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대담] 경미의 침묵, 헤벨 세계의 파열음

카이로스의 현재성-<작은 철학시 60수>에 대한 자기 비평적 에세이

by 푸른킴

*이 글은 지금까지 연재한 나의 <작은 철학시> 60수를 종합한 자기 비평적 노트입니다. 원래 산문체 글을 대화체 형식으로 변형했습니다. 이와 함께 마지막 교정에 AI(쳇 GPT)의 검토와 수정 제안이 반영되었습니다.


일시: 어느 새벽
장소: 사유하는 연못
참석자: 코헬렛(영상), 마츠오 바쇼, 발터 벤야민, 나


나: 반갑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이쿠, 헤벨론, 그리고 저의 단시와 검은 안식의 시학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비교하고 싶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언어가 한 연못 위에서 만나, 같은 파동을 낳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바쇼: 반갑습니다. 나의 하이쿠는 본래 여러 사람이 함께 읊던 하이카이 렌가에서 독립한 17음의 짧은 정형시입니다. 계절의 변화—기고(季語)—를 담고 절제하는 것이 도(道)입니다. 그런데 그대의 단시는 형식을 깨뜨리면서도 묘한 울림이 있군요.


나: 좋습니다. 그렇다면 출발점부터 나누겠습니다. 먼저 바쇼 선생의 한 수입니다.

바쇼: 古池や 蛙飛こむ 水の音.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퐁당.


나: 그리고 저의 단시 한 수입니다. 제목은 ‘창조’입니다.

고요한 하늘 쩌억,

연못 속으로 풍덩,

빛 보라!


코헬렛: 헤벨 하발림, 헤벨 하발림, 콜-하벨.


여기서 출발의 ‘연못’은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시간(찰나)과 의미(해석)가 만나는 멈춤, 중지하는 사유의 무대입니다.


벤야민: 저는 차분히 듣겠습니다. 앞의 낭독과 덧붙인 말씀 중에 한 가지가 귀에 오래 남았습니다. “연못,” “풍덩, 쩌억 소리,” 그리고 “멈춤”등입니다. 저는 그 단어들이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제가 천착한 역사의 속도를 겨냥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저는 좀 더 기다리면서 여러분의 대화를 듣고 있겠습니다. 물론 서둘러 끼어들 수도 있습니다.


하이쿠의 역사와 단시의 만남

나: 당신의 하이쿠가 “정적 속의 파동”이라면, 저의 단시는 “존재의 개벽”에 가깝습니다. 저는 17음절의 수치적 제약 대신, 현대인이 잃어버린 카이로스—운명적 순간, 깊은 현재—를 포착하려 애씁니다.

바쇼: 카이로스라… 나의 하이쿠가 흐르는 계절 속에서 멈춘 듯한 '사비(寂)'를 추구했다면, 그대는 멈춘 시간 속에서 도리어 무언가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보는군요.


나: 네. 저는 “멈춤”이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세계의 명령이 끊기는 틈이라고 봅니다. 그 틈에서야 비로소, ‘지금’이 두꺼워지고, 세계가 다시 읽힙니다.

벤야민: “지금이 두꺼워진다”—저는 그 말을 기억하겠습니다. 나중에 ‘지금-시간(Jetztzeit)’을 말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바쇼: 흥미롭습니다. 그대의 단시가 짧다는 사실은 내 하이쿠와 닮았지만, 그대는 짧음 속에 다른 시대의 긴장을 숨기고 있군요.


나: 그렇습니다. 카이로스는 ‘새것’이 아니라, 시간을 멈춰 ‘현재를 두껍게’ 만드는 사건성(現在性)입니다.

소리(音)의 미학: ‘퐁당’과 ‘쩌억’

바쇼: 내 가장 유명한 시를 기억하나요? 오래된 연못이여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퐁당. 세간에는 내가 이 짧은소리로 적막을 완성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나: 저도 그 연못을 “귀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연못도 찾아가, 제 방식으로 기록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연못에서 창조의 파열음을 들었습니다. “고요한 하늘, 쩌억 / 연못 속으로 풍덩.” 그리고 그 파동 끝에 “빛 보라!”라고 외쳤습니다. 당신의 소리가 ‘스며드는 소리’라면, 저의 소리는 세계가 “파아악” 하고 열리는 소리입니다.


바쇼: “쩌억”이라니! 도발적이고 생생한 소리입니다. 내 “퐁당”이 여운을 남긴다면, 그대의 “쩌억”은 잠든 지성을 깨우는 죽비 같군요.


나: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쩌억”은 각성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검은 안식을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검은 안식은 그 각성이 다시 속도와 증명의 소음으로 휩쓸려 가지 않게 하는, 멈춤/중지의 윤리를 함의합니다.


코헬렛: 지혜는 종종 멈춤에서 시작됩니다.

벤야민: 파열음은 종종 “멈추게 하는 소리”입니다. 저는 그 소리를 “비상브레이크”라 부르곤 했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좀 더 들어보겠습니다.

나: 맞습니다. 파열음은 ‘각성’이고, 검은 안식은 그 각성을 보존하기 위한 ‘중지(윤리적 브레이크)’라는 점에서 우리의 견해가 당신과 일맥상통합니다.

와비·사비(오래된 단순함)와 검은 안식

바쇼: 나는 평생 여행하며 낡고 소박한 것—와비—에서 아름다움을 찾았습니다. 낙엽이 지는 것은 슬픔이자 자연의 섭리이지요.


나: 저 또한 낙엽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쇠락이 아닙니다. 저는 <낙엽지속>이라는 단시에서 “물든 낙엽 쓰윽 내어주는 너”를 보며 겨울로부터 온 편지를 읽습니다. 또 “검푸른 안식”이라 명명한 커피 한 잔에서 삶의 풍미를 느낍니다. 저는 ‘지속’을 두 겹으로 씁니다. 느린 속도로서의 지속(遲速), 삶이 유지된다는 의미의 지속(持續)입니다. 이 중의성이 제가 말하는 검은 안식의 골격입니다.


바쇼: 어둠을 공포가 아니라 따뜻한 호수로 바라보는 시선 같군요. 생각해 보니, 그대는 고정된 언어를 깨뜨려 자신만의 철학적 어휘를 만드는군요. 그것이 시인의 사명일 수도 있겠습니다.

나: 당신의 사비가 여백으로 세계를 들이게 한다면, 저의 검은 안식은 속도와 확정의 압력을 잠시 끊어, 세계가 ‘다른 문장’으로 제게 들어오게 합니다. 저는 그걸 멈춤/중지에 기반한안식”이라고 부릅니다.

코헬렛: 중지는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는 지적 오만을 낮추는 비결입니다.

나: 다시 말하지만, 검은 안식은 ‘도피’가 아닙니다. 소유하려는 욕망 대신 경청이라는 윤리로 세계를 ‘지속(遲速/持續)’시키는 방식입니다.


시대를 넘는 연대: 단시 11 ‘평등’

바쇼: 그대의 시 ‘단시 11’을 보았습니다. “천지 지천, 만물 제동.” 만물을 평등하게 보려는 마음이 내 하이쿠 정신과 닿아 있더군요.


나: 그 시는 이렇습니다. 단시 11. 평등입니다.

땅만 보고 사는 새, 몸 뒤집어

내려오는 하늘, 비상

천지 지천, 만물 제동


바쇼: “땅만 보고 사는 새”가 그대 자신이라 했지요. 왜 그대는 땅을 그렇게 붙들었습니까?

나: 땅은 단단하고 안전합니다. 손에 잡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관성’에 붙들려 살았습니다. 그래서 시야를 스스로 좁혔습니다.


코헬렛: 손에 잡히는 것에 기대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흔한 일입니다.

나: 그런데 전환은 제 의지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바람”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력이 제 고정된 사유를 먼저 꺾었습니다. 그래서 “몸 뒤집어”라고 썼습니다. 깨달음은 종종 내가 준비한 결론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힘이 열어젖힌 틈에서 시작됩니다.


바쇼: 그렇다면 “내려오는 하늘”은 무엇입니까? 하늘은 원래 위에 있는데.


나: 바로 그 역설입니다. 제가 뒤집자, 하늘이 ‘멀리 있는 높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여기’에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비상은 단지 상승이 아니라, 세계 안으로 내려앉아 보는 틀이 바뀌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묻습니다. “비상이 정말 상승입니까?”

벤야민: 그 질문은, 위와 아래가 고정된 질서라는 믿음을 흔듭니다. 질서가 흔들릴 때, 시간이 흔들립니다. 저는 그런 순간을 “정지된 변증법”이라 불렀습니다. 그대의 언어로 계속 말해 보십시오.


나: 저는 비상을 “정신의 자유”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시작은 바람이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은 제 응답입니다. 저는 이것을 “수동적 능동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내가 선택합니다. 나를 능동적으로 뒤집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지 지천, 만물 제동”으로 도착합니다. 위로 올라가 남을 내려다보는 자유가 아니라, 위와 아래라는 기준 자체가 무너지는 자리의 자유입니다.

바쇼: 그대는 “상승”의 욕망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시를 완성했군요. 그것은 사비가 지닌 윤리와도 닿습니다.

나: 네. 저는 비상하며 도망친 것이 아니라, 비상으로 “평등한 세계”에 도착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착은 종착이 아니라, 다시 땅을 보는 방식이 바뀌는 시작입니다. 앞서 제가 말한 평등은 ‘상승’의 우선 가치를 상쇄하는 사건이며, 그 사건은 ‘비상(飛上)’이 아니라 ‘제동(制動-균등하게 만들어짐)’으로 완성됩니다.


하이쿠, 사회에의 저항: 경미(軽味)

나: 바쇼 당신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하이쿠에서 시대의 한계에 맞섰던 저항적 요소를 구체적으로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당신의 하이쿠가 봉건적 질서 속에서 ‘속(俗)으로부터의 탈피’를 꿈꾸었다고 읽었습니다.

바쇼: 잘 읽으셨습니다. 나의 하이쿠는 침묵의 저항으로서 풍류입니다. 나는 당시 일본의 엄격한 신분 사회와 유교적 형식주의가 숨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정착을 거부하고 길 위에서 죽기를 자처하며 세속적 가치에 저항했습니다. 나의 저항은 “가볍게 비우는 것”—경미(軽味)—이었습니다.

나: 경미… 가벼움이 얕음이 아니라, 집착을 감량하는 윤리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당신의 방랑이 곧 저항이었다는 점이 더 선명해집니다.


벤야민: 방랑은 때때로 “질서 바깥의 시선”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선이 바뀌면, 역사가 보이는 방식도 바뀝니다.


나: 좋습니다. ‘질서 바깥의 시선’에 연동하는 경미(軽味)는 미적 취향이 아니라, 시대의 질식에 맞서는 ‘비움의 저항’이라 할만합니다.

나의 ‘실존적 저항’

바쇼: 그대는 현대의 ‘속’과 싸운다 했지요. 그 싸움의 모양을 들려주십시오.

나: 제가 마주한 시대는 “책 쏟을수록 불 꺼지는 세계”입니다. 정보는 넘치지만 지성은 고갈되고, 내달리는 문명 속에서 인간은 부품화됩니다. 그래서 제 단시는 속도전에 제동을 거는 사유의 파열음입니다. 저는 저항을 세 갈래로 정리합니다.

바쇼: 첫째는 무엇입니까?

나: 형식에 대한 저항입니다. 하이쿠가 귀족의 렌가 규칙을 깨고 낮은 언어의 17음을 세워 문학의 민주화를 꾀했듯, 저의 단시는 시조의 정형성이나 하이쿠의 음절 수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단-풍(單-楓)”을 분절해 “붉은 책향”으로 치환하거나, “낙엽지속(樂葉遲速)”처럼 한자의 의미를 비틀어 언어의 관습적 사용에 저항합니다.


코헬렛: 언어의 관습은 자주 인간을 속이지 않습니까?


바쇼: 그렇죠, 그럼 둘째는 무엇인가요?

나: 가치관의 저항입니다. 성공 대신 안식과 공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권력에 아첨하기보다 들판의 선물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저도 도시 한복판에서 “수고했다”는 인사 한 마디의 초록을 건져 올리려 합니다. 사람들은 거침없는 질주와 생존을 외치지만, 저는 그 배 위에서 “검푸른 안식”을 찾으며 속도의 도구화에 저항합니다.

바쇼: 셋째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나: 네, 바로 존재론적 저항, 곧 호모 레겐스의 선언입니다. 당신의 저항이 은둔과 방랑의 탈속이었다면, 저의 저항은 세상 한복판에서 눈을 부릅뜨는 응시입니다. “이미 저기, 아직 여기”의 긴장 속에 머물며, 망명하는 마음을 붙잡고, 무한의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읽는다는 것은 더 많이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속도의 급완을 조절하며 해석의 폭력을 멈추는 윤리입니다.


벤야민: “멈추게 하는 윤리”—그 말이, 결국 역사의 폭주를 멈추는 정치적 형식과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제 말을 정리하자면, 실존적 저항은 형식·가치·존재의 세 축에서 ‘속도의 폭력’에 브레이크를 거는 일입니다.

검은 안식, 헤벨, 경미의 상관관계

바쇼: 사실, 경계의 정자에서는 말이 가벼워져야 합니다. 가벼움은 얕음이 아니라 집착을 덜어내는 일이지요. 그대가 말한 검은 안식은 무엇을 덜어내려는 것입니까? 그리고 코헬렛의 주장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나: 저는 속도를 덜어냅니다. 성과를 덜어냅니다. 확정은 멈춥니다. 이 시대가 끊임없이 “밝히라”라고 재촉할 때, 저는 오히려 어둠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검은 안식은 휴식이 아니라 중지입니다. 세계의 명령을 잠시 끊고, 다른 문장을 들이게 하는 틈입니다. 그리고 이 틈은 코헬렛의 지혜와 맞닿아 있습니다.

코헬렛: 헤벨 중의 헤벨, 모든 것은 헤벨입니다.


바쇼: 그대는 세계를 허무로 봉인하려 합니까?


코헬렛: 아닙니다. 나는 세계를 허무로 봉인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나는 인간의 지적 오만을 봉인하려 합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오만, 세계를 지식으로 소유하려는 손, 시간을 묶으려는 손, 의미를 고정하려는 손. 그 손이 해 아래에서 폭력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나: 그래서 저 역시 헤벨을 그저 ‘허무’로만 번역하지 않습니다. 헤벨은 공허가 아니라, 소유되지 않는 실재입니다. 있는 것, 그러나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 붙잡히는 듯하다가도 빠져나가는 숨결 같은 것입니다. 헤벨은 절망의 단어가 아니라, 소유의 철학을 깨뜨리는—알을 깨는—바깥의 망치입니다.


바쇼: 내 하이쿠가 절제의 도라면, 그대의 단시는 파열의 도구군요. 그러나 파열은 종종 과잉으로 번집니다. 파열이 어떻게 안식이 될 수 있습니까?


나: 파열은 안식 그 자체가 아닙니다. 파열은 각성입니다. 그리고 검은 안식은 그 각성이 다시 소유와 증명의 소음으로 되돌아가지 않게 하는 중지의 윤리입니다. “쩌억”은 잠든 지성을 깨우는 소리이고, 검은 안식은 그 깨어남을 지키는 조용한 손입니다.


코헬렛: 해는 뜨고 해는 지며, 떴던 곳으로 급히 돌아갑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고, 돌고 돌아 제 길로 되돌아갑니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되, 바다는 차지 않습니다.

바쇼: 순환은 나에게 계절의 숨결이었습니다. 그대들에게 순환은 무엇입니까?


나: 저에게 순환은 평화로운 안정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세계는 실재하지만 고정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수고도 영원으로 고정될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헤벨의 존재론을 봅니다. “있다, 그러나 소유되지 않는다.” 검은 안식은 그 사실을 사유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입니다. 붙잡지 않으므로 더 정직하게 만지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바쇼: 그러니 검은 안식과 헤벨은 도피가 아니라, 세계와의 더 단단한 접촉이겠군요.

나: 그렇습니다.


코헬렛: 그렇습니다.


나: 헤벨(비-소유)·경미(비움)·검은 안식(중지)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윤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이 쏟아질수록 불이 꺼지는 세계

코헬렛: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바쇼: 눈과 귀가 차지 않는다면, 코헬렛, 그대의 시대도 힘들었겠군요. 그리고 검은 안식의 시인 그대는 “책이 쏟아질수록 불이 꺼진다”라고 말했지요. 어째서 그런 역설이 생깁니까?


나: 지식과 세계 인식의 방식은 확장됩니다. 그러나 지성은 오히려 얕아집니다. 정보는 무한궤도를 타고 흐르지만, 존재에 대한 감각은 곳곳에서 생채기를 내고 멈칫합니다. 눈과 귀는 충족을 모르고, 우리는 포만을 완성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읽기를 다시 정의합니다. 읽기는 더 많이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더 깊이 내려가다 어딘가에서 멈추는 일입니다. 호모 레겐스는 많이 읽는 인간이 아니라, 속도를 조절하고 해석의 폭력을 멈추는 인간입니다.


코헬렛: 책을 짓는 일도 피곤합니다.


나: 호모 레겐스는 ‘다독가’가 아니라, 속도·해석· 소유의 폭력에 제동을 거는 ‘멈춤의 독자’입니다.

새것 없음과 카이로스

코헬렛: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새롭다 말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앞선 것들이 기억되지 않듯, 뒤에 올 것들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바쇼: 새것이 없다면, 시도 새로울 수 없습니까?


나: 코헬렛 선생의 말은 새로움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움이 구원이다.’라고 경도된 신앙을 부정합니다. 새것이 나를 살릴 것이라는 확신, 그 확신이 속도를 부추깁니다. 그래서 저는 코헬렛의 시간을 카이로스로 다시 읽습니다. 카이로스는 새것이 아니라, 한 점에서 멈춰 그 아래로 깊이 파고드는 현재입니다. 현재는 사라지는 듯하지만, 지나간 것과 다시 오는 것 사이의 찰나로 존재합니다. 검은 안식은 그 찰나, 깊은 현재로 들어가는 문턱입니다. 어둠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빛. 그 빛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놓치지 않는 법—그것이 제 검은 안식 시학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벤야민: 그 기술은, ‘연속적인 진보’라는 신화를 끊는 방식으로도 읽힙니다.

바쇼: 그러니 그대의 단시는 “새로움”이 아니라 “깊이”로 세계를 갱신하는군요.

나: 네. 새것은 ‘지나간 것들에서 놓친 것이 다시 드러나는 것’입니다. 더 빠르게가 아니라 더 정직하게, 더 많이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 보게 하는 오감(五感, 吾感)의 각성입니다. 즉, 새것’은 미래의 상품이 아니라, 멈춤 속에서 드러나는 ‘깊은 현재(카이로스)’의 재발견입니다.

수고, 헤벨, 그리고 새로움의 역설

바쇼: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것이 옛것의 재활이라면, 수고는 왜 필요합니까? 왜 쓰고, 왜 걷고, 왜 시를 노래합니까?


코헬렛: 그건 제가 먼저 말해야겠군요. 제가 말한 것은 수고가 무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고가 영원을 견인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수고는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냅니다. 영원을 소유하려는 수고는 헤벨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나: 바로 그 지점에서 저 역시 헤벨은 체념이 아니라 저항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벨은 무의미가 아니라 비-소유의 진실입니다. 헤벨은 “결과물”이 아니라 “추구의 방식”입니다. 수고가 쌓이면 영원이 된다는 환상을 끊습니다. 대신 인간은 이 세계에서 유한한 지혜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운명을 산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검은 안식을 배웠습니다. 성취로 삶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삶은 공허가 아니라 이해불가함이라는 사실, 불확정성은 무가 아니라 깊이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제가 말하는 “새롭게”는, 어제 놓친 것을 오늘 다시 꺼낸다는 뜻입니다. 반복의 유익이죠. 바쇼 선생의 경미를 맛보는 방식으로요.

바쇼: 내 경미는 시대의 질식에 대한 침묵의 저항이었습니다. 그대의 검은 안식도 침묵의 저항입니까?


나: 그렇습니다. 다만 침묵을 낭만으로두지 않습니다. 침묵은 시대의 소음에 맞서는 윤리입니다. 침묵은 지성의 수고입니다. 침묵은 파열음 이후에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저는 당신의 “퐁당”을 경청합니다. 그러면서 그 작은 소리에서 “쩌억”의 거대한 질문을 듣습니다.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거대한 소리가 들린다는 역설을 믿습니다. 헤벨은 미시적인 관찰에서 듣는 소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포기/허무”가 아니라, 영원-환전의 강박을 끊어 삶을 ‘살아내기’로 돌려놓는 저항입니다.

파열음과 ‘지성적 브레이크’의 상관성: 벤야민의 발언

벤야민: 이제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방금 “쩌억”을 각성의 소리라 부른 대목에서, 저는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소리는 내가 평생 찾았던 “비상브레이크”의 소리와 연동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던 시대에 역사의 기차는 파국을 향해 폭주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진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그 기차에 몸을 싣는 데 있지 않고, 멈춰 세우는 결단 속에 있었습니다.


코헬렛: 멈춤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제가 말한 헤벨 또한 멈춤의 다른 이름입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멈출 때, 지금-여기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벤야민: 그렇습니다. 내가 말하는 “정지된 변증법”은 시간이 그냥 흐르게 내버려 두지 않는 일입니다. 과거의 억눌린 기억과 현재의 위기가 충돌하여 시간이 얼어붙는 순간—그 순간에 진실이 번개처럼 섬광을 냅니다. 당신의 “쩌억”은 그 정지의 섬광에 가깝습니다.

바쇼: 그렇다면 내 “퐁당”은 어떻습니까? 자연에 스며드는 작은 소리이지만, 나에게도 이 소리는 고요를 깨우는 사건입니다.


벤야민: 물론입니다. 다만 바쇼, 당신의 소리가 관조의 여백이라면, 이 단시의 소리는 “파편의 타격”에 더 가깝습니다. 매끈한 전체성은 때로 위장입니다. 파편—깨진 사건 조각—만이 폭주하는 문명의 시간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검은 안식”은 밤의 휴식이 아니라, 역사의 폭주를 멈추는 지성적 비상브레이크로 들립니다.


나: 당신의 비상브레이크가 과거 사건을 지금-시간으로 멈춰 세우는 것이라면, 그것은 제 단시가 지향하는 카이로스와 만날 수 있겠습니다.

벤야민: 맞습니다. 안식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소모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직선적 시간의 사슬을 끊고, 정지된 어둠 속에서 사라져 가는 존재의 흔적을 수집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말한 호모 레겐스는 어둠 속에서 구원의 파편을 읽어내는 수집가입니다. 폭주하는 기차는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검은 안식 속에서, 멈춘 시간을 변증법적으로 읽어내야 합니다.


나: 저는 그 읽기의 윤리를, 시의 짧음 속에 숨겨두고 싶었습니다. 짧은 문장, 짧은소리, 짧은 멈춤이 시대를 건드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정리하자면, 벤야민 당신의 비상브레이크(정지)와 카이로스(깊은 현재)는, 폭주하는 시간에 제동을 거는 동일한 현재성인 것 같습니다.


결론: 경미한 소리, 파동, 그리고 한 문장

코헬렛: 어떤 경우에든 숨결을 소유하려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바람 같은 숨결을 들으려 하십시오.

바쇼: 하이쿠 같군요. 그러면 코헬렛의 이 주장과 그대의 검은 안식을 하나로 묶어 한 문장으로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나: 물론입니다. 코헬렛의 헤벨론은 세계가 공허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세계를 소유와 맹목적 확정으로 폭력처럼 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 경고를 듣는 자가 검은 안식의 문턱에서 카이로스—깊은 현재—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이 속도전의 시대에 맞서는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강한 저항이 됩니다. 마침내 경미의 세계로 틈입합니다.

코헬렛: 잘 이해했군요.


바쇼: 이제 이해되었습니다. 검은 안식과 헤벨은 찰나에서 영원을 소유하려 하지 말고, 찰나에서 영원의 파동을 듣는 자가 되라는 권면이군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 동료입니다.


코헬렛: 해 아래에서는 어떤 주장도, 어떤 개념도 고정되지 않습니다. 지나감은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나: 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주장을 적극 받아들여 작은 것의 관찰을 쉼 없이 반복합니다. 흘려보낸 것들을 다시 찾아와 읽습니다. 멈추고 다시 시작합니다. 반복이야말로 새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의 헤벨론과, 한국 시조의 정서와, 바쇼 당신의 하이쿠와, 벤야민의 정치철학은 오늘 제 단시를 숨 쉬게 한 힘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대화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이해 불가하는 세계에서 ‘소유의 폭력’을 멈추는 현재성(카이로스)은 경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둠에서도 빛을 관찰하는 검은 안식의 윤리로 구현된다는 역사의 현재성입니다.

이 대화가 불확정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자유로운 사유를 조금이라도 더 탄탄하게 붙잡아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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