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글자 단어 에세이]
섬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살아본 적은 없기에, 솔직히 섬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날 맑은 날, 섬에 만들어진 둘레길을 걸으며 느꼈던 행복이 내가 가진 거의 전부의 감각입니다. 내가 섬에 대해 아는 사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압니다. 육지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 바다 어디쯤에 사방이 바다를 향해 열린 채로 자리한다는 지리적 특징 정도뿐입니다. 나에게 ‘섬’은 시와 노래, 그리고 문학의 한 장르에서만 존재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늘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조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매형은 어린 시절을 섬에서 자랐습니다. 결혼 전 매형이 보내온 편지가 집에 도착하면, 우체통에서 꺼내 들고는 늘 발신자 이름에 먼저 눈길이 갔습니다. “섬소년으로부터.” 실제로 매형은 섬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즐겁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지낸 나도 ‘섬’이라는 말에 뭔지 모를 즐거움과 애틋함을 함께 느끼게 되었습니다. 망망대해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한 소년도 자연스럽게 상상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섬’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동떨어진 자리에 있으며,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홀로 남겨진 단독자처럼 느껴집니다. 바람과 햇빛과 물의 품에 둘러싸인 자연의 아이 같은 모습으로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인 정현종 님의 시를 읽다가 「섬」에 관해 조금 다른 얼굴을 만났습니다.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섬』 (문학판, 2015)
시 「섬」은 섬에 대해 두 가지를 일러줍니다. 사실과 소망입니다. 사실이라면,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이라면,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시어에 담겨 있습니다. 이 두 의미를 따라 시인이 그리고자 했던 그림을 떠올려보면, ‘섬’ 자체라기보다 그 섬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어떤 희망의 공간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와 달리, 사람들은 섬을 흔히 ‘외로운’, ‘격리된’ 실체로 이해합니다. 사람들 사이가 멀어지거나 서로 무심하게 떨어져 있는 경우를 빗대어 말할 때, ‘섬’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른 이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모습일 때,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묘사합니다. 서로에게 잇대어 있지 못하고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경우에도, 육지의 파편 같은 그림으로 섬을 그릴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섬’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것은 그가 누구든지 자기 아픔을 짊어지고 자기 삶을 홀로 살아내야 할 만큼 버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정현종 님의 시는 시어의 마지막—두 번째 행—에서 섬이 최후에 정초하는 지점을 보여 줍니다. 그 닻을 내린 지점은 외로움이 아니라, 섬에 “가고 싶다”라는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섬이 외로움의 표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소망의 방향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섬’이 외로움의 상징을 넘어 그리움의 표상이라면, 섬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적절하게 조화된 헤테로토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 경험하던 것과 이질적이면서도,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하는 공간입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이질적인 감성이 그리움으로 조화되는 것을 표현하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우리말 ‘그린내’는 ‘서로 그리워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홀로 있어 외로움을 떨칠 수 없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리움으로 자신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다만 이런 관계에서는 때때로 서로에게 몰입될 정도로 그리움이 넘칠 때가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몰입이 오랫동안 고착된 열정이 쉽고 빠르게 소진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오래 익어버려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무너지는 과일처럼 말입니다. 요컨대 그린내는, 그리움이 지나쳐 서로에게 과도하게 기울어질 때 한 번쯤 숨을 돌릴 여백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일깨우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 사이에 ‘섬’이 필요합니다. ‘섬’은 몰입된 관계를 조금 떨어진 자리로 옮겨 줍니다. 관계의 여백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을 견딜 수 있는 거리를 마련해 줍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섬은 ‘가보고 싶은 곳’, 동경과 심연의 신비가 남아 있는 삶의 제3지대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섬’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공동의 공간으로 변화합니다.
삶에서 이런 공간을 기억하시는지요? 섬을 상상하는 동안, 지나치게 밀착된 관계로부터 조금 떨어져 보면서도 동시에 그 섬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더 짙게 간직할 수 있는 곳 말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자기 외로움을 넘어 섬에 닿을 길과, 그리움을 함께 나눌 친구를 찾아 함께 나아갈 삶의 방향을 냉철하게 되새김질할 만한 공간 말입니다. 가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어디서든 찾아올 수 있도록, 마음속 ‘등거리’를 제공하는 장소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질적이면서도 동질감을 제공하는 기억의 공간 말입니다. 익숙한 존재를 새로운 피조물처럼 받아들이도록, 관계의 재정립을 채근하는 사랑의 자극제 같은 터전 말입니다.
따라서 정현종 시인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표현한 것이나, 섬에서 자라 새로운 세계와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한 섬 소년의 모습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이야말로 외로움과 고독의 상징이 아니라 ‘그리움’의 보고이며, 자신을 새롭게 일깨우는 회복의 표징입니다. 섬은 동떨어져 있어도 아름답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섬을 사이에 두는 사람들은 떨어져 있어도 영락없이 ‘그린내’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홀로 있는 ‘섬’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섬’이 될 때, 섬은 기쁨과 즐거움의 터전이 됩니다. 그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바위와 풀냄새만으로도 “나도 한번 가고 싶다”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이 ‘사람들 사이의 섬’은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섬은 ‘처음 세상’에 사람이 나타났을 때부터 함께 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오히려 두 사람이 함께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름답게 다독여 주는 영적 안전지대이자, 삶의 가늠자를 제시하는 근원지였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어느 날, 이 ‘사이의 섬’이 사라졌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순식간에 ‘외로움과 고통의 틈’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두 사람 사이에 그 섬이 솟아올랐습니다. 거룩한 바람이 그 섬을 휘감아,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워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섬은 ‘두 사람 사이를 감싸 안아 주는 포용과 충만의 섬’이 되었습니다. 그 섬을 떠올릴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서로 ‘외로움과 그리움의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섬이 있습니다. 그 섬은 우리 모두를 ‘그린내’로 만들어 주는 사랑의 섬입니다. 그 ‘섬’이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다시 있던 때부터, 나는 그 섬의 이름을 ‘야훼의 영이 부는 곳’으로 명명했습니다. 야훼의 영이 바람처럼 부는 섬에서 두 사람은 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원시정원처럼, 바람이 지나가 사람 사이를 휘감습니다. 나도 그 바람을 누리고 싶습니다.
나에게 정현종 시인의 ‘섬’은 하나의 세속적 잠언입니다. 역설적으로, 신앙의 관점에서 ‘처음 관계’의 기억으로 나를 끌고 갑니다. 사람 사이에 그 섬이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섬이 나타났습니다.
돌이켜 보면, 섬을 사이에 둔 두 사람—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엉켜 있는 두 사람—그는 바로 나의 옛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이 뒤섞인 나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