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세계, 변화하는 나

2025. 1.18 vs. 2026. 1.18

by 푸른킴

1월도 중순이 지나갑니다. 지난해 이날, 제가 써 두었던 글을 다시 꺼내 다듬어 봅니다. 그날로부터 저는 무엇이 ‘달라져 있는지’를 관찰해 봅니다.


2025. 1. 18. 한중담(閑中談), 비로소 가장 행복한 사소한 시간들

올해 저는 하루 한 편 논문 읽기를 계획했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그럭저럭 잘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중국문학평론가들이 위화(余华, Yú Huá)의 소설을 다룬 소논문 몇 편을 읽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점과 관점으로 쓰인 글들인데도, 다루는 작품과 논점은 엇비슷했습니다. 그의 작품이 영화로도 책으로도 많이 소개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위화는 우리 사회에서 꽤 이례적인 중국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념에 점철된 지난한 역사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보편적 문학의 옷으로 잘 입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을 읽고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밤기운이 집 안으로 시나브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좌식 책상에 익숙해졌다 해도, 여즉 이 자세는 불편합니다. 고개가 뻐근하고 눈도 빠르게 침침해집니다. 저녁 먹어야 할 시간입니다. 가볍게 저녁을 차려 큰 아이와 함께 먹었습니다. 함께 먹을 밥을 차리는 일, 아니 혼자 먹는 밥은 아무리 간단히 차려도 결국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밥을 먹고 난 뒤에도 집 안에서 하루 일과가 끝나려면 많은 일이 기다립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지만, 표 안 나게 쉴 틈 없는 일들입니다.


하루 중 집일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다시 맡은 지도 어느새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집일은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여느 일처럼 오래 하면 능숙해지고 익숙해지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익숙해질 만하면 ‘귀찮아지고’ 미뤄 두고 싶은 마음도 여지없이 고개를 듭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미뤄 두고 싶었던 마무리 설거지를 끝냈습니다. ‘그래, 그런 날이 있지.’ 간단히 밥 먹은 흔적을 치우는 일조차 마음을 크게 움직여야 하는 날 말입니다.


늦은 밤,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 다시 책상에 잠시 앉았습니다. 읽어야 할 책 몇 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입니다. 그중에는 작고한 시인 허수경의 산문집도 있습니다. 저는 『너 없이 걸었다』(난다, 2015)를 집어 들었습니다. 사실 책 읽기란 읽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는 무형의 책무입니다. 들었다가 가볍게 펼쳤다가 내려두어도 좋고, 덮어버리고, 밀쳐내도 상관없습니다. 빌려 온 그대로 두었다가 반납해도 무관합니다. 돌이켜 보면 손에 들었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되돌려 놓은 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은 책도 있습니다. 가볍게 보려다가 시간을 잊어버리는 책 말입니다. 이 책이 그랬습니다.


저는 이 책의 제목을 한참 보았습니다. ‘홀로’라는 말보다 ‘너 없이’라는 말에서 잊고 있었던 시의 맛이 납니다. ‘시의 맛’은 옛 문필가 박제가(1750~1815)에게서 배운 말입니다. 그가 남긴 산문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짧은 산문에 빗대자면, 이 제목에서 감지된 그 맛은 어딘가 시큼한 시구 같습니다. 아니면 ‘함께’라는 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탓일까요. ‘너 없이’는 꽤 낯섭니다. 내친김에 저는 허 시인의 두 번째 에세이 「어느 우연의 도시 어느 우연의 시인」을 펼쳐 읽었습니다. 그 문장을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문장이 눈앞에서 살아났습니다.


“낯섦을 견뎌 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 걷다가 걷다가 마침내 익숙해질 때까지 살아낼 수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23쪽)


‘낯섦-견딤-걷기-익숙해질 때까지 살아냄’, 제가 은근히 품고 살아가는 명사(名詞)들이 한데 모여있습니다. 무엇보다 ‘걷기’의 가치가 인정되는 순간이 이 문장 안에 박혀 있었습니다.


책을 펼쳐 놓은 채 가벼운 생각에 잠깁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제 일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집 안에서 늘 자연스럽게 치러 내야 할 여러 일도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마무리를 해 두어야 하는 상황 역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버겁지는 않지만 아직 낯선 일일 때가 많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살아낼 수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는 것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그 틈에 저는 기회 되는 대로 길을 걷습니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내기 위해 버티는 것’입니다.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저 사소하게 사는 맛이라고.’


다시 위화에 관한 글들을 떠올립니다. 평론가들과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의 소설 이력에는 획기적인 전환을 이뤘다고 평가받는 장편들이 몇 편 있습니다. 그에 대한 논평도 심도 있게 다뤄져 봇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그중 한 평론가는 대략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요지는 이랬습니다. 중국 문화 대혁명이라는 거시사로부터 같은 공간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인간 본연의 태도로 대하려는 미시사로 수렴해 간다는 것. ‘거시사와 미시사의 자연스러운 만남’이라는 말로 기억되는 표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밖으로만 향하려는 거창한 역사 인식과 안으로 집약되는 미세한 인간 인식이 교차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시인 허수경이 “시를 통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풍경들”(24쪽)이라고 말한 것과 연동합니다.


이 두 문학가의 말을 빌어 저는 비로소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 작가 모두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인간에게 사소해 보이는 그 풍경이 어느 날 마음에 잡히기 시작했다’라는 뜻으로. 감사하게도 내일 다시 찾아올 일을 오늘도 반복했지만, 그것이 곧 제 거대한 역사에 축적된다는 사실을 새겨 두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하루를 잘 마쳤습니다.



2026. 1. 18. 며칠 전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보았습니다. 양수리 강길을 산책하던 중에 보았던 한 마리 학과 여러 마리의 백조를 담은 것입니다. 차가운 강 얼음 위에 꼼짝하지 않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니 평안해 보였습니다. 굳이 가까이 가서 들여다볼 일도 아니었습니다. 얼음 위에 정지된 듯 서 있는 저들의 침묵은 게으름이 아니라 차가운 계절을 몸으로 통과해 내는 가장 치열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멀리서 보아 평온한 것은 가까이서 본 버팀이 그만큼 단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거대한 하늘 아래서 작은 버팀으로 자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득 치열하게 자기 삶을 살아내고 있는 식구들 중에, 아직은 제가 덜 피곤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을 더 미시사로 보는 눈이 깊어지는 듯해서 다행입니다.


거대한 하루가, 가벼운 차 한 잔으로 조용히 닫힙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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