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안식의 철학에 기대어
밤새 눈 덮여진 오르막길,
아침 햇살에 비워진, 그 내리막길―
어느새 밤새 채워진 어린봄바람길, 나여, 걷자!
눈이 오고, 녹고, 다시 바람이 채우는 일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마을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있다. 경사가 제법 기울어진 길이다. 평소에도 차들이 오르내릴 때마다 엔진 소음이 적지 않다. 한밤중에도 소음이 빈번하여 그 소리에 그리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익숙하다 해도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아주 낯설게 들여와 몸을 괴로힐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한 겨울 눈이 내리는 날이 그렇다.
해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길에 밤새 차들이 곤욕을 치르는 소리가 들린다. 미처 제설 준비가 되지 않으면 이 오르막길은 올라가고 내려오는 차들이 뒤엉켜 가끔 접촉 사고가 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앞길을 막아버린다. 그 도로가 아니었다면 백설의 풍경에 기분 좋게 사진도 찍고 눈사람도 만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겠지만, 이 도로에 들어서면 그 눈은 의외의 무기로 돌변한다. 엉킴과 막힘은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원인이다. 낮은 경사라도 긴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젯밤에도 눈이 내렸다. 폭설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도로가 그 옅은 눈으로도 굼벵이 길이 되었다.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 그 도로를 지나오며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부디 모든 차들이 아침까지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득했다. 그 마음은 혼잣말이긴 해도 내가 기억하는 지난날의 삶의 무게이기도 하다. 이 마음의 짐을 누군가의 덜어줄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일 없이 눈이 잘 녹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다.
다행히 밤새 별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소음도 크지 않았다(아니 아예 차가 다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따뜻한 차를 담은 머그컵을 들고 물기 서린 창밖을 내다본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건너편 그 도로에 햇살이 쏟아진다. 하늘도 조금 푸르다. 오르고 내리는 모든 길이 순조로워 보였다. 다행이다. 느낌 탓인지, 창문 너머 빈 도로 위로 겨울바람이 훅 하고 불어 가는 것 같다. 추위는 그대로인데, 그 바람은 마치 어린 봄바람, 봄의 전령처럼 길 위를 스치는 것 같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는 사실이 새롭진 않다. 그러나 해마다 이 즈음에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언제나 새롭다. 새롭다는 것은, 잊었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놓치고 지나간 것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일깨워 몸의 촉각으로 배우겠다는 의미다. 창 안에서 창 밖의 세계를 실감하기란 불가능하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정도이겠지만, 그것이 모든 세계의 촉감을 실어오진 못한다. 어떤 지난날은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일어난 일처럼 상상해야 한다.
습관대로 좌식 책상에 앉았다. 어제와 오늘 창밖 풍경을 떠올리며 나의 단가(작은 철학시)를 남겼다. 제목 <설작야-雪昨夜>는 어젯밤 내린 눈이라는 말이다. 시의 줄기로 어느 겨울날 한밤에 조용히 내리고, 아침 햇살 아래 스스로 녹는 눈. 그리고 그 뒤를 채우는 바람을 담았다. 나는 ‘내리고,’ ‘녹고,’ ‘불어오는’ 이 순환을 단순히 ‘자연의 순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채워짐’과 ‘비움’이고, 나아가 ‘새롭게 채워짐’이라는 안식의 구조다. 눈이 덮이고, 녹아서 비워진 자리에 바람이 다시 채우는 이 리듬은—하늘의 삶이 땅의 나를 견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이 어둠 가득한 시대에 나에게 ‘주어진’ 삶을 견디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겨울에 갑자기 내리고 햇살 아래 저절로 녹는 눈, 그 뒤에 불어오는 바람은 겨울 한 복판에서 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하는 창조의 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내가 사유하는 검은 안식의 철학이다.
덮임: 가득함의 세계, 눈 덮인 오르막길의 윤리
밤새 내린 저 눈이 오르막길을 덮기 전만 해도 세계는 고요했다. 소음은 곧 사라지는 것이 견딜만했다. 하지만, 눈이 내린 뒤 세계는 급변했다. 그 좁은 길마저도 온통 하얗게 변했다. 흐름은 막혔고, 전진은 후퇴해야만 했다. 눈은 내 삶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 때 아름답다. 처음 내리는 순간 그 아름다움은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평안하지도 않다. 눈은 차갑고, 무겁고, 미끄럽다. 갈수록 삶을 위태롭게 한다. 인간이 자기 속도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해도 눈 위에서는 그 믿음이 무력해진다. 그러니 눈 덮인 오르막길이 그저 ‘기상 현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늘의 삶이 우리에게 자주 보내는 질문일 수도 있다. “눈이 덮인 길 어떻게 올라가겠느냐, 아니 어떻게 내려오겠느냐?”
생각해 보면, 누구랄 것도 없이 자기 삶을 끊임없이 무언가를 쌓아 올려야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돌처럼 받아들인다. 운명처럼 받아 들고 그것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 수고는 자주 눈 덮인 오르막길을 전진해야 하는 일일 때가 많다. 그 길 위의 끝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수없이 미끄러지거나, 사고도 감수해야 한다. 오를수록 뒤로 밀리는 일도 있다. 그래서 미끄러지지 않게—아니 밀려 내려갈 정도로 미끄러운 길을—굉음을 내며 비틀거리면서도 전진해야 한다. 4륜구동 차를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스노체인, 다음에는 아예 바퀴를 교체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곧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한다. 눈 길 위의 굉음은 단순히 엔진의 아우성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잠재된 불안의 소리다. 오를수록 불안은 증폭된다. ‘눈’이 보기에 좋다 해도 눈 덮인 길은 인간이 감당해 내야 할 어떤 어둠의 힘과도 같다. ‘검은 안식의 철학’은 바로 이런 순간에 발휘된다
‘검은 안식’은 어둠 속에 비치는 빛이 주는 위로라는 결과를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정’이며, ‘단계’다. 먼저, ‘덮임’의 세계를 직시하는 것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덮이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덮인 세계의 무게를 가볍게 무시하지 않는다. 덮임이 던지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견디려고 모든 지혜를 끄집어낸다. 눈 덮인 오르막길에서 우리는 서로의 저항자다. 상대를 멀리하고, 가까이 오는 것을 밀어내야 한다. 먼저 올라가고 싶고, 먼저 빠져나가고 싶은 욕구만이 길에 가득하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간의 윤리가 발휘된다. 그 윤리는 두 가지 행동으로 구현될 수 있다. 들어서기 전이라면, 오르막길을 ‘돌아가는 것’이며, 들어선 뒤라면, 더 오르지 말고, 안전한 옆길에 ‘멈춰서 있는 것’이다. ‘우회와 정지’의 윤리만이 오르막길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다른 방식이 더 있다면, 그것은 마냥 기다리는 것이다. 눈이 멈추고, 눈길이 녹아내리기를. 그리하여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의 안전을 빼앗지 않는 것. 내 급함이 타인의 불안을 가중하지 않는 것이다. 눈은 검은 안식의 상징 같은 피조물이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불안을 토대로 삶의 관계를 측량하는 차가운 시험지다.
요컨대, 어떤 면에서, 특히 신앙의 자리에서는, 눈이 내려 덮인 그 길은 인간의 마음을 한 겹 더 깊은 내부로 데려가는 은혜의 장치다. 눈이 내려 길 위에서 숨죽여야 시간. 말이 줄어드는 시간. 속도가 무력해지는 시간. 그 시간은 당연히 어둠이다. 그러나 바로 그 어둠이, 검은 안식의 자리다. 검은 안식은 세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어둠과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삶의 방식을 일깨운다. 그 어둠의 길을 안식하며 걸어갈 수 있는가?이다. 생각해 보면, 밤새 눈이 내리는 동안 길은 멈춘 듯 보이지만, 사실 길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다. 눈으로 덮이는 길마저 그 눈을 버티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다. 버팀으로써 오고 있는 봄을 준비하는 것이다.
비움: 햇살 아래 평등한 소멸, 상실이 아닌 귀환
아침이 오자, 눈이 녹았다. 눈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끊어지거나 소멸되지도 않는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을 매해 겨울마다 새롭게 경험한다. 어린 시절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땅에서 살기도 했지만, 그때도 내 삶에서 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상상한다는 것은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밤새 쌓인 눈이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눈의 두께와 덮인 시간과 상관없이 햇살이 비치고 기온이 올라가면 눈은 결국 길에게 자신을 비워주어야 한다. 그것이 눈의 샬롬이다. 나는 눈이 녹는 장면을 상상할 때가 있다. 햇살 따뜻한 날, 처마 밑에서 지붕 위 눈이 녹아내리면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던 어린 시절. 그날 그 풍경을 이렇게 정리해 둔 적이다. “모든 눈은 햇살 아래 평등하다.” 밤새 길을 지배했던 하얀 폭군도 결국 따뜻한 햇살을 뿜어내는 아침 앞에서는 말없이 녹아준다. 오래 버틴 눈도, 금세 사라지는 눈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샬롬을 위해 스스로 비워진다. 이 비움이 창조의 윤리라면 과장 된 것인가. 검은 안식의 윤리라면 어색한가.
중요한 것은, 이 비워짐이 상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눈이 사라지면 빈 공간이 남는 것이 아니라, 숨겨졌던 그 길이 돌아온다. 눈은 그 길을 잠시 ‘지웠’을 뿐이다. 하지만, 햇살은 그 길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는 나의 상상, 기억을 ‘되돌려’ 준다. 눈 녹는 비움은 눈의 상실이 아니라 길의 귀환이다. 역설적으로 눈이 덮인 그 길은 잠시 화려했기도 했다. 그러나 위협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눈이 녹는 순간, 길은 자신을 덮었던 그 겉옷을 벗어버리고, 본래의 것, 처음의 것, 잠시 감춰졌던 자기(自己)로 돌아간다. 그 순리를 따라 길은 크게 숨을 내쉰다. 생명 호흡의 귀환이다.
이 순리를 통해 생각해 보는 검은 안식의 핵심은 이것이다. 검은 안식은 눈 아래 숨죽인 차가운 어둠 계곡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눈길 위에 골고루 비추는 햇살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르며 두 발로 일어서는 일이다.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방치해 둔 존재의 가장 깊은 피난처, 휴식처를 의미한다. 검은 안식에서 ‘검다’는 것은 절망의 색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응집된 것이다. 초과되고 과잉된 것을 걷어내고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게 하는 우회의 색이다. 햇살이 눈을 녹이는 것은, 단지 따뜻함이 이겼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가득함이 초래할 수 있는 오만’이 ‘비움이 가져다주는 샬롬’으로 회복되는 과정이다.
삶도 그렇다. 나를 덮었던 어떤 일들—어떤 무게들—어떤 말들—어떤 관계의 뒤엉킴—그것들은 언젠가 햇살을 만난다. 그 햇살은 때로 지난날의 시간이고, 때로 과거의 깨달음이고, 때로 오래전 타인의 작은 배려이다. 다만, 내가 지나쳤고, 떠올리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 어둠 속 사건들이 때로는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이었고, 나의 뭉개진 질서를 회복하게 도왔던 중보였다. 다만 ‘기억조차 기억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햇살이 비치는 순간, 나는 ‘내 삶에 눈이 내려 엉켜버린 길을 눈이 녹아 다시 회복된 기적 같은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을 더는 기억 속에 남기지 않아야 한다.’ 눈을 녹게 한 햇살의 따뜻함을 망각하는 그 기억을 다시는 간직하지 않아야 한다. 눈의 역설은 비움의 충만이다. 망각은 한편으로는 불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총이다. 그 비움의 순리를 따를 때 비로소 ‘나’는 ‘나’에게 귀환하는 길을 걸을 수 있다.
길의 공존: 내리막길의 재해석
햇살에 눈이 비워진 오르막길은 처음부터 ‘내리막길’이기도 했다. 이 말은 그 길의 지형이 처음부터 두 개였다는 의미다. 다만 어느 순간 나의 감각이 하나에 고착되었을 뿐이다. 어젯밤 눈 덮였던 길은 오르막길이면서 내리막길이었다. 어젯밤은 치열한 생존 투쟁을 요구한 공간이었을 때도 그렇고, 오늘 아침 햇살 가득한 순간에도 이 두 길은 공존한다. 이 두 길은 어떤 형태로든 생존의 고요한 평화를 향유하는 공간이라 할 만하다. 세계의 모든 길은 오르막이면서 내리막길이며, 가는 길이면서 오는 길이다. 이 역설은 검은 안식이라는 점에서 볼 때, 더욱 중요하다. 검은 안식은 늘 역설, 정반(正反)의 형태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길의 공존이라는 관점에서 검은 안식은 어두운 세상을 거슬러 올라야 하는 분투의 시공간이면서, 동시에 햇살이라는 지혜에 몸을 맡기고 비워진 길을 따라 가볍게 걸어가는 안식의 토포스이기도 하다. ‘맞서 올라가는 힘’이면서도, ‘내려놓고 내려가는 지혜’다. 오르막길을 오르며 내리막길이라고 뒤바꿔 생각하는 지혜는 내가 세상을 이기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세상에 새겨진 질서—중력—시간—호흡—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행동이기도 하다.
누구나 알 듯이,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에서 더욱 긴장해야 한다. 눈길은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내리막은 오르막의 고통을 기억하며 자기를 겸손하게 만드는 자기 미학의 길이다. 오르막을 통과한 뒤의 내리막도 그렇지만, 오르막길에서 기억하는 내리막길은 더욱 그렇다. 그 길은 정상을 향한 승리감이 아니라 정상에서도 조심스러운 삶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제 다 이뤘다, 괜찮다”가 아니라 “더 조심하자”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짊어졌던 눈이 녹아 대지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자유로워진다. 잡은 운전대에서 힘이 스스로 빠지고, 어깨가 풀어진다. 마음의 두근거림은 평정을 찾는다. 모든 삶의 길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해방된다. 그 해방은 더 많은 것을 움켜쥐는 데서 온 것이 아니다. 더 많이 내려놓는 데서 온 것이다. 눈이 녹아 사라지듯, 나도 내 안의 과잉을 녹여야 한다. 그러니 ‘기억하지 않아야 할 것’은 명확하다. 그것은 자기 추억에만 함몰된 ‘자기중심의 기억’이다.
오르고 내리는 것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검은 안식이 안식은 멈춤이 아니다. 쉼 없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안식은 속도를 일깨운다. 가장 자연스럽고, 조금 느릿한 속도로 나아가는 법을 제안한다. 마치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몰라도 고요한 바람이 불어 가는 방향을 몸으로 감지하여 자기 몸을 맡기는 것과 같다. 강풍에는 내 몸을 맡길 수 없다. 나는 이 지점에서, 느릿한 그러나 단호한 ‘걸음’을 기억한다. 그런 걷기는 단지 운동이 아니라 철학이다. 걷기는 내가 속도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인정하는 훈련이다. 걷기는 내가 길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길과 함께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겨울 훈련이다.
채움: 어린봄바람길, 보이지 않는 생명의 윤리
마침내 아침에 눈이 녹아 길이 드러났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정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다. 새로운 출발이다. 새로움이라는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잊어버렸거나 지나쳤던 나의 옛 삶이 지금 여기에 되살아나는 사건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이것은 자연의 공식이다. 눈이 녹으면 길이 열린다. 그러나 내게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비워진 자리는 그대로 방치되지 않는다. 비워짐은 공백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채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눈이 녹은 길에 바람이 부는 이유다. 바람의 채움은 ‘어린봄바람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나의 단가에서 ‘어린봄바람길’은 그 말 자체가 한 덩어리다. 이 바람은 겨울에만 분다. 눈 내린 뒤에만, 알 수 없는 곳에서 시작한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며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키 큰 나뭇가지 끝이 살랑 흔들리는 것으로만 이 바람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 강물처럼 고요하게 불어오고, 불어 가는 창조주의 호흡이다.
나는 이 바람을 검은 안식의 증거로 읽는다. 단순히 봄이 왔다는 증명이 아니라, 봄이 오고 있다는 하늘의 시그널인 것이다. 물론 아직은 겨울이다. 날은 춥다. 눈 녹은 길이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아직은 빙설은 남아있다. 겨울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은 분다. 보이지 않게,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어디로부터 불어온다. 검은 안식은 바람 부는 것과 같다. “다 끝났다”가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검음의 사라진 뒤에 ‘이미’ 안식이 와있다고 말한다. 아직 겨울은 끝나지 않았고, 아직 봄은 시작도 되지 않았으며, 따뜻함은 여전히 미약하지만, 이미 가까이 와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어린봄바람길’은 검은 안식의 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뒤엉켜버리게 한 ‘어둠’ 속에 무엇인가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령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검은 안식은 언제나 삶의 부활로 이어진다. 이것을 어린바람길에 몸을 맡길 때 실감할 수 있다. 그 살갑게 부는 바람, 내 보이는 길에는 불지 않으나 보이지 않는 길 너머에서는 불고 있다. 그 미지의 바람이 눈 녹아내린 그 길 가득 채워져 있다. ‘미약한 어린바람’일 수 있다. 이미 봄의 거대한 싹이 움튼다. 손에 닿으면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말랑말말하게 느껴질 것이다. 좁고 짧고 헝클어졌던 그 눈 길에 대지의 기운이 힘차게 태동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바람은 유연함의 상징이다. 딱딱하게 굳은 눈의 세계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던 유연함이다. 바람은 잡을 수 없지만, 바람이 없는 세계는 숨을 쉴 수 없다. 그러니 바람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윤리’다. 내가 당장 붙잡을 수 없더라도, 내가 지금 설명할 수 없더라도, 삶이 나를 살게 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것이 원시 정원에서 가볍게 불었던 바람이다. 검은 안식의 철학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온 감각으로 일깨우며 하늘의 섭리를 신뢰하는 훈련이다.
“나여, 걷자!”: 안식 이후의 명령, 존재가 자기에게 건네는 문장
이제 나의 단가에서 마지막 줄을 조금 부연해야겠다. “나여, 걷자!” 나는 이 문장을 단지 의욕 넘치는 패기로 쓰지 않았다. 이 문장은 내가 앞서 말한 검은 안식의 한 결론이다. 검은 안식은 ‘쉬자’로 끝나지 않는다. ‘버티자, 견디자’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걷는 일’로 다시 시작한다. 왜냐하면 검은 안식의 목적은 정지(停止)가 아니라, 회복된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밤새 눈이 내렸을 때, 대체로 숨죽여 버틴다. 아침 햇살이 비칠 때, 모두 비워진 길에 환호한다. 그 뒤, 어린봄바람이 채울 때, 우리는 보지 못한다. 그 길에 채워진 생명의 소생을 놓친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망각에 익숙한 나를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걸어야 한다.’ 이처럼 덮임-비움-채움. 이 죽음 계곡 같은 삶의 순환을 인식하고 지나가는 존재만이 스스로에게 ‘걷자’라고 말할 수 있다. ‘걷자’는 몸의 호전을 위한 자기 암시가 아니다. ‘걷자’는 실제로 두 발로 길에 나서는 프락시스다. 승리를 향한 돌진이 아니다. 내가 어둠에서도 살아 있고, 비틀거리면서도 내가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단순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선언하는 ‘자기 행위’다.
요컨대, 안식은 게으름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한 존재의 휴식이다. 비워진 자리에 채워진 바람, 그 바람을 따라 걷는 그 걸음은 어제 내려 눌렀던 삶의 무게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논둑길을 걷자’고 노래한 이상화시인의 노래처럼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준 구원의 행진이다. 그 행진은 요란하지 않다. 바람처럼, 고요하게. 내리막길처럼, 겸손하게. 햇살처럼, 공평하게 이어진다.
결: 자연의 순리로 다시 읽는 검은 안식—봄은 이미 태어나 있다
나의 작은 철학시 <설작야>의 논지를 상기해 보자. 겨울에 내리고, 햇살 아래 녹는 눈은 검은 안식의 철학을 반영하며, 봄이 오고 있음을 증명하는 자연의 순리다. 밤새 내린 눈은 대지를 하얗게 지워버리고 침묵을 강요한다. 그 무게에 짓눌려 숨죽였던 시간은 역설적으로 존재가 가장 깊은 내부로 침잠하는 검은 안식의 시간이 된다. 눈 덮인 오르막길은 고통스럽지만, 그 아래에서 대지는 햇살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비울 준비를 마친다.
아침 햇살이 비추고 눈이 녹아내릴 때, 화려했던 백색의 가득함은 사라지고 비로소 길의 본래 얼굴이 드러난다. ‘비워진 내리막길’은 집착을 내려놓은 자만이 누리는 ‘하향하는’ 평화다. 그러나 철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비워진 그 자리는 허무로 방치되지 않고, 밤새 응축된 대지의 온기가 길러낸 ‘어린봄바람’으로 다시 채워진다.
그러니 봄은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 ‘나중에’만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이미, 작은 바람의 형태로 수없이 내 삶에 도착해 있다. 아주 미약하게, 거의 들리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미약함을 스스로 경시하지 않는다면, 그 미세함이 들려주는 소리를 온몸으로 굉음처럼 들을 수 있다. 그 여린 ‘전령’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하여 나는 나에게 말한다. 나여, 걷자. 이제 눈이 녹아 새길이 열렸다. 덮임을 지나왔고, 비움을 배웠고, 채움의 바람을 느꼈으니—이제 다시 길 위에 서자.
“기억하지 않으려는 너를 ‘기억하지 말라.’
나의 봄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있다.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