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성탄절 아침에, 평소 이 즈음에 다시 읽는 성경 이야기를 에세이로 작성한 것입니다. 개인 신앙이 표현된 곳이 있어서 양해를 구합니다. 그동안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대림절 단상'을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늘의 평화가 이 땅에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아래 글의 논지는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자기 저항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마 6:13 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개역 개정판)
나라와 능력과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 것이니까요.(새 한글 성경)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 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개역 개정판)
이제 나의 목소리를 참으로 잘 듣고 나와 맺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 가운데서 나에게 특별한 백성이 될 것이다. 온 땅이 나의 것이다.
너희야말로 나에게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겨레가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러 줄 말이다.”(새 한글 성경)
이 두 본문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통치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 통치가 이 땅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 그래서 질문은 단순해집니다. 폭력이 나라·권세·영광을 독점하려는 시대에, 나는 무엇을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톨스토이의 ‘폭력 국가’와 비폭력 저항의 물음
19세기 러시아의 톨스토이는 국가를 폭력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정치 에세이들은 제정 러시아의 권력 앞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무엇으로 저항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번역된 책 제목이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국가는 폭력이다: 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조윤정 역, 달팽이, 2008). 그의 결론은 단순합니다. 폭력에 맞서는 방식은 폭력을 복제하는 힘이 아니라, 이성의 설득과 모범이라는 비폭력적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주장을 조금 더 넓게 읽고 싶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은 언젠가 국가의 정신과 충돌합니다. 중립이란 말이 자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선택하지 않음”이라는 선택이 먼저 일어납니다. 국가는 ‘국가’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강제와 배제의 장치들을 동반합니다. 법과 뉴스와 예산과 경찰과 교육, 그 모든 형태로 권력은 일상을 포획합니다. 개인은 바깥으로 물러설 수 있다고 믿지만, 대개 그 믿음이야말로 가장 먼저 포획되는 자리입니다.
오늘 예수의 기도문을 다시 펼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기도문 끝에 놓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무기력한 개인이 소유하거나 구현할 수 없는 스케일의 언어처럼 들립니다. 다만 실체가 흐릿하다고 해서 영향이 약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 단어들은 매일 우리의 삶을 흔드는 ‘세력’의 이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마음속 위안으로만 머물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언제나 통치의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한 세기의 정치 에세이가 국가의 폭력을 폭로한 것처럼, 오래전 산 위의 기도도 그 폭력에 맞서는 개인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전제
지금 예수는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기다리던 시대가 정말 오는가. 누가복음은 이 기도가 제자들에게 짧게 주어졌다고 기록하지만, 마태복음은 이 기도를 더 길게, 더 또렷하게 전합니다. 그만큼 당대의 민중은 예수의 말에 자기 시대의 절박함을 투영했을 것입니다.
이 전제가 깔릴 때,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문은 단지 경건한 장식이 아니라 시대를 향한 방향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늘을 향하지만, 그 하늘은 현실의 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은 도피의 좌표라기보다 경계와 차별과 시공간의 울타리를 넘어 움직이시는 분의 죄표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은 행동하실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관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테두리가 아니라 공동의 소유를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나 아버지라는 개념입니다. 이 분의 통치는 막무가내 무력(武力)이 아니라, 헤세드와 정의와 공의입니다. 이 무력(無力)의 방식으로 세계를 붙드는 책임의 통치자라는 선언입니다. 주의 기도는 이 전제를 붙든 채 마지막 구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끝 구문: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이렇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기도의 방법을 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대상을 스스로 한정하라는 교육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에게만’입니다. 이 문장이 오늘 나를 낯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는 기도의 문을 여러 군데 달아놓고 살기 쉬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불안이 붙잡을 손잡이를 찾을수록 “효력 있는 것”을 향해 손이 먼저 나갑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줄 것 같은 무엇, 내 삶의 무게를 덜어줄 것 같은 무엇, 나의 욕구를 성취해 줄 것 같은 무엇. 그렇게 기도는 종종 ‘현실을 견디는 기술’로 변형됩니다. 때로는 자기 스스로를 달래는 자기 최면처럼 작동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에 가장 어려운 일은 기도의 대상을 딱 ‘하나’로 결정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가능성이 많은데 스스로 제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말이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늘 1+1이었습니다. “야훼”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힘들을 붙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야훼의 항변도 오래 반복되었지만, 민중의 마음은 늘 두 갈래였습니다. 그들처럼, 오늘 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마지막 구문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이유가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신을 독점하는 배타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강하다’는 이기적인 감탄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폭력이 이 셋을 독점하려는 시대에 모든 사람을 위한 통치의 정당성과 방식이 누구에게서 더 잘 드러나는 지를 다시 묻는 자기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구문은 기도를 ‘소원성취의 언어’에서 공의와 정의로 ‘저항하는 결단’으로 돌려세웁니다.
나라, 권세, 영광: 폭력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붙드는 통치
그래서 예수의 마지막 구문에 놓인 세 단어를 다시 펼쳐 보려 합니다. 이 말들은 신앙의 장식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맡길 것인지 정하는 정치적 고백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한 번 더 번역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나라는 ‘국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통치의 자리, 질서를 결정하는 중심, 삶을 움직이는 규칙의 근원까지 포괄합니다. 예수가 말한 나라는 유대인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다스림이면서, 동시에 로마 제국의 현실을 정면으로 말할 수 없던 시대의 반대편을 겨눈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말은 영토의 소유권을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세상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질서 아래 놓이는가를 고백하는 문장입니다.
둘째, 권세는 폭력의 무게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입니다. 저는 이것을 ‘자유’와 ‘사랑’의 결합으로 읽고 싶습니다. 권세는 본래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힘을 ‘남용할 수 있음’이 아니라 ‘절제할 수 있음’으로 드러납니다. 창조주이신 야훼는 토기장이처럼 세계를 다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가 증언하는 통치자는 자기 자유에 스스로 제동을 겁니다. 사랑이라는 제어장치, 정의와 공의라는 절차, 관계라는 책임을 설정하고 그 자기 기준을 스스로 통과한 뒤에만 힘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비롯한 권력은 부수는 힘이 아니라 살리는 능력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전능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자기 권리를 내려놓는 비움의 자유입니다. 끝내 그 자유는 성육신이라는 형태로까지 낮아졌다는 점에서, 그의 권세는 무력의 과시가 아니라 자기 비움의 통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광입니다. 영광은 빛나는 외양만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를 바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히브리 언어는 ‘무거움’으로 영광을 말합니다. 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힘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하는 무게, 경박한 접근을 거부하는 위엄, 상대를 묵직하게 들어 올려 존중하게 만드는 힘 등입니다. 영광은 그 빛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무릎을 꿇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영광은 홀로 발광하는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빛을 빛으로 인정하는 타자의 응답—겸손한 수용과 경배—속에서 영광은 완성됩니다. 시내산에서의 임재나 어둠 속에 비추는 빛의 이야기들처럼, 영광은 언제나 “그분이 오셨다”는 사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현현합니다.
정리하면, 나라·권세·영광은 ‘하나님의 통치가 폭력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붙드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의 것”이라 맺는 것은 개인을 위로하는 결말이기보다, 기도의 방향을 단속하는 선언으로 읽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나님께만 기도한다는 것은 그에게 유일한 구원의 힘이 있다는 것보다 세계의 통치가 폭력의 손에 있지 않음을 고백하고, 그 고백에 내 몸을 붙이는 일입니다. 나라가 그분의 것이기에 나는 어떤 질서에 속할지 날마다 선택해야 합니다. 권세가 그분의 것이기에 나는 살리는 힘의 방식에 참여하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영광이 그분의 것이기에 어둠에 눌린 한 사람의 존엄이 다시 무게를 얻도록, 그를 들어 올리는 편에 서야 합니다.
보편적 자유인과 제사장 나라
예수의 이 기도는 마태복음에서 처음 나타난 문장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역사적 선언문 속에 숨 쉬어 왔습니다. 단적으로 출애굽기 19장 5~6절은 그것을 천명합니다. “온 땅이 내게 속하였다.” 그리고 “너희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이 선언은 마치 한 공동체의 헌장처럼 기능합니다. 통치의 최종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면서도, 그 통치가 현실에서 번역되는 자리—‘제사장 나라’—를 함께 선포합니다.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권력의 원천 소유자가 아닙니다. 제사장 나라는 ‘권력을 차지한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증언하는 공동체적 소명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이 말은 특권층의 명칭이 아니라, 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선택한 평범한 사람들의 정체성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통치의 주체를 자처하는 소수가 아니라, 민주와 자유를 선택하고 그 값을 치르는 사람들이 그 자리로 호출된 것입니다.
시대가 흘러 1세기 베드로전서는 이를 다시 적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선택받은 종족, 임금이신 하나님의 제사장 일을 맡은 사람들,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어둠에서 불러내어 놀라운 빛으로 이끄신 분의 일을 힘껏 알리기 위함이라고. 이 편지는 출애굽기의 선언을 자기 시대에 동시대화합니다. 예수의 기도 끝 구문을, 단지 예배당의 문장으로 두지 않고 ‘살아내는 공동체’의 문장으로 옮겨 적습니다.
어느 학자는 출애굽기 19장 4~6절을 이렇게 읽어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끈 사건은 이스라엘의 자발적 기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 기획이며, 그 목적은 “자유인의 비상”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하나님께 대한 배타적 소속에서 터득되는 인격적 힘이며, 그 배타적 소속의 목적은 열국을 위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이 지위는 “온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보편적 진리 아래 유지된다는 것입니다(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읽는 모세오경 1』, 대한기독교서회, 2015, 258-259).
여기서 핵심은 두 단어입니다. 자유인의 비상, 그리고 보편적 지위.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는 성전 안 종사자의 특별한 직함이 아니라, 폭력의 독점을 거부하는 보편적 자유인의 정치적 소명입니다. 이제 이 선언을 2025년 성탄절의 광장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요한 저항으로서 광장에서 드리는 기도
이제 2025년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작년 성탄절은 계엄 내란의 후폭풍 속에서 두려움 속에 지나갔습니다. 올해는 그나마 안정적으로 맞이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아직 종료되지 않았습니다. 기억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올해 대림절은 더더욱 “기다림”이 아니라 “기억”과 “준비”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가 어디에 와 있는지 발품을 팔아 찾아보자는 다짐이, 올해에는 더 현실적인 명령으로 다가왔습니다. 광장도 그 장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나에게 묻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누가 독점하려 하는가. 작년에 일어난 계엄 사태를 두고 누군가는 ‘오죽했으면’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영웅’이라 치켜세웁니다. 절체절명의 선택이었다고 변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쉬운 해석입니다. 그날의 사건은 어느 모로 보나 위법이고 삶의 위협입니다. 특히 그 어둠을 몸으로 지나온 세대는 더 잘 압니다.
한 가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무법과 비법(非法)을 통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독점하려는 시도가 한밤에 실행되었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윤리적 범죄가 아니라, 온 세계를 향한 야훼의 거룩한 통치를 가로막는 악한 무력(武力)입니다. 최악의 통치—카키스토크라시—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오래 지속되려 합니다(참조: 김명훈, 비아북, 2021).
그들이 자주 선택하는 전략은 시간 지체일 것입니다. 시간을 끌면 기억은 퇴색하고, 열정은 무뎌진다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망각하고 귀찮아하기 쉽습니다. 악은 이 약점을 잘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의 것”이라는 선언마저 자기편으로 악용하려 합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말을, 슬그머니 “아버지의 것이 곧 나의 것”이라는 도식으로 뒤집으려 합니다. 신앙의 언어를 자기 통치의 방어막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이런 시대에 저항의 방식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다림과 기억, 그리고 준비입니다. 무엇보다 예수의 기도를 반복하는 행위는 곧 기다림이며, 과거의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는 준비에 적절합니다. 이때 기도는 개인의 기복이 아니라 소란한 폭력에 맞서 조용히 계속되는 저항입니다. 통치와 자유와 영광이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선언을 내 호흡으로 되풀이하는 사회적 활동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친절, 공의와 정의로 세계를 이끌어가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의 관계적 몸짓입니다.
결국, 오늘도 주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나에게 저항의 도구입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왜 기도할 것인가—그 질문을 한 줄로 정리하는 선언입니다. 내가 붙드는 신앙(개신교)은 결국 이 한 가지 결단으로 나를 몰아붙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온 세계가 자유롭고 평화롭기 위해, 그 일에 참여하여 예수의 길을 걷겠다는 결단으로 나를 이끕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신앙을 독점하며, 나의 열심을 과시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이 세계 한복판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의 자발적 선택입니다. 1세기 어느 산 위에서 들려졌던 저 기도문은 오늘의 나를 찌르고, 그 찔림은 내 기억의 순서를 다시 바꾸어 놓습니다.
그 기억을 우리 시대에 다시 배치하는 것, 그것이 어둠과 추위에 저항하며 광장에서 드리는 나의 소박한 기도입니다.
2025 성탄절 공동체 교독문: “광장에서 드리는 저항의 기도”
다 함께: 하늘에 계시며, 땅의 신음 소리를 외면치 않으시는 우리 아버지여. 어둠이 빛을 이기려 하고, 폭력이 나라와 권세를 독점하려 했던 긴 밤을 지나, 오늘 우리는 다시금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인도자: 주님, 우리는 기억합니다. 무법과 비법으로 일상을 포획하려 했던 오만한 권력의 시도들을 잊지 않습니다. 망각을 권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기억'함으로 저항하며 '기다림'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준비하게 하소서.
회중: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아버지께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위안을 위한 주문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자유인의 결단이 되게 하소서.
인도자: 주님의 나라는 부수는 힘이 아니라 살리는 능력임을 믿습니다. 주님의 권세는 군림하는 무력이 아니라 절제하는 사랑임을 믿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화려한 외양에 있지 않고, 짓밟힌 한 사람의 존엄을 무겁게 들어 올리는 공의에 있음을 믿습니다.
회중: 우리를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장의 제사장이 되어 평화의 길을 걷게 하소서. 폭력을 복제하지 않는 이성의 설득과 삶의 모범으로 이 땅의 무너진 정의를 다시 세우는 보편적 자유인이 되게 하소서.
다 함께: 오늘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여, 당신의 비움이 우리의 용기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낮아짐이 우리의 승리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가 흩어지는 메아리가 아니라 어둠을 가르는 빛의 행전이 되길 원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문 후의 공동 행동
성탄 초 켜기: 작년 어둠을 기억하며, 그러나 그 어둠이 결코 빛을 가두지 못했음을 선언하며 초를 밝힙니다.
묵상: 기도를 마친 후 1분간, 계엄의 밤을 견뎌낸 이들과 여전히 부당한 권력 아래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침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