠뻑 적셔 주었더니
앙증맞은 새싹 같은 꽃봉오리가 입을 꼭 다문 채 고요하다.
내일이면 태어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기꽃을 기다린다.
2.
서재에 처음 이사 오던 날,
나를 기념하려 가볍게 사 들인 하트아이비는
더위와 추위를 잘 견디며 뿌리를 내렸고
잎은 어느새 초록초록해졌다.
오늘도 물을 햇살처럼 뿌려 주다,
밤사이 태어난 연한 녹색 아기잎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3.
창가를 지키는 민트는
거의 일 년 동안 어떤 환경에도 꿋꿋하게
진초록 잎을 쉼 없이 내고, 지고, 또 낸다.
오늘도 물이 잠길 만큼 흠뻑 적셔 주고
낡은 잎과 가지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잘라 주었다.
며칠 전 따서 말려 둔 민트잎을 보았다.
여릿한 잎들이지만, 잘 마르고 나면
고요한 저녁, 달비치는 창가에서
향기 좋은 민트차를 즐길 수 있다.
4.
잎이 나고 자라고 떨어지는 이 숭고한 과정에는
환한 햇살과,
가벼운 바람과,
따뜻한 손길과,
언젠간 시들어 사라질 날을 정중히 맞이할 나의 사랑이
언제나 필요하다.
추도(2026년 1월 27일)
1.
며칠 이어진 강추위에 서재를 비워 둔 채 여행을 다녀온 사이,
아쉽게도 민트잎이 거의 말라 푸석해졌다.
물을 주고 가는 것을 깜빡한 탓에
더 빠르게 말라 버린 것 같았다.
2022년 1월 27일 이후,
서재에 함께 머물렀던 빈카 미노르, 하트아이비, 그리고 민트는
그 초록빛 생을 마감했다.
미노르는 노지보다 집 안에서 더 보라색 꽃을 피웠고,
하트아이비는 쭉쭉 뻗어 나가는 성장력으로
작은 초록빛도 웅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민트는 생각보다 짙게, 잎사귀 하나하나에서 차향을 우려 내
아침을 행복하게 깨워 주었다.
마른 줄기와 여린 잎만 남은 화분을 보며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다.
그동안 이 식물들 덕분에 행복했는데,
이제 그날들을 추억 속에 밀어 두어야 한다니 괜히 미안하다.
4년 전 식물들이 서재에 들어온 날, 나는 한 문장을 남겼다.
이 글은 그 문장에 대한 대답이다.
식물에 대한 나의 추도사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식물들이 남겨준 유언 같은 말은 분명하다.
“아무 변화가 없는 듯해도 생명은 역동한다”는 것이다.
2
꽃과 식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
씨앗이 죽어, 다행히 싹이 나오면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그 생은 자연스럽게 스러진다.
이 일련의 생애가 나는 무척 경이롭다.
어느 과정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성장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식물은 오직 ‘자라감’에만 집중하는 삶 같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과는 단호하게 단절하는 듯하다.
식물은 일시적이지만
그의 생애는 길이로 말하지 않고
일관된 흐름과 깊이로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꽃 앞에 매일 내가 서 있었다.
보기에 좋았고, 먹기에도 좋았으며, 다듬기에도 좋았다.
나쁘다고 할 것이 없던 ‘좋음’의 시간이었다.
솔직히, 자연의 순리를 따라 작별한다고 하기엔
나의 부주의가 더 컸다.
그래서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어쨌든 그 식물들과 이제 작별한다.
문득, 사람의 자리를 부여받은 나는
식물과 달리 ‘영원’을 꿈꿀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영원’을 생각하고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
오늘따라 더 경이롭다.
그렇다고 죽음 너머까지 살아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어떤 질적인 변화를 거칠지 알 수 없다.
다만 영원을 사모하는 내가,
주어진 시간을 넘어갈 수 없는 식물을 추도하는 일이
어쩐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꽃은 졌지만, 이 식물이 생멸하는 동안 그 미세한 변화 속에서
인간인 나에게 유연한 하루를 선물해 주었다.
그들의 생애는 정해 둔 결과, 목적을 순조롭게 달성했다는 뜻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자기 생으로 일깨워주었다는 뜻이다.
그 식물들과 지내는 동안 나는
‘스스로 일어나는’ 사건에 내 몸을 맡기는 법을 배웠다.
꽃의 성장처럼 리듬과 강약, 어조만 있어도
내 몸은 충분히 강건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요한 듯 거침없이
속 깊은 강처럼 하루가 유연하게 흘렀다.
그 사이 나도 꽃과 식물처럼 보이지 않게 성장했다.
꽃이라면 벌써 피고 저버렸을지 모를 변화지만
다행히 아직 나는 남은 생애를 누리고 있다.
그러니 식물에 대한 나의 추도는 나의 성과를 되묻는 것이 아니다.
눈에 확연한 식물의 변화에는 민감하면서도
흔적 없이 흘러가는 내 삶의 변화에는 둔감해지지 않도록
나를 한번 더 깨우기 위한 대답이다.
3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이 이어지는 동안
내 삶(몸)은 수 없는 변화를 겪는다.
나이는 시간이 아니라 몸의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과 밀접하다.
미미하고 세밀한 것에 얼마나 민감한가 하는 것이
나이 듦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내 몸에서 변화는 마치 자연 속에서
모든 사물이 보이지 않아도
물길이 틀어지듯 전환점이 생기고,
연한 굴곡이 쉼 없이 역동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역동을 민감하게 받아내는 날은 드물다.
사건이 일어나야만 한다.
몸을 자극하는 충격이 있어야만,
우연한 상상이 현실처럼 나타나야만
그 변화가 기억된다.
마치 한겨울 얼어 버린 강물 위로
거친 바람이 불어 쌓인 눈을 날려 버리는 것 같은 현상ㅡ
그런 일이 있어야만 나는 비로소 변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변화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미세하고 가벼운 현상 속에서 이미 충분히 일어나고 있었다.
#1. 겨울 소리
밤의 정점, 어제와 오늘이 교차하는 시간에
우연히 ‘겨울 소리’라는 노래를 들었다.
노래한 이들의 거의 완벽한 조화,
겨울을 환상으로 그려 내는 배경 영상,
시처럼 조밀한 리듬이 살아나는 가사.
잠들기 전의 밤에 참 잘 어울렸다.
그들은 절제하면서도 당당히, 걸어가듯 노래를 이끌었고
홀로 오롯이 서 있으면서도 함께 어우러졌다.
네 명이 일궈 내는 잔잔하면서도 역동하는 분위기는
맑은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 같은 노래가 되었다.
바람만으로도 밀려갔다 밀려오는
겨울 호수의 물결 같기도 했다.
유연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움직이는 삶처럼 들린다는 것,
그것이 이 노래의 묘미였다.
마침 시인 정지용의 <호수>도 읽었다.
얼굴 하나야 / 손바닥 둘로 /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 호수만 하니 / 눈 감을 밖에
‘눈을 감는다’는 그 말에
고즈넉하게 출렁이는 호수가 그려지고,
그 앞에서 그리움을 쏟아냈을 시인이
또렷하게—어쩌면 과하게 또렷하게—드러난다.
깊은 밤, 겨울, 호수.
이 노래와 저 시는 물과 바람이 그림처럼 어울린
적막한 밤길이 된다.
별일 아닌 듯한 이 순간이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내다보는 나로 하여금
마치 호수 둘레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이렇게 나는 새벽, 아무 일 없는 것 같아도
호수에 끌리듯 상상하며 그 길을 걷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내 몸 안의 세포들이 어떤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2. 어디나 바다, 고기가 머문 물이 곧 바다다
코로나 19가 한창일 때 개봉된
디즈니·픽사의 영화 <소울>(2021)도 다시 생각한다.
이 영화는 상상과 현실을 가볍게 오가며
삶과 죽음, 그 사이에 머뭇거리는 존재를 비춘다.
그중 한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어린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라 불리는 세계를 동경하며
멀리 찾아가려 한다.
어른 물고기는 다독이며 말한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라고.
"여기가 바다"라고.
하지만 어린 물고기는 납득하기 어렵다.
여기는 그저 ‘물’ 일뿐이고, 바다는 멀리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른 물고기는 거듭 말한다.
바다를 찾아 멀리 가는 것이 숙명이 아니라
자신이 머무는 이 물을 바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지혜로운 태도라고 말이다.
어른이 경험한 세계에서 완전한 파란색은 없기 때문이다.
여릿하고 하늘하늘한 파랑이라도,
옅은 초록과 파랑이 뒤섞여도,
그 틈에 희고 검은 방울이 알알이 박힌 듯해도
그곳은 이미 바다일 수 있다.
물론 아기 물고기에게 그것은 여전히 바다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누가 옳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삶이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것만이 운명이 아니라,
삶에 뿌려진 숱한 씨앗들이 폭발하듯 발아하는 순간을
만끽하는 것 또한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가장 역동적인 삶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세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도 말이다.
고요한 가운데서도 생동하는 흔적은 늘 있기 마련이다.
바람이 물 위에 불고,
물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동안
생명은 미동도 없이 살아난다.
마치 내 서재에 머물렀던 초록 식물들이
매일 거듭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처럼.
나는 어른 물고기가 말한 그 상상,
아기 물고기가 간청하는 그 바람을
이미 내 식물들에게서 발견했었다.
영화 같은 세계는 곧 내 삶에 일어나는 작은 현실이었다.
나는 그 속 깊은 의미를 매일 찾아가고 있다.
진정한 변화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현실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한편 물과 바람이 어우러진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것은
내가 고대 히브리 문헌에서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이미 발견한 사실이기도 했다.
어둠이 담긴 물 위를 휘감아 도는 바람,
야훼의 영이라는 그 바람이
이 세계를 견고하게 지켜 낸다는 것을
나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3. 미세한 관찰과 세심한 어휘들
아침 차를 마신 뒤,
정민의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선비의 독서법, 연암의 산문 미학』(태학사, 2020)도
새롭게 기억났다.
저자가 갈무리한 연암은
이 세계에 대한 깊은 관찰과 세밀한 묘사를
쉼 없이 연습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빈약한 어휘력이 곧 표현 능력의 단순함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또한 의사 김건종이 단어 80개로 묶은
『우연한 아름다움』(에이도스, 2021)도 마찬가지다.
그가 남기고 싶은 삶은
자신이 관찰하고 발견한 단어들의 의미였다.
내리는 눈, 하얗게 덮인 세계,
가을 햇살과 겨울 햇살의 보이지 않는 결 차이,
낙엽이 덮어 버린 겨울 산,
바람이 피부에 닿는 미묘한 느낌—
그런 것들이 그의 관심사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런 미세한 느낌을 포착할 수 없다면
어른의 연륜이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권면한다.
나도 동의한다.
4
함께 살았던 식물이 내 곁을 떠난 날,
나는 다시 일상을 유지한다.
누가 보더라도 식물의 죽음은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미미한 사건은
내게 일어나는 큰 변화다.
물 흐르듯 지나가 버렸으나,
분명 거대한 사건이다.
무엇보다 이날,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삶이
‘걸음’을 걷는 것 같은 작은 발걸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확정하기 때문에 큰 사건이다.
마치 길을 걷는 일과 같다.
길을 걸으면
들에 핀 이름 없는 꽃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고,
하늘이 숱하게 모습을 바꾸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바다가 무한한 색의 조합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걸을수록,
또 해를 거듭할수록
이 세계가 얼마나 조밀하고 미묘한지
체감하는 중이다.
삶은 느닷없이 변곡점을 던진다는 것도 실감하는 중이다.
그러니 물처럼 유연하게 흘러간 하루,
아무 일 없는 순간,
그저 소리 없이 물 위를 휘감아 도는 바람 같은 하루라도
지구가 멈추는 것 같은 거대한 사건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겠다.
아무 일 없어 무료하게 보이는 날,
괜히 피곤해 글 하나 쓰기도 힘겨운 날이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 삶은
꿋꿋하게 잘 흘러가고 있다.
식물들이 모두 떠난 날, 아쉽지만
그들이 남겨 둔 유언 같은 삶의 지혜로
기분 좋은 하루를, 잘 안착해야겠다.
하루라도 영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