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을 바라보기’에 대한 해석

신의 피찰성(被察性)

by 푸른킴

*이 글은 최근 출판된 한병철의 『신에 관하여: 시몬 베유와의 대화』의 첫 주제인 ‘주의(注意)’를 철학신학적으로 그 기본 개념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유대문서와 기독교적 관점이 적극 반영된 글입니다.

1. 문제 제기: 주의에서 관찰로

보이지 않는 신을 ‘믿으려는 용기’는 그의 존재성을 오래 ‘주의(注意)’하는 것이며, 이는 곧 신을 응시하는 ‘바라보기’입니다. 신과 거리를 두거나, 아예 신의 부재를 선언하려는 두 행동은 어떤 경우라도 결국 신에게 주의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어떤 것도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마음의 시선이 어디에 걸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것은 신을 응시하려는 힘이 인간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신이 가까이 다가오는 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라보기’는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시몬 베유를 인용하며 사용한 ‘신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 ‘주의’는 그저 신을 탐닉하는 것(먹기)이 아닙니다. 바라보기입니다. 탐닉이 음식을 먹는 것에 비유되는 행동이라면 바라보기는 신을 응시하는 방식입니다. 나아가 신의 부재 같은 오랜 침묵에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시몬 베유의 견해에 근거한 한병철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신의 현존은 인간의 지속적 ‘경청’ 능력에 의해 드러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채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보이지 않는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을 ‘찾아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신이 발견되는 어떤 조건을 인간이 찾아내는 것을 함의합니다. 나는 이것을 ‘신의 관찰되어짐,’ 즉 신의 ‘피찰성(被察性)이라 부르려 합니다. 인간이 신을 관찰하기에 앞서, 신이 자신이 관찰되도록(被察=wird beobachtet) 허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주의는 시간을 부여하는 관찰이며, 관찰은 주의를 지속시키는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피찰성은 신의 자기 계시와 관련 있을까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신은 세계 안에서 인간이 자신을 알아채도록 스스로 움직이고 있기에 인간은 그가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견하기만 하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찾으려 직접 ‘탐구’하는 인간에 앞서 신은 자신이 ‘찾아지도록’ 곳곳에서 자기를 계시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을 찾아내는 첫 행동은 인간이 ‘기다리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한병철의 주장을 빌리자면, ‘오래 기다림’의 문제, 신의 움직임을 ‘주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에 대하여’ 인간이 할 일은 신의 움직임이 자신에게 더욱 드러나도록 이 세계 속에 시선을 집중하는 것, 즉 ‘주의’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 끝에 인간은 신의 현현을 자기 눈으로 목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라는 태도는 기다림이고, 침묵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랜 관찰, 응시라는 말 역시 ‘관찰하게 함,’ ‘말없이 응시로만’이라는 의미와 연동할 수 있습니다. 이 ‘피동적 관찰’이 신의 실존을 인간의 세계 속에 가시화하는 촉매인 것입니다.


나는 한병철이 제시한 ‘주의’와 ‘바라보기’라는 용어를 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핵심적 태도로 수용합니다. 하지만, 좀 더 나아가 이를 나의 삶 속에서 구체화하는 실천적 태도로서 ‘피동적 관찰’이라는 용어로 재명명합니다. 신이 자신을 관찰하도록 보여주는 것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찰성을 인식하는 것은 바라보기의 구체적인 생활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주의’와 ‘바라보기’가 신을 향한 존재론적 태도라면, ‘피동적 관찰’은 삶의 현장에서 구현되는 구체적인 방식이자 세계를 읽어내는 구체적인 프락시스(praxis)입니다. 결국, 신의 현존은 신의 자기 계시이며, 인간의 지속적인 경청 능력에 의해 점차 드러나는 기다림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나는 바라보기, 관찰됨이라는 행위를 신이 자신의 속성을 인간이 발견할 수 있도록 스스로 인간화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 글은 한병철의 『신에 관하여: 시몬 베유와의 대화』의 첫 번째 주장(즉 ‘주의’)에 멈춰 서서 응답하는 것입니다. 책의 첫 부분, 「주의」의 몇 단락에 대한 사유입니다. 그의 말을 따라, 나도 신의 존재가 인간의 눈에 현재화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찾도록 허용한’ 그를 ‘응시하고,’ ‘기다리다’ 끝내 신을 만나려는 의지에 의해서만 현현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다시 말해 신 존재 탐구는 신의 자기 존재 증명을 인간이 수용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피동적 관찰, 즉 ‘바라보기’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바라보기를 ‘피동적 관찰’이라고 재명명한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주의’가 ‘바라보기’의 태도라면, 관찰하도록 허용한 존재를 바라보는 것은 그런 태도의 구체적 실현입니다. 세계 속에서 신을 기다리며, 마침내 신의 존재를 찾아내는 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컨대, 신의 현존은 신 자신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인간이 자신을 관찰할 수 있도록 허락한 신의 배려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를 관찰해 내려는 인간에 의해서만 가시적으로 역동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고대로부터 신, 특히 야훼(YHWH)의 행동이기도 했고, 그런 야훼를 자기 세계에서 인식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구체적 사건으로 입증된 주제입니다. 그들은 미시적인 일상에서 신의 자기 계시를 주의하며 기다리고, 마침내 그것을 감지해 낸 이들입니다.


텍스트 근거: 시편 103편 8절

나는 이제 한병철이 주장(시몬 베유의 견해겠지만)하는 신에 관한 ‘바라보기’를 ‘피동적 관찰’로 확장하여, 신에 관하여 ‘주의’하는 삶의 방식이 타당한 이유를 고대 문헌으로부터 찾아보려 합니다. 그리하여 그 근거를 통해 신이 ‘관찰하게 한다’는 것이 신의 현존을 입증하는 근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좀 더 생각해 보려 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신의 인간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증명을 오늘날 현대인들이 자신을 설명하는 한 방식인 ‘MBTI’라는 틀로 추론해 보려 합니다. 여기서 MBTI는 오늘날 사회적으로 대유행하는 분석 도구가 아니라 어떤 존재에 대한 유형별 프레임을 설정하는 하나의 도구로 활용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화의 이유는 신을 기계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기라는 ‘주의의 훈련’을 한번 더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불특정한 성향일수록 어떤 유형화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의 속성상 불확정적 태도는 인간이 이해불가한 영역입니다. 따라서 예전 히브리인들처럼 텍스트 속 반복되는 신, 즉 야훼가 어떤 유형인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현존이 인간에게 어떻게 가시화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야훼를 주목하는 시선에 앞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야훼의 자기소개와 1인칭 주체 행위가 반복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편 8절에서 이에 대한 한 증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시편 103편의 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래 기록된 문장과 이에 대한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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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구절을 선택한 이유부터 말해야겠습니다. 본래 이 표현은 시편 103편에서 8-13절의 맥락에 자리합니다. 하지만 이 단락에서 특히 바로 이어지는 문장(9-10절)에서 이 구절을 분리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구절이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주로 회자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 성경의 다른 곳에서 비슷한 형태로 반복 등장합니다. 우선,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는 신의 직접적인 ‘자기 발화’로, 요나서 4장 2절에서는 예언자 요나가 경험한 간접적인 발화로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 구절은 공유되는 문장과 함께 차이나는 구문도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조금 다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야훼가 자신을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소개하는 반면, 요나서에서는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자기 경험을 덧붙입니다. 그런데 시편 103편은 이 두 구절의 표현을 종합한 노래로 보입니다. 신의 자기 발화, 예언자의 경험적 선언을 종합하여 신을 응시하는 인간의 태도를 더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103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시편 103편을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추론할 수는 있습니다. 그가 쓴 노래 속에서 그가 쓴 단어나 문장 또는 표현, 어투, 문체들이 그 단서입니다. 그것들에 따르면 한 가지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평소에 야훼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그는 젊은 시절 삶의 온 힘이 다 빠져 기진맥진한 적이 있습니다. 인생의 끝자리까지 곤두박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야훼의 도움으로 다시 독수리가 솟구치는 것 같은 회복을 얻었습니다(참조. 103:5). 그뿐 아닙니다. 이 시인은 야훼가 불의한 일들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는 정황도 구체적으로 경험했습니다(참조. 103:6). 그 경험을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관점으로 재서술합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시인은, 야훼는 물론이고 그의 피조물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잘 알게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그중 하나가 인간인 자신이 야훼 앞에서 ‘먼지’라는 정체성 인식입니다. 결국, 이런 자기 인식을 따라 시인은 자신이 야훼를 관찰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식을 다시 일깨웁니다. 그리고 그 일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것은 야훼를 향해 시선을 두고, 무릎을 꿇고 존경을 표하는 일이었습니다. 야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인이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축약된 사례들만 보더라도, 이런 관찰은 야훼를 탐닉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며, 그를 믿으려는 용기를 드러내는 일로 보입니다. 결국, 그는 생의 전 과정을 통해 야훼를 관찰하고 그 끝에 다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야훼를 인간의 눈으로 ‘완전히 규명’한다기보다, 반복되는 자기소개를 통해 드러나는 경향을 읽어내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세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듯 야훼가 어떤 성향인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어떤 행동 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권리가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나 한병철이 천착하듯 신은 ‘현존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기에 인간이 그에게 시선을 두고 바라본다면 신은 인간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고대 시인은 이미 간파했습니다. 이제 그 시인이 야훼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 현존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증했는지 찾아보려 합니다. 시편 103편을 조금 더 분석해야겠습니다.


3. 속성의 틀: 야훼의 ‘자기소개’와 RhAH

시인이 관심을 집중하여 노래하는 주제는 이 시의 7-18절 사이에 있습니다. 이 단락이 노래의 중심입니다. 시인은 자기 경험이 타당하다는 것을 역사 속에 남겨진 구절에서 찾아옵니다. 그 증거 구절은 출애굽기 34장 6절입니다. 이 구절에는 모세에게 야훼가 스스로 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야훼는 모세를 향해 스스로 평가하기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흘러 유다의 초대 왕 다윗도 이 구절을 가져다 사용했습니다(시편 86편). 더 후대에 야훼에 대립각을 세웠던 예언자 요나도 이 표현을 가져다 야훼를 압박하는 자기주장을 펼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런 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히브리인들 사이에 야훼가 스스로 밝힌 이 속성이 하나의 전형적인 틀로 고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단어들의 순서를 다르게 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덧붙기도 했지만, 이 표현들에는 공통적으로 다음 4가지 요소가 언제나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리 말한다면, 이 네 요소를 분석하면, 이 표현들 속에 야훼 자신의 안과 밖의 상태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야훼가 자기 속성에 대해 스스로 말하는 이른바, ‘자기소개서’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네 요소는 야훼의 내외적 정서와 삶의 지향성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인들의 언어를 따라, 이 네 가지 요소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R(라훔)은 ‘긍휼이 많으시고’입니다. 즉 희생적 긍휼을 의미합니다.

둘째, h(한눈)는 ‘은혜로우시고’입니다. 다시 말해, 자상함을 함의합니다.

(헤세드의 H와 구별하기 위해 소문자 h로 표기합니다.)

셋째, A(에레크 아파임)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입니다. 인내라는 뜻입니다.

넷째, H(헤세드)는 ‘인자하심이 풍부하다’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절’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이 짧은 구절에서 야훼는 자신의 속성을 스스로 드러내고, 인간은 그 말을 자기 방식대로 변용하지만, 결국 야훼의 말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즉, 야훼 스스로 자기 속성을 말하는 것과 인간이 그렇게 이해하는 것에 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속성은 거의 고착화된 야훼의 정체성과 관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네 개의 속성을 하나의 단어처럼 이렇게 명명합니다. 바로 ‘RhAH’입니다. 따라서 시편 103편의 관건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그 말이 반복될 때 형성되는 야훼의 행동 양식을 주의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내가 말하는 피찰성이 바로 이 반복 구조 속에서 드러납니다. 야훼는 침묵하는 듯 보이지만,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다시 말함으로써 인간의 주의를 다시 불러 모으기 때문입니다


4. 번역의 윤리: 불완전한 렌즈의 필요

4.1 ISFJ라는 렌즈: 유익과 경계

이제 나는 야훼의 속성으로 RhAH가 어떤 의미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네 개의 속성을 야훼의 내적 정서와 외향적 행동으로 구분해서 살펴하려 합니다.


먼저 야훼의 내적 정서입니다. 앞서 본 대로 ‘희생적 긍휼’과 ‘자상함’입니다.

첫째, ‘라훔(Rahum)’은 어원적으로 아이의 탄생과 양육과 직결되어 있는 말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부모가 쏟아붓는 사랑의 결정체—생명을 품고 견디는 힘의 결—이 바로 이 ‘라훔’입니다.

둘째, ‘한눈(Hannun)’은 상대를 대하는 정서를 한눈은 말을 들어주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며, 마음이 안정되도록 돕는 수용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태도를 수용합니다. 받아들이고, 그 말이 두려움으로 꺾이지 않도록 안심의 길로 안내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외적인 태도는 어떤가요.

첫째, ‘에레크 아파임(Aerek Apaim)’은 ‘길다’라는 단어와 ‘화’라는 말이 복합된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화를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화를 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화를 내야 할 시점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기다림 속에서 화는 거둬들여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화’의 없음이 아니라 ‘발화’의 지연입니다. 즉석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둘째, ‘헤세드(Hesed)’는 세밀한 친절과 배려입니다. 이것은. 타인을 편견으로 가르거나 배제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차별, 배제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거대한 복지만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적 편리함까지 제공하려는 조치입니다. 야훼의 배려와 친절은 상대를 위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행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조용히, 그러나 꼭 필요하게, 적확하게 드러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조금 작위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 네 가지 내외적 상태와 태도를 종합하면 이 속성들은 야훼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현재화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고대로부터 야훼라는 신은 인간처럼 인간과 함께 공존해 왔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야훼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았고, 이 세계를 대하는 인간의 고도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야훼의 태도와 행동은 결국, 그의 실존이 이 세계 속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양갈래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실존을 관찰하는 인간에게 그의 실존이 명확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의 실존은 이 땅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의 눈에 더욱 선명하게,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랑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닮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은 자기를 조물한 신을 사랑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흙으로 돌아갈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야훼를 바라봄으로써 그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러므로 야훼의 현존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은 ‘야훼를 사랑한다”입니다. 이 말을 그대로 표현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가장 연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사실을 진흙과 꽃의 지는 상태로 ‘자신’을 비유합니다. 야훼가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인식하는 일은 무무소부부재하는 야훼를 향해 자기 시선을 거두지 않는 ‘바라보기’의 절정입니다.

정리하면, 야훼의 속성은 RhAH형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는 인간처럼 우리 세계에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형은 ‘세상 애련가(世上 愛憐家,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형’이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현대인의 생활 태도로 돌려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야훼의 내외적 상태를 인식하고, 그것을 RhAH로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좀 더 현대적인 용어로 치환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MBTI라는 성경 파악 놀이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MBTI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속성을 규정하는 틀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훼가 인간의 삶에 공존한다면 한번쯤 추론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일시될 만큼 그 존재가 명확하다는 일종의 은유인 것입니다. 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 위의 난간 같은 역할입니다. 난간은 길 위에서 추락하지 않게 보호하는 틀일 뿐입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은 어떤 MBTI인가?”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의외로 야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야훼는 어떤 속성으로 이 세계를 대하시는가”를 묻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지금 새로운 물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해석학적 질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종종 야훼를 “설명”하려 합니다. ‘신’이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하물며 야훼는 설명 불가능합니다. 야훼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한 말입니다. 이 경우, 인간의 설명이 불가능한 자리에서는 오히려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유익합니다. 들음은 곧 침묵을 의미합니다.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침묵은 더 정직한 태도일 수 있습니다.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이 말하듯, 야훼가 “무엇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의 실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인간 세계는 역설적으로, 야훼를 쉽게, 그리고 편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더 잘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많다고 부추깁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다고 ‘현대화된 번역’을 소개합니다. MBTI 같은 유형 분류도 그런 인간의 오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야훼를 단순화하는 것은 절대화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인식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보이지 않게 실존하는 야훼를 향해 자기 시선을 들어 ‘바라보고,’ ‘관찰하며,’ 믿으려는 용기를 일깨우는 정도에서만 유익할 수 있습니다.

4.2. 인간화의 현대적 양상: ISFJ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시편 103편 8절과 여러 히브리 본문에서 명시된 야훼의 자기소개, 즉 RhAH라는 속성은 오늘날 ‘ISFJ (수호자형)’에 가까운 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휴형은 자기감정으로 사랑을 훼손하지 않도록 책임 있게 다루고 정돈하는 방식—따뜻함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붙잡는 지성—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전부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렌즈로 보면, 야훼는 사랑을 감정으로만 방치하지 않고 사랑이 생명을 살리는 구조가 되도록 조직하신다는 점이 더 선명해집니다. 또한, 야훼는 직관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깊은 사고작용을 겪으며, 분석과 판단을 통해 생활방식을 세운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자리에서 끝내 버리지 않는 성향을 보여줍니다. 즉, 라훔과 한눈으로 세계와 사람을 품고, 에레크 아파임으로 시간을 견디며, 헤세드로 자신과 타인의 일상을 떠받치는—방식으로 사랑을 지속합니다.


야훼를 ISFJ라 부르는 것은 야훼를 인간의 ‘성격(character)’에 가두려는 명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 유한성에 의한 불가피한 조치입니다. MBTI가 소설 속에서 불확정적인 인간 유형을 규명하려는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처럼 나의 글에서도 야훼를 이해하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조치입니다. 무엇보다, 만약 야훼의 성향을 지속적으로 관찰한다면, 결국 MBTI의 16개 유형이 모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야훼는 보이지 않는 허상이 아니라 실상이라는 것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철학의 대상’ 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결로 읽든지 고대 사람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야훼는 사람과 사물을 ‘사랑’으로 대하고, 땅의 ‘역사’를 신중하게 주관하는 ‘인간 수용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RhAH형의 특징은 인간의 윤리를 반영한 삶의 방식으로 언어를 바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군중의 박수보다 한 사람의 울음을 더 또렷이 듣는다.

(2) 지성을 활용한다. 그것을 차가운 계산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남용을 견제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3) 인내를 몸에 배이게 한다. 인내는 미루는 태도가 아니라, 타인을 용서하고 끝내 구원받을 시간을 견디는 능력이다.

(4) 친절을 끝까지 고수한다. 친절은 큰 행동 대신 세밀함으로, 번쩍이는 기적 대신 일상의 손길에 집중한다.

5. 실존으로의 이행: 신의 인간화와 나의 신지향(志向)

이제 좀 더 고려할 문제는 하나입니다. 이런 야훼의 특징이 어떻게 나의 실존에 틈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야훼의 RhAH 속성이 야훼의 실존을 인식하는 나의 삶의 구조에 자리매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합니다. 야훼의 속성이 제대로 인식된다 해서 세계가 언제나 밝음으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훼의 실존에 대해 언제나 그 궁극적 ‘부재성’을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질문이 삶에서 무한반복됩니다.

교리적으로 이런 질문이 오래전부터 성육신으로 규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꾸르 호모 데우스?(Cur Deus Homo)라는 질문의 의도는 바로 이 점을 규명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세기에 등장한 역사적 예수는 하나의 인격과 삶의 방식으로 더 구체적인 현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야훼의 속성(RhAH, ISFJ)을 유지하면서 인간 속에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죄인으로만 대하지 않고, 잠재적 의인으로도 간주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말을 쏟아내고 상대의 말은 듣지 않은 막무가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느라 연약한 사람을 몰아붙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크고 넓은 우주를 대상으로 한 야훼의 통치가 어린아이, 한 알의 씨앗에 투영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따라야 할 가치는 웅장한 세계철학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작은 몸으로 실현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연약한 인간을 섬기기 위해 무릎을 굽혀 허리춤의 수건으로 발을 닦아 주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된 야훼는 인간을 위해 대신 죽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고대인들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요컨대 인간 예수의 삶은 깊은 사고와 삶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토대를 두면서도 타인을 기꺼이 수용하는 신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한 행동이었습니다. 동시에 솟아나는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고,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RhAH형 야훼, ISFJ형 예수는 들꽃을 좋아한 사람입니다. 그는 걷기를 좋아했고, 그 길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감탄하는 것을 넘어 내가 따라 살아야 할 시간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때 야훼의 인간적 속성은 실현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라훔과 한눈은 결국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내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고, 에레크 아파임은 결론을 서두르지 말라고, 헤세드는 거창함 대신 사소함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 말들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내 삶의 가장 깊은 자리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의 실존과 그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삶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내가 ‘안식’을 단순한 휴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밝음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 생산과 성과의 언어가 더는 나를 설명하지 못하는 시간—‘검은 안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6. 시간의 철학: 검은 안식

나는 새로운 ‘바라보기’의 대안으로 ‘검은 안식’을 생각합니다. ‘검은 안식’은 어둠 속에서 쉬는 휴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밝음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 밤 같은 세계에서 빛을 따라 걷는 상태입니다. 경제적 표현을 빌리자면, 생산과 성과가 불투명한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침묵과 결핍으로 동행하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검은 안식은 ‘회복’의 낙관이 아니라 ‘중단’의 수용윤리입니다. 세계가 탐닉의 자리, 먹기의 자리로 나를 끝없이 호출할 때, 나는 그 호출에 의도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결단입니다. 그 결단은 시대의 눈에서는 게으름이지만, 오히려 야훼의 세계에는 자기 저항입니다. 무력함으로 비치지만, 자기 존엄을 신의 방식으로 지켜가는 대안입니다.


인문학적으로 말하면, 검은 안식은 시간의 가치를 다시 배열하는 행위입니다. 크로노스(chronos)로 일관하는 시간, 즉 일정표의 시간, 측정 가능한 시간, “얼마나 했는가”로 나를 평가하는 시간으로부터 카이로스(kairos)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사건에 주목하는 시간, 의미가 농축되는 시간, “무엇이 되어가는가”라는 과정으로 나를 재구성하는 시간입니다. 안식의 찰나입니다. 검은 안식에서 최고의 카이로스는 바로 새벽, 동틀 녘입니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순간입니다. 어둠이 가장 짙은 밀도로 세계를 지배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검은 안식은 밝은 위로가 아니라, 어둠과 함께 하는 위로입니다. 야훼가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토포스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단순화한 RhAH는 단지 ‘야훼가 어떤 분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그 야훼를 믿는 인간은 어떤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라훔과 한눈이 타자를 품는 방식이라면, 에케르 아파임은 그 품음이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헤세드는 그 시간을 거창한 기적으로 채우기보다 일상의 세밀함으로 지탱하라고 말합니다. 결국, RhAH는 ‘영혼의 운영체제’이자 ‘시간의 윤리’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안식을 생각합니다. 검은 안식, 즉 밝은 위로가 아니라 어둠을 견디는 의미로서의 안식입니다.


따라서 이 검은 안식의 지평에서, 부재하는 듯한, 보이지 않는 듯한, 숨어있는 듯한 야훼에 대한 논의도 달라집니다. 야훼의 속성을 MBTI로 번역해 본다는 이 순박한 시도는 결국 신의 부재를 단정하는 현대 사회에 신이 현존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옹색한 은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은유가 유효해지는 순간은 숱한 사건 속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단정적인 ‘설명’이 무너질 때, 신의 현현이 더 명확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검은 안식은 이런 인간의 자의적 설명이 붕괴되는 것을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검은 안식은 이미 부정신학의 문법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말의 과잉을 거둬들이는 훈련을 제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 야훼를 개념으로 붙잡는 대신, 신 앞에서 인간의 개념이 무너지는 체험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입니다. 야훼는 “하나님은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라 “야훼는 나와 다르다. 나의 인식 너머에 있다 ‘라는 초월적 신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7. 프락시스: 검은 안식의 네 가지 지침

그런 태도에서 야훼가 현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야훼의 네 가지 속성—긍휼, 자상함, 오래 참음, 인자함—가 더욱 인간다움으로 남게 됩니다. 이것은 ‘속성 묘사’가 아니라 부재하는 듯한 존재의 현존방식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신의 문법이 아니라 인간의 문법으로 말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감정의 목록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방식, 타자와 시간과 폭력과 상처를 다루는 윤리적 리듬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검은 안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 네 속성은 특히 어둠 속에서 선명해집니다. 빛 아래에서는 덕목처럼 보이던 말들이, 어둠 아래에서는 생존, 현존의 구조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인간 안에 현존하는 야훼의 이 속성을 인간의 지적 언어로 정돈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긍휼입니다. 이것은 동정이 아닙니다. 인문학의 오래된 통찰처럼, 동정은 때때로 타자를 ‘관람’하는 방식으로 전락합니다. 반면 긍휼은 타자의 고통을 내 세계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고, 내 삶의 무게로 받아들이는 윤리입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의 윤리처럼, 타자의 얼굴은 내 자유를 중단시키는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검은 안식은 그 중단을 생활화합니다. “내가 계속 달리면, 누군가의 고통은 계속 보이지 않는다.” 검은 안식은 보이지 않음을 멈추는 기술입니다.

둘째, 자상함입니다. 은혜라는 말로 통용되는 이 용어는 낭만적 위로가 아닙니다. 은혜는 관계의 경제학이 무용하다는 하늘의 사건입니다. 공로와 교환, 성과와 대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은혜는 계산을 멈추게 합니다. 검은 안식이 세계의 생산성 논리를 거부하듯, 은혜는 영혼의 경제성을 거부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아직도 붙들려 있는가”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존재가 능력보다 먼저라는 실존주의적 사고를 반영합니다. 고전적 인문학의 핵심—인간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보라는 명령—과 맞닿습니다.


셋째, 오래 참음입니다. 인내는 ‘좋은 성격’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래 참음은 시간의 폭력을 견뎌내는 생활윤리입니다. 성급한 판단을 견제하는 것입니다. 조급함은 폭력의 편에 서기 쉽습니다. “지금 당장 결론 내리자”라는 말은 유혹일 수 있습니다. 이는 타자를 단순화하고, 복잡한 고통을 한 줄로 요약하려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단축시키는 태도가 오래 숙성되어야 드러나는 삶의 핵심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검은 안식은 이런 요약과 단축을 경계합니다. 어둠 속에서 인간은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요구됩니다. 어둠 속의 고통은 빠른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음은 단지 시간을 ‘지연’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정의의 숙성’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즉시성을 숭배하는 시대, 오래 참음은 숙성의 미학을 복권하려는 야훼의 의지를 반영합니다.

넷째, 인자함(헤세드)입니다. 친절과 환대로 번역되는 이 말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을 주도하는 슬로건입니다. 거시적인 장치가 아니라 미시정치를 대변합니다. 이에 근거하면 인문학은 거대한 담론보다 일상의 층위에서 권력과 돌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사할 때 더욱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헤세드는 우주 너머는 물론이고 자기 발아래를 탐사하는 자의 철학신학적 대응물입니다. 친절과 배려는 사소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세계를 유지합니다. 검은 안식은 큰 변화를 추동하지 않습니다. 먼저 어둠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일상의 리듬을 견인합니다. 다른 관점에서 복잡하고, 과잉된 세계를 덜어내려는 축소의 윤리 위에서 발현되는 사유입니다.


이처럼 검은 안식에 근거할 때, 헤세드는 야훼를 따르는 이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라 할만합니다. 헤세드는 ‘밝은 쉼’으로 쉽게 이끌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애도의 문법을 현실로 실현합니다. 근대 심리학에서 애도 이론이 말하듯, 애도는 단순히 상실을 “정리”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재구성입니다.

검은 안식은 상실을 서둘러 낫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실의 깊이가 내 인간됨의 깊이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기독교 수도원의 영성처럼 “영혼의 어두운 밤”(dark night)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 신학과 만납니다. 어둠은 신의 부재가 아닙니다. 내가 붙잡던 가짜 빛들이 꺼지는 순간입니다. 검은 안식은 그 꺼짐을 견디는 영적·인문학적 훈련입니다. 따라서 초월자 야훼가 인간의 속성 분류처럼 유형화가 가능하여, “세상을 애련히 여기는 분”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유형은 검은 안식의 언어로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야훼는 세계를 ‘관리’ 하지 않고, 세계의 어둠 속으로 동행하신다.

야훼는 인간을 ‘평가’ 하지 않고, 인간을 자기 세계 안으로 초대하신다.

야훼는 고통을 ‘설명’ 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 기다림으로 함께 계신다.

야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지 않고, 일상의 결에서 돌보기 위해 나타나신다.


이렇게 읽을 때, 검은 안식에서 야훼 이해는 결국 인간학이기도 합니다. 한병철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야훼를 ‘바라보며,’ 이 세계의 고통에 몸을 기울여 경청하고, 함께 “견디는 존재”입니다. 견딤은 능동적 수용입니다. 견딤은 세계가 나를 객체화시킬 때, 이 불확정적 세계를 주도하는 주체로 남겠다는 결단입니다. 견딤은 타자를 나의 이익을 위해 소비하지 않겠다는 윤리입니다. 결국, 견딤은 시간과 관계를 야훼의 관점에서 다시 신성시하는 신앙 실천입니다.

결론: 신의 드러남은 관찰의 시선에서

이 실천의 끝에서, 야훼는 더는 그 존재 여부나 이유를 설명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훼는 인간이 어둠 속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는 방향, 곧 안식이 저항이 되고 저항이 사랑이 되는 방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검은 안식의 철학은 그 사랑을 의도적으로 밝게 만들지 않으며, 오히려 사랑으로 어둠을 통과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어둠을 통과한 사랑만이 타자를 가볍게 만들지 않으며, 타자의 얼굴에 담긴 신의 현존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바라보기’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은, 곧 어둠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타인의 삶에 함께한다는 방증입니다.


결국, 야훼를 바라보는 인간의 능동적 ‘관찰’은 추상적인 사유를 넘어 삶의 구체적인 결을 바꾸는 실천적 리듬으로 완성됩니다. 나는 이를 ‘검은 안식’의 윤리 위에서 네 가지 일상의 지침으로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분주한 시간대에 10분간 생산적 효율을 멈추는 ‘의도적 중단’입니다. 이는 “얼마나 잘 해냈가”라는 크로노스(chronos)적 평가로부터 자신을 격리하여, 내가 도구가 아닌 목적 그 자체임을 선언하는 카이로스의 실증입니다.


둘째, 타인의 고통 앞에서 즉각적인 해결책을 버리고 ‘경청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는 라훔과 한눈의 태도로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며, 결론을 서두르는 폭력을 멈추고 정의가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실천입니다.


셋째, 거창한 담론 대신 내 발아래의 사소한 배려를 실천하는 ‘미시적 헤세드’입니다. 일상의 작은 친절은 세계를 지탱하는 야훼의 정밀한 돌봄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삶의 상실을 밝게 포장하지 않고 수용하는 ‘새벽의 카이로스’입니다. 어둠을 참된 현존이 선명해지는 토포스(topos)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어둠과 함께 걷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보이지 않는 야훼가 우리와 공존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실존적 리듬입니다. 나아가 안식이 저항이 되고 저항이 곧 사랑이 되는 ‘검은 안식’의 지평 위에서, 인간은 비로소 신을 닮은 존재로서 드러나지 않는 신을 ‘주의’하고, 야훼가 실존하는 곳을 더욱 미분적으로 ‘관찰’ 탐색하며, 그 관찰을 ‘적분’하여 야훼가 통치하는 세계를 온전히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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