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연습>I. 설국의 야누스― 정동(靜動)의 두 얼굴
“지방의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 듯했다.”
노벨문학상 위원회(1968)는 이 문장을 두고 “일본인의 심정을 가장 섬세하게 포착한 서술”이라 평했다. 이처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내면의 정적(靜寂)을 감각의 미세한 결로 포착한 문학이다. 그런데 2013년, 또 하나의 설국이 영화로 등장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다. 영화에서 그려낸 설국은 문학의 정적인 세계를 뒤집어, 사회 구조의 불균형을 폭발적 리듬과 동적 미학 속에서 드러낸다.
이 글은 가와바타의 고요한 설국을 배경에 두고, 봉준호가 구축한 동적 비판성을 ‘문(door)’이라는 경계의 기표를 토대로 공간기호학으로 읽어보려는 시도이다. 특히 폭력과 구원, 폐쇄와 이탈의 긴장을 주목한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인간 문명 속에 암약하는 폭력의 ‘영원성’을 경고한다는 인문신학의 의의를 사유하려 한다.
어느 세계나 궤도 위를 벗어나지 않게 붙드는 질서유지의 힘은 폭력일 때가 많다. 이 폭력은 인간 내부의 저항만으로는 분쇄할 수 없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너머로부터 오는 힘에 의해서만 해체된다. 열차가 탈선하듯 궤도를 벗어날 때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이미지와 의도가 결합한 복합장르다. 이른바, 내러티매진(Naratimagine)이다. 기표와 기의가 충돌하고 화해하는 순간, 인간 경험의 장—선악, 힘, 경계—이 가장 선명해진다. 『설국열차』는 바로 그 경계의 자리에서 폭력의 영원성과 궤도이탈의 가능성을 동시에 발화하는, 시대를 초월한 ‘기호화된 현실의 긴장’을 담은 철학에 잇대어 있다.
이 작품의 긴장은 두 축으로 수렴된다. 하나는 달리는 열차가 만들어 내는 ‘안과 밖’이라는 공간의 분절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계를 따라 끊임없이 변색하는 폭력의 이미지들이다. 이 긴장은 새로운 생명의 기대로 해소된다. 영화의 주조음인 어두운 열차 내부는 생존의 공간이다. 열차 밖인 흰 눈의 나라는 죽음이 지배하는 절대적 황무지다. 이 둘의 대비를 통해, 영화는 어둠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생존의 씨앗’을 완벽하게 시각화한다. 조용히 힘차게 떠오르는 모습이다.
II. 문(門)과 세계 ― 죽어가는 우주를 살아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선
설국열차는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생존 열차다. 이 열차는 눈으로 덮인 세계 위에 놓인 단 하나의 궤도, 그 좁은 길을 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은유한다. 끝없이 회전하는 이 열차는 마치 지구의 운동을 축소해 모사한 듯, 눈 벽을 뚫고 나아가는 송곳이자 얼어붙은 우주를 관통하려는 비상구처럼 보인다.
열차는 일렬로 이어진 칸들로 하나의 선을 이룬다. 영화에서 이 선형은 인간 세계의 미메시스로 변형한다. 18년째 종착 없이 한 방향으로만 돈다. 자급적 지배세계로서 하나의 지구처럼 자전한다. 이 열차가 엔진이 멈추거나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멸종은 불가피하다. 이 무언의 신념이 이 ‘작은 지구’의 질서를 지배하는 내적 동력이다.
열차 안에서 전진과 후퇴의 자유는 제한된다. 오직 칸을 연결하는 ‘문(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다. 세계의 이동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통로다. 문이 닫히면 나의 세계는 고정되고, 문이 열리면 잠겨 있던 다른 세계로 틈입할 수 있다. 이렇게 설국열차의 모든 서사는 문의 개폐를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행위는 ‘나와 너’를 결정하는 힘이다. 관객은 문이 열릴 때마다—혹은 열리지 않을 때마다—세계의 분할과 재배열을 주도하는 힘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렇다면 이 열차는 세계를 어떻게 나누는가?
첫 번째 분할은 기차를 중심으로 바깥/안쪽으로 나뉘는 구도다. 바깥은 흰 눈으로 봉인된 죽음의 세계이다. 폐허이다. 안쪽은 그 폐허로 가는 길이 아예 봉쇄된 고립공간이다. 카메라는 열차가 달리는 동안 바깥에 멈춘 문명의 잔해를, 내부의 시선으로 보여 준다. 특히 꼬리칸 사람들이 폭력으로 전진하는 사이 마주한 바깥 세계에 대한 경이감이 묘한 이질감을 남긴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황무지를 애잔하게 바라본다. 열차 밖은 절대적 무의미의 디스토피아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바깥 세계에 대한 완전한 포기다.
두 번째 분할은 열차 내부의 앞/뒤의 구도다. 내부는 바깥보다 그나마 유토피아다. 앞칸으로 갈수록 삶의 질은 극명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전진할 수 없다. 이런 한계의 절정은 꼬리 칸 사람들에게 더 극명하다. 그곳은 삶과 죽음이 맞닿는 최후의 토포스다. 꼬리 칸은 어둠과 결핍이 응축된 세계이자, 열차 전체를 움직이는 노동의 근원지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맨 앞칸과 맨 뒤 칸이 공존의 운명을 공유하지만, 구조적으로는 거의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18년 동안 몇 번 일어난 반란이 실패한 원인도 문이 통제에 있다. 따라서 칸은 단순한 계급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의 경계이다. 감옥 칸을 기준으로 그 앞은 밝음·여유, 뒤는 어둠·결핍의 층위로 나뉜다. 결국, 문을 열 수 있는 자만이 전진의 기회를 얻는다. 이 지점에서 남궁 민수의 등장은 영화의 분기점이다.
세 번째 분할은 인물 관계다. 이것 역시 문의 개폐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윌포드는 ‘균형유지’라는 명목으로 통치를 설계한 위장된 구원자이며, 민수는 문의 개폐가 가능한 기술자이자 영화 전체의 시점을 전환하는 인물이다. 그는 ‘앞이나 뒤’가 아니라 ‘옆으로 난 문’을 인식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 옆문이 등장하는 순간, 세계의 구조는 크게 흔들린다. 민수의 딸 요나는 문 너머를 보는 첫 세대로, 땅을 본 적 없는 세대가 품은 예감의 얼굴이다. 그녀는 종말의 폐허 위에서 생존의 가능성을 감지하는 감수성을 상징한다.
요약하면, 설국열차의 세계는 문을 중심으로 구도와 인물이 재편되는 다층적 구조다. 바깥/안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앞/뒤는 제한된 이동과 통제의 질서를 시각화한다. 그 사이에서 문은 이동과 정체, 투쟁과 억압, 구원과 파멸을 동시에 결정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문을 여는 민수, 문 너머를 보는 요나, 문을 통제하는 윌포드—이 세 인물의 위치는 곧 세계의 운명을 가르는 구조적 배치다. 결국, 설국열차라는 작은 우주는 문의 개폐를 통해 생존의 가능성을 조율하며, 그 문을 둘러싼 시선과 선택은 닫힌 구조를 넘어 외부의 ‘불가능한 세계’를 상상하도록 이끈다. 이 영화의 서사는 단순한 공간의 정치학을 넘어, 봉인된 세계를 흔드는 인간의 미세한 저항—그리고 그 저항이 여는 신학적 전환의 기호를 품고 있다.
Ⅲ. 선형의 폭력 ― 열차 세계를 통제하는 검은 엔진
설국열차의 세계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달릴 수 있는 직선 위에 구축된다. 회전하는 원형도, 위아래의 층위도 없다. 오직 앞과 뒤로만 구분되는 세계다. 이 직선의 세계에는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화면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것은 전진이 폭력을 동반하고, 후퇴는 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선형 구조는 선택보다 순종을 허락한다. 윌포드의 대변인 총리 스윈튼의 연설은 이런 복종을 강요하는 전령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밀려나고, 한 발만 늦어도 추락하는 듯한 생존의 긴박함을 말로 짓누른다. 그의 연설은 열차의 공포 구조가 단순히 열차의 운행 방식이 아니라, 선형적 시간·역사·권력에서 파생하는 폭력의 은유에서 파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강제 순종의 의도는 문과 관련지어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생존을 설계하는 손의 폭력은 곧 문을 통제하는 자의 권력이다. 설국열차에서 전진의 기회는 문을 열 수 있는 자에게만 부여된다. 그런데 문을 닫으라고 명령하는 자도 폭력의 주체이지만, 문을 실제로 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자 역시 또 다른 권력자다. 이들에 의해 닫힌 문은 공포를 낳는다. 그러니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은 자유의 특권이 된다. 결국, 세계의 경계를 나누고 이동을 허가하는 행위 자체가 생존을 배분하는 정치적 폭력이다. 이 지점에서 남궁 민수와 요나의 등장은 결정적이다. 민수는 문을 설계한 기술자로서 구조의 논리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요나는 그 문 너머를 내다보는 예지적 감각을 지닌다. 이 둘의 존재는 체제를 유지해 온 폭력 구조가 언젠가 균열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들이 맡은 역할은 단순히 다음 칸으로 나가는 ‘미션’이 아니라, 열차를 지탱해 온 질서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무너질지를 보여 주는 징후다. 따라서 영화의 핵심 명제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문을 통제하는 자가 세계를 통제한다.” 문이 열리는 찰나, 세계의 규칙은 흔들리고 생존의 배치는 재조정된다. 문이 열릴 수 있기에 반란은 가능하고, 문이 열렸음에도 세계가 변하지 않을 때 폭력은 더 공고해진다. 그렇기에 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라, 폭력과 통치의 힘이 드나드는 경계의 장치다.
둘째, 열차의 문과 칸은 세계를 조직하는 보이지 않는 기계장치다. 영화 중간중간 드러난 설국열차의 선형 구조는 단순한 공간 배치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조직하는 은유적 기계이며, 각 칸은 하나의 ‘세계’, 문은 그 세계들을 잇거나 잘라내는 연결고리다. 문은 생존·정체·전진·후퇴를 결정하는 기호이다. 닫히면 세계는 봉합되고 열리면 또 다른 우주가 잠시 틈입한다. 첫 번째 힘의 층위는 칸의 이질성에서 발현한다. 겉모습은 모두 같지만, 칸마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 꼬리 칸은 인간이 누릴 최소한의 조건도 보장되지 않는다. 앞칸의 색과 풍요는 구조적 폭력을 숨기기 위한 장식일 뿐이다. 열차는 껍데기가 같아도 공기·시간·리듬이 완전히 다른 우주를 구성한다. 설국열차가 스펙터클에 멈추지 않고 삶의 비대칭을 서사로 드러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번째 층위는 엔진 칸의 아이러니다. 이곳은 폭력이 완성되는 중심이지만 동시에 가장 무력한 자리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회전하는 엔진, 균형을 유지한다는 명목의 통제,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고독하게 식사하는 윌포드는 신전의 제사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자신이 만든 폭력 구조 안에 갇힌 깔끔한 죄수일 뿐이다. 폭력을 설계한 자가 그 폭력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는 역설—이것이 설국열차의 선형 구조가 드러내는 본질이다. 세 번째 층위는 구조의 취약성이다. 칸은 세계를 구획하고 문은 이동을 통제하지만, 이 장치에 세계 전체가 의존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무너진다. 칸 하나만 붕괴해도 전체가 흔들리고, 문 하나가 ‘다른 방향’으로 열려도 세계는 재편된다. 선형 구조는 고리가 한 번 깨지면 견고하게 보이는 폭력의 논리도 더는 지속하지 못한다. 문은 폭력을 유지하는 장치이지만 동시에 그 구조를 해체할 수 있는 마지막 틈이다.
요약하자면, 설국열차의 공간은 폭력의 공간이다. 이 폭력은 문과 칸의 상호작용에서 해석될 수 있다. 바깥/안쪽, 앞/뒤라는 이중구조가 칸을 통해 구획되고 문을 통해 개폐된다. 문을 통제하는 이들이 세계의 운명을 쥐고, 문이 ‘앞·뒤’가 아니라 ‘옆’으로 열리는 순간—선형 구조는 균열을 맞고, 그 틈에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결국, 이 영화는 폭력의 거대함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폐쇄된 세계의 균열을 꿈꾸는 인간의 미세한 저항을 주목한다.
Ⅳ. 폭력 서사에 담긴 세계관의 확장
선형의 폭력은 견고해 보이지만 동시에 취약하다. 그 균열은 단 한순간—문이 ‘옆’으로 열릴 때 발생한다. 옆으로 난 문은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라 체제를 벗어나는 최후의 수단이다. 세계 자체에 틈을 내는 행위다. 영화 속에서 옆으로 난 문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기존의 권력을 해체하고 질서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 마지막 여지, 곧 폭력의 궤도를 벗어나는 구원의 자리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오락영화가 아니다. 옆문을 감춰두었다는 것이 감독의 사유가 가장 밀도 높은 방식으로 침잠해 있다는 증거다. 감독의 사유는 ‘폭력의 양상’을 서술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폭력은 단일한 형식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양상으로 변조된다. 이 영화 전체에 구현된 폭력은 단순 자극이 아니라 내부 리듬과 질서를 드러내는 사상 장치다. 폭력은 계급 구조의 본질을 폭로하고, 지배와 생존을 관통하는 논리를 드러낸다. ‘폭력의 정당성’에 따르면, 폭력은 인간의 관음적 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그 욕망이 어떤 체제 위에서 유지되는지를 노출하는 철학적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
또한, 감독의 의도는 영화 속에서 폭력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두 층위에 병치한다는 것에서 읽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폭력은 커티스의 고백에서 드러난다. 꼬리 칸의 생존은 처음부터 폭력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인육을 나눠 먹던 절망의 순간, 한 사람이 자신의 다리를 내어놓은 희생이 새로운 질서의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열차 전체가 이미 폭력의 토대 위에서 굴러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근본적 고백이다. 하지만 이 폭력은 폭력적이지 않다. 반면 보이는 폭력은 앞칸을 향해 이동하는 순간마다 폭발한다. 전진하려는 자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체제가 충돌하고, 그 충돌 없이는 단 한 칸도 이동할 수 없다. 설국열차에서 ‘전진’이란 언제나 이런 보이는 폭력의 형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토대로 그 본질을 향한 근원적 질문을 제기한다. 폭력은 무엇을 위해 일어나는가? 설국열차에서 모든 폭력은 결국 식량—생존의 최소 단위—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된다. 단백질 블록, 초밥 칸의 화려한 식탁, 각 칸의 생태적 노동. 모든 폭력은 “누가 무엇을 먹는가”라는 생존의 우선권 문제로 수렴된다. 그렇기에 폭력은 표면적 잔혹성보다 존재의 근원에 닿아 있는 투쟁이며, 구조적 억압·이념 교육·희생의 강요·보이지 않는 힘의 사용까지 모두 포함하는 다층적 현상이다.
끝으로 이 영화가 반복하는 폭력의 양상은 폭력의 인문신학적 의미를 강화한다. 이 영화는 절망의 한복판에서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의 소리를 은밀히 울리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폭력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언어지만, 그 체제를 깨뜨리는 희망의 외침은 항상 꼬리 칸의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다. 이 신학적 사유의 실마리는 “다른 세계의 도래”를 요청하는 절박함이며, 폭력 너머의 문을 여는 예언적 호흡과 이어져 있다. 폭력은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말의 순간에만 무너질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그 붕괴의 힘은 탈선이라는 파국에서 발생한다.
요약하면, 『설국열차』는 폭력을 단일한 사건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성으로 확장한다. 폭력은 구조이고, 생존의 방식이며, 통치의 언어로 부드럽게 연설된다. 동시에 그 언어를 전복하려는 희망의 몸짓은 미미하면서 끈질기다. 폭력 서사가 이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변주되기에, 이 작품은 단순한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묵시적 투쟁의 장—폭력 속에서 새로운 구원의 틈을 모색하는 종말론적 세계—로 확장된다.
V. 주제의 변이: 폭력 양상의 전방위적 다양성
설국열차가 다루는 주제는 이제 그 다양한 폭력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이다. ‘폭력을 누가 행사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위장된 질서를 구축하고 또 소멸하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폭력적 폭력’과 ‘비폭력적 폭력’을 동시에 병치하며, 밝음의 질서 역시 죽음의 가능성을 은폐한 채 움직인다는 점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폭력의 양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다음 다섯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폭력의 풍경, 즉 세계를 조직하는 다양한 기제들을 보자. 영화 속 폭력은 하나의 형태에 머물지 않는다. 폭력은 끊임없이 변주되며, 서로 다른 얼굴로 세계의 작동 원리를 드러낸다. 열차는 인구를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존 가능한 인원을 정치적으로 선별하는 통치 장치다. 총리 스윈튼의 연설은 폭력의 이중성을 잘 드러낸다. 그것은 부드럽지만 설득이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의례적 주문이며, 그의 말투 자체가 폭력의 부드러운 얼굴이다. 또한 피지배 계층의 격리, 출입의 봉쇄, 이동의 제한은 구조적 폭력의 형태이고, 이동은 권리가 아니라 허가다. 음식 배분 또한 폭력의 한 양상이다. 영화 곳곳의 미장센은 생존이 얼마나 억압적 관리의 산물인지 보여 준다. 때로 폭력은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무감각, 합의를 가장한 지배, 복종을 강요하는 언어 모두 폭력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은 직접 드러나지 않아도 세계를 유지하는 가장 깊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둘째, 폭력 자체와 ‘미메시스 폭력’의 이중구조다. 영화는 두 층위의 폭력을 동시에 작동시킨다. 하나는 스크린에 직접 묘사되는 물리적 폭력이다. 도끼, 칼, 방패가 부딪치는 장면은 봉준호 특유의 리듬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폭력은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폭력을 통해서만 움직이는 세계’를 은유하는 장치다. 열차의 좁은 공간을 고려하면 대규모 전투 자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층위는 ‘계산된 전진의 한계’다. 반란군이 아무리 싸워도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늘 ‘물의 칸’ 정도다. 폭력은 전진을 가능하게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 구조는 이미 그 전진의 최종 지점을 설계해 두었다. 이에 따라, 설국열차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폭력은 정말 전진의 조건인가, 아니면 전진으로 보이도록 꾸며진 구조적 환상인가?”
셋째, 폭력은 불가능한 전진이 성공할 역설적으로 소멸한다. 영화는 폭력의 반복만을 보여 주는 대신, 어느 순간 폭력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게 한다. 꼬리 칸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물의 칸’을 넘어선다. 이 장면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체제가 금지해 온 최초의 균열이다. 적정 수치, 균형, 순환이라는 통치의 논리가 순간적으로 붕괴한 것이다. 그런데 엔진 칸에 도달한 커티스는 폭력을 이어가지 않는다. 그는 뜻밖의 정지 상태에 놓이고, 윌포드의 말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 긴 대화가 이어진다. 이 정적의 순간은 ‘폭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영화의 숨결이다. 폭력은 어떤 지점에 이르면 더는 세계를 움직일 힘을 갖지 못한 채 변질한다. 폭력의 내적 심화는 곧 폭력의 종말을 예고한다.
넷째, 폭력의 종말은 궤도이탈이라는 절대적 파국에서 일어난다. 폭력의 종말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열차가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절대적 파국에서 일어난다. 전진을 유지해 온 선형 구조가 무너지는 순간, 폭력은 머무를 자리를 잃는다. 커티스의 투쟁도, 윌포드의 통치도, 계급 구조도 일시에 붕괴한다. 이는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폭력은 선형 구조 위에서만 작동한다”는 영화의 근본 명제를 가시화하는 장면이다. 궤도가 사라지는 폭력의 문명도 소멸한다. 구조가 끝나야 폭력도 끝난다.
다섯째, 폭력 이후의 새로운 틈으로 묵시의 기원과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린다. 거대한 탈선 이후 살아남은 이는 단 두 사람—요나와 한 어린아이뿐이다. 땅의 기억이 없는 세대, 바로 그렇기에 ‘새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첫 세대다. 그들의 방한복은 북극곰의 것과 묘하게 닮아있다. 실제로 능선 위에 북극곰이 나타난다. 이것은 자연의 귀환이 아니라 창조 질서의 잔광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생태적 메시지가 아니라 묵시적 아포리즘이다. 파괴의 자리에 남겨진 미세한 생명의 불씨, 어둠 속에서 불을 들고 시대 전환을 기다리는 예언자의 형상이다. 이런 폭력의 양상을 따라 영화는 마지막 단락에서 조용히 묻는다. “폭력과 멸망의 끝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일—그것은 순진함인가, 아니면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궁극의 희망인가?”
요약하자면, 폭력은 체제를 유지하는 힘이지만, 그 체제를 끝내는 힘은 내부의 새로운 폭력이 아니라 인간 세계 너머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힘이다. 폭력은 폭력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궤도를 이탈시키는 외부력으로부터 해체된다. 그 힘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과 위치로 가늠해야 한다. 설국열차에 날아온 눈사태는 그 힘의 의의를 일깨운다. 이 영화의 가장 깊은 인상은 바로 그 힘으로 분쇄된 세계의 작은 틈으로, 폐허 위에서 피어오르는 새 세계의 희미한 불씨의 존재다. 한 마리 북극곰은 그 틈으로부터 들어온 ‘다른 힘’의 상징이다.
ⅤI. 아이와 북극곰 ― 폐허 위에 남은 가장 새로운 얼굴들
앞서 보았듯 『설국열차』의 세계는 폭력의 구조로 움직이며, 그 폭력은 전진의 강박과 선형의 억압을 거쳐 결국 탈선이라는 종말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폭력‧전진‧종말의 거대한 흐름과 평행하게, 영화는 조용히 또 하나의 이야기를 준비해 왔다. 바로 요나의 생존이다. 마지막 장면에 남은 두 아이—요나와 더 어린아이—는 모두 열차 안에서 태어난 세대다. 땅의 기억이 없기에, 오히려 새로운 세계의 첫 발자국을 디딜 수 있는 아이러니를 품는다.
요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행동도 크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이 이 영화가 끝까지 품어온 희망의 마지막 잔여물이 된다. 그의 이름이 주는 종교적 상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열차에서 태어났다”라는 사실이다.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태어난 존재가 처음으로 열차 밖 땅을 향해 걸어 나가는 순간—이것이 영화가 준비해 온 가장 미묘한 전환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요나는 구원자인가? 하지만 그 답은 “아니다.”이다. 그는 영화의 결론을 전복시키는 ‘구원자’라기보다, 폭력 이후의 출구를 처음 바라보는 새로운 원시인에 가깝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영웅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폭력, 균형, 질서, 전진의 역설을 철저히 열차 내부의 구조 속에서만 탐구한다. 요나는 세계를 설계하지도, 지휘하지도, 뒤집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폭력의 궤도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남은 자’의 얼굴이다. 따라서 요나는 구원의 대안이라기보다, 폭력 이후에 남은 새로운 출발의 문이다.
그렇다면 북극곰의 등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인간 이후, 인간 너머로부터 오는 구원의 신학적 상징에 더 가깝다. 이 북극곰의 출현은 이 영화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북극곰은 인간 이후(post-human)의 생존을 상징하는 ‘지표종’이자, 동시에 인간 문명 이전의 창조 질서 회복을 알리는 신학적 기호다. 그 장면은 히브리 창세기의 원형적 세계—인간과 동물이 분리되기 전 하나의 생태 공동체였던 우주—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북극곰의 등장은 구원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全) 피조물의 문제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신약성서의 마가복음이 전하듯 “예수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있었다”(막 1:14)라는 구절은 구원의 공감각적 의미, 다시 말해 공존재의 공동체성을 함의한다. 여기서 ‘함께 있었다’는 구원의 성취다. 구원은 인간 독점 권리가 아니라 생태 전체로 확장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은 시노하라 마사타케가 말한 인간 중심적 구원론의 해체를 상기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유가 이미 영화 속 이미지에서 먼저 탐색되었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주제를 되짚어보자. “이 영화는 궁극적 희망을 말하는가?” 이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열차의 탈선, 문명의 붕괴, 기술의 무력함은 기존 세계의 완전한 종말을 선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열차 밖으로 걸어 나갔다”라는 하나의 사실이다. 이것은 희망의 완성이 아니라, 출발이기 때문이다. 요나와 한 아이, 그리고 북극곰은 희망의 완성형이 아니라, 종말 이후에 남은 미세한 잔광, 그저 희망이 시작될 수 있는 최소한의 불씨이다. 폭력의 후유증은 여전히 크다. 폭력은 소멸하여도 불씨는 죽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분투도 이제 막 시작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의 결말에서 폭력의 종결은 외부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영화가 선택한 눈사태로 인한 열차의 탈선은 폭력 잔존의 가능성을 그나마 와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방식이다. 선형 구조 자체의 붕괴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남궁 민수가 오래전부터 보았던 희망과도 맞닿아있다. 그는 엔진 칸을 점령하는 것을 희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의 희망은 “측면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구조 내부의 개혁이 아니라, 전체 구조의 해체를 통해서만 폭력의 체제가 끝난다는 종말론적 메시지가 이 선택에 담겨 있다. 물론 폭력의 완전한 종결을 말하지 않는다. 창조 질서로의 귀환은 옛 폭력이 무저갱에 가둬졌다는 것을 함의한다. 기술과 폭력, 질서로 축조된 세계가 자연의 리듬—창조 질서—앞에서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선고일뿐이다. 폭력 잔존의 세계는 유지된다. 폭력에 저항해야 하는 일은 계속된다는 말이다.
또한, 우연한 북극곰의 출현은 곧 외부로부터 오는 필연적 구원 은총을 예지 한다. 영화에서 열차의 탈선은 눈사태라는 ‘우연’한 사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적 사유에서 우연(미크레, miqreh)은 종종 필연적 은총의 징후로 해석된다. 우연은 필연을 향한 문턱이며, 개입의 순간이다. 폭력 문명의 종말은 인간의 의지로 실현될 수 없다. 오히려 자연의 충돌—외부의 힘—에 의해 주어진다. 이는 계시록적 종말론과도 겹친다.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 이 말은 폭력의 소멸이 인간의 기술이나 의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체하는 더 큰 리듬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설국열차의 파국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며, 인간 문명이 스스로 만든 폭력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열리는 은총의 틈이다. 다시 말해, 요나와 아이, 그리고 북극곰이 서 있는 설산의 풍경은 희망의 완성이라기보다—파국 이후에도 세계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가장 희미하지만 가장 단단한 묵시의 불씨다.
정리하면, 요나의 생존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 이후의 빈자리에서 새로운 질문을 함의한다. 설국 이후에도 세계는 이어질 것인가? 아이러니지만, 이 새로운 세계는 영웅의 등장이 아니라 폭력 문명이 무너진 자리에서만 지속한다.
Ⅶ. 결론: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는가― 전진이 아닌, 이탈의 옆문 앞에서
영화를 ‘읽는다’라는 것은 이미지와 의도를 관객의 자리에서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일이다. 감독의 의도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미리 짐작할 수도 있지만, 결국 의미는 관객이 서 있는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설국열차』의 결말은 다소 느슨하게 보인다. 탈선 장면은 압도적이지만 길게 이어지고, 서사의 엔진은 곳곳에서 잠시 덜컹거리며 숨을 고른다.
그러나 이 느슨함이야말로 영화의 핵심 미학이다. 봉준호는 위기의 시대에 영웅 한 명이 세계를 구원하는 미국식 서사를 완전히 벗겨낸다. 영화는 남은 자들의 뜨거운 포옹으로 끝나지 않는다. 단지 ‘응시’로, 말없이 열린 가능성으로 끝난다. 그 순간 관객은 폭력과 공존의 사이를 끝없이 왕복하는 구조적 운명을 짊어진 존재—횃불을 든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란 결국 ‘폭력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달성되는 성취가 아니라, 폭력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다가오는 방향이라는 사실이 조용히 드러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요나는 영웅도, 구원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폭력 중심의 세계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가 멀리 마주한 북극곰도 단순한 생태 회복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구원론을 해체하고, 인간 이후의 생태적·창조적 질서를 예고하는 기호다. 설산 위에 다시 출현한 이 원형적 생명은 문명의 허구적 약속을 벗겨내고, 자연의 리듬이 복귀하는 자리에서 폭력-인간 너머의 구원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신학적 긴장은 더욱 분명해진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내부 개혁은 체제를 잠시 연장할 뿐이다. 닫힌 궤도 안에서는 어떤 진보도 가능하지 않다. 변화는 더 강한 폭력이 아니라, ‘옆으로 난 문’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민수와 요나가 바라본 그 측면의 문은 선형 세계의 균열이며, 폭력의 강제된 전진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이탈이다.
영화 속 탈선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필연적 은총의 문턱으로 읽힌다. 폭력 문명의 붕괴는 인간의 기술이나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개입과 창조 질서의 리듬 속에서 찾아오는 사건이며, 종말의 완성은 인간이 도달하는 시간이 아니라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외침과 함께 도래하는 타자의 시간, 곧 ‘그날’의 시간이다.
결국 『설국열차』의 결말은 완성된 구원의 약속이 아니다. 폭력 이후의 빈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질문이다. 새로운 세계는 영웅의 손에서 열리지 않는다. 폐허 위에 남은 두 아이와 한 마리 북극곰—그 시선에서 열린다. 그들은 이탈의 문 앞에 선 인간의 불안, 미세한 방향 전환, 폭력 이후 세계를 향해 기울어지는 조용한 눈빛의 소유자다. 그들의 시선이 이 영화가 남긴 마지막 철학·신학적 흔적이다. 그리고 영화는 끝내 이렇게 묻는다.
“우리의 열차는 언제 멈출 것인가? 전진의 폭력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탈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