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헬렛의 관점에 근거한 변동하는 세계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 유한성비교
제자:장지훈 경기대 교수(서예학과)가 예서체와 해서체를 융합해 직접 썼다. 화선지에 淸墨. 2025. 12.8 게재
2025년 ‘변동불거’의 해
<교수신문>이 2025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변동불거(變動不居)’를 선정했다. 교수 18명으로 구성된 추천 위원단이 18개의 후보 문구를 제시했고, 예비심사를 거쳐 전국 교수 76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을 거쳤다 한다. 그리하여 33.6%의 지지를 얻은 ‘변동불거’가 최종 선택되었다(교수신문, 2025.12.8).
올해 후보로 추천된 5개의 문구의 공통점은 우리 시대가 ‘불안감과 불확실성은 점점 확대되고’, ‘국민적 피로감과 방향성 상실이 심화한 현실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과, 이런 시대에 ‘사람의 존엄을 가슴에 새기는 기회로 여기고자 하는 의도가 선명하다는 점’이다
한편, ‘변동불거’를 제안한 양일모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동양철학)는 최종 선택 이후 한 인터뷰에서,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고자 애써 왔다.”라고 전제하면서 『주역』의 변화무쌍한 세상을 ‘변동불거’(變動不居)로 표현했다는 제안설명을 밝혔다. 이 의미는 “항상 변하고 움직이면서 어느 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세상은 고정된 현상이 아니라 변동하는 위상, 즉 주역의 표현으로 말하면 변역(變易)의 운동이다.”라고도 덧붙였다. 이는 불교의 세계관인 ‘제법무상’과도 연동된다고 말을 이었다. 따라서 『주역』에 근거한 ‘변동불거’는 “현실을 떠나지 않고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를 찾아내”려는 의도가 명확하다고 취지를 부연했다.
이와 함께, ‘변동불거’를 통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즉, 한국 현대사가 지나치게 “격동하는” 이유는 원칙이 없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토대로 그저 “변화하는 현실에 추종할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원리의 탐구에 힘써”서, 이를 통해 “유연하게 사고하고 멀리 내다보면서 변화하는 세상의 원리를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변역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출처:교수신문 12월 8일 자). 이는 2024년 12월 이후 우리 시대가 겪는 다양한 현실을 성찰하는 데 시의적절한 인문학적 통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1417
‘변동불거’를 심화한 이해
나는 이 보도를 접하면서 한편으로는 무릎을 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만히 응시한다. 탁견에 감탄하면서도 생경한 질문에 잠시 머뭇거린다. 이유는 ‘변동불거’의 의미와 추천자의 설명 사이에 아주 미미한, 그러나 독자가 놓칠 수 있는 미세한 의미의 틈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변화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변화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원리란 무엇인가?’ 또한, “세계는 한 곳에 멈추지 않고, 변동하기에, 변화에 순응하는 유연한 삶을 살아가는 원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변동불거’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이 말을 더욱 현실적인 사유를 담은 철학적 제안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를 위해 나는 고대 히브리 문학 코헬렛의 지혜를 덧붙일 것이다. 나는 이런 ‘변동불거’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이 말을 더욱 현실적인 사유를 담은 철학적 제안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를 위해 나는 고대 히브리 문학 코헬렛의 지혜를 덧붙일 것이다. 주역의 견해와 불교의 관점이 변동하는 세계의 보편적 원리를 제시한다면, 코헬렛의 철학은 당시 자본 중심주의에 현혹된 인간의 근시안적 삶을 경고하며 이 변동을 더욱 현실적인 차원에서 해석한다. 코헬렛의 철학이 더해진다면 더욱 현실감 있는 사자성어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덧붙일 코헬렛의 철학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끝으로 결론 부분에서 ‘확장된 변동불거’ 의미에 실천 윤리 차원에서 프랑스 철학자이면서 현대 정치철학을 천착한 장 뤽 낭시(Jean-Luc Nancy, 1940~2021)의 관점을 조금 겹쳐 읽으려 한다. 이로써 변동불거의 인문학적·사회학적 의미를 보완적으로 해석한 사회 윤리를 제안해 볼 것이다.
‘변동불거’에 덧붙인 코헬렛의 세 가지 관점
먼저 이 글에서 ‘변동불거’의 이해에 내가 덧붙일 코헬렛의 관점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변동불거’가 부화뇌동을 견제하며 더욱 현실의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코헬렛의 ‘헤벨(hebel) 관점’도 반영할 필요가 있다. 코헬렛 지혜의 동기어(leitwort)인 헤벨은 단순히 ‘허무하다’라는 심리적 판단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적 개념이다. 즉, 세계의 질서를 인간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자각과 긴밀히 연결된다. 이는 ‘불확정성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 유한성’을 함의한다.
둘째, 헤벨은 인간의 존재론적 유한성을 인간이 겪는 현실 담론에서 이해한 지혜 철학 용어인 것이다. 이를 통해 코헬렛은 두 가지 생활 원리를 제안한다. 하나는 세계는 항상 변하고, 그 변화의 때를 인간은 간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과도한 욕구(특히 자본경제)보다는 지금-여기 내 앞에 정당한 수고로 얻은 ‘수익’을 만족하라는 것이다.
셋째, 이 두 원리는 결국 지혜로운 삶은 변동하는 세계를 미시적으로 관찰하며, 그 관찰을 삶의 즐거움으로 축적하여서 한 팔 벌린 정도 떨어진 사람들, 또 그 세계와 ‘공유’ 하자는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는 인간이 판단할 수 없으니 모든 사람이 과거와 미래에 기반한 불가시적 시간인 ‘현재’를 더불어 누리며 살아가는 ‘삼겹줄’ 같은 연대감을 고양하자는 것이다.
결국, 이 세 개의 주장은 코헬렛의 헤벨이 변동하는 세계 속에서 끝까지 천천히 주어진 길을 함께 걸어가자는 공동체성을 함양하는 전문술어라는 것을 함의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상황에서 ‘변동불거’에 담긴 지혜는 헤벨의 관점을 통해 ‘인간의 자기 유한성 인식’과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으로 더욱 강화되고 선명해질 것이다.
헤벨의 세 관점의 수렴:인식 유한성
앞에서 말한 세 가지 관점을 조금 더 압축하여 천천히 들여다보면, 헤벨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유한성’으로 수렴한다. ‘변동불거’와 마찬가지로 헤벨 역시 이 세계가 항상 변하고 움직이면서 어느 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일반적으로 이 말을 ‘허무하다’라고 이해한다. 세계의 변동성을 인간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벨의 초점은 ‘허무한 상태, 감정’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인식능력 한계에 있다.
다시 말해 세계는 자기 질서대로 변화하며 움직이지만, 인간은 그 모든 변화를 인식하며 뒤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와 관련해서 인간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몸의 늙어감과 계절의 변화 정도다. 세계처럼 능동적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런 점에서 “요즘 세상이 어지럽다”라는 탄식은 적확한 표현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어지러운 세상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로 재진술 되어야 한다. 세계는 변화하고 인간은 그 변화를 모두 간파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변동불거’와 헤벨의 의의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에 대한 오랜 역사를 견인한다는 점이다. 이런 고대의 지혜는 당연히 오늘날에도 동일한 효력이 있다. 즉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동하는 위상, 변역(變易)의 운동이며, 제행무상, 제법무상의 구조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헤벨을 포함할 때 이 지혜들의 공통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세계의 변동에 인간의 인식 유한성은 피할 수 없는 인간 한계라는 점이다.
결국, ‘변동불거’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이 말을 통해 듣게 되는 것은, 변화무쌍한 세계에 대해 단순한 “헛됨”의 탄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앞에서의 인간 이해의 한계, 그리고 끝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기 성찰이다. 궁극적으로 헤벨은, 자기 나름의 리듬으로 ‘지속하는’ 세계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사이의 조용하지만 냉혹한 간극을 좀 더 깊이 성찰하게 한다
변동불거와 코헬렛의 공동질문-흔들리는 세계인가, 나인가
인간의 인식한계 이해는 오래된 미래의 질문이다. 고대 히브리 시인은 ‘이 터(세계)가 흔들리면 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시편 11:3)’를 물었다. 이 질문은 2025년 ‘변동불거’의 제안 의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변하여 움직이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변동불거’라는 말을 좀 더 살펴보면, 이 말속에 두 가지 층위가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세계 자체의 끊임없는 변화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기술, 정치, 기후, 일상의 감각 등 어느 것 하나 어제와 같지 않은 시대다. 무엇보다 그 변화는 양상이 아니라 속도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그 변화를 감당해 내야 하는 주체(인간)는 불안해진다.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변동불거’라 부르며 우리가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의 흔들림”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변화는 언제나 있었지만, 오늘의 우리는 그 변화를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변화를 ‘속도로만’ 이해해서는 변동하는 세계에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빠르게’에 지배된 삶으로는 세계 변동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이 빠름에 대응하는 해법으로 제시된다. 정책과 관리 기술 역시 그 빠름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방향으로 편향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변동’을 예측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결과는 늘 ‘만물의 피곤함(전 1:8)’, 피로한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변동이라는 현실은 사실 속도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헤벨에 따르면(전 1:3-8) 변동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속도가 아니라 속성의 문제다. 다음 네 가지 속성이 뚜렷하다. 첫째, 세대가 가고 오는 것과 해 뜨는 것 같은 반복성이다. 둘째,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자율성이다. 셋째, 물이 바다로 가는 것 같은 회귀성이다. 넷째로 이 변화 속에서 견고한 땅의 모습 같은 항구성이다. 따라서 이런 변동의 속성을 반영한다면, 거꾸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듣게 된다. 정말 인간은 이 변동불거의 세계를 ‘관리할 수’ 있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오히려 변하는 세계가 우리를 자유롭게 휘감고 이끌고 지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변동불거’라는 말은 헤벨의 의미에서 속도계가 아니라 인간의 불안이 불가피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울리는 경종과 같다. 결국, 헤벨의 의미와 연동한 ‘변동불거’는, 이 세계 속에서 피조물로 살아가는 인간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묻는 실천 윤리의 이름이다. 이처럼 헤벨의 의미를 덧붙인 ‘변동불거’는 결과적으로 세계 속에 ‘거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세 가지 사실을 강화할 수 있다. 하나는 변동에 대한 인간의 이해 불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변동하는 세계에서 유한한 인간의 의의다. 끝으로 인식 유한성에 근거한 까르페 디엠의 재발견이다.
(1) 코헬렛의 헤벨: 이해 불가성과 ‘지속하는 세계’의 아이러니
헤벨을 변동과 관련지어 읽을 때 그 첫번째 의의는 세계의 지속성과 이해 불가성의 공존이다. 잘 알다시피, 코헬렛은 그의 글 세 번째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 특히 ‘만사(萬事)’라는 한자어의 히브리어 표현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때’라는 의미가 스며있다. 다시 말해, 자기 즐거움을 위해 추구하는 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런 ‘때’를 정확하게 판별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따라서 코헬렛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서로 대조되는 ‘때’를 나열함으로써 ‘때’가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낳을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지요.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 주어지는 때를 자신의 것으로 선택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만 떼어놓고 보면, 코헬렛의 때는 주역이 말하는 ‘때’와도 통한다. 변화에는 나름의 시기와 리듬이 있다는 것이다. 코헬렛의 관점과 주역의 차이는 이 ‘때’의 문제를 신의 영역으로 돌리는가 자연에 맡기는가 하는 점이다. 코헬렛의 경우는 이 점을 더욱 강화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맞추어 알맞게 만드셨지요. 그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영원까지도 생각하게 하셨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지요.”(참고, 전 3:11 새한글성경)
결국, 때를 인식할 수 없도록 감춘 것은 신의 의지다. 이것을 주역의 관점으로 달리 말한다면, 세계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일깨우는 관점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때”의 존재보다 그것의 ‘측량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때는 분절되어 인식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변화의 세계에는 분명 어떤 질서가 있다. 이렇게 볼 때 ‘변동불거’는 인간의 시선으로 그 전체 그림을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되짚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한계를 수용하는 자기 성찰적 고백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코헬렛은 변동불거의 세계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 인간의 수고로 그것을 이해하고 심지어 통제할 수 있다는 르네상스적 인간 능력을 반성하게 이끈다.
정리하면, 코헬렛이든 주역이든 세계는 움직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움직임을 감지할 뿐 주도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도 연동한다. 여기서 코헬렛은 그것을 ‘세계 자체의 힘’으로만 여기지 않고 나아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인간이 만약 그 움직임을 다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만이다. 곧 ‘헤벨’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날 바벨탑은 높이 오르는 탑이 아니라 깊이 내재한 ‘칩’으로 변형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유한성은 인간에게 불행인가? 코헬렛과 주역의 답은 이구동성으로 ‘아니다.’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궁극적 행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는 스스로 존재하며, 반복되고, 회귀하며, 항구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 앞에 주어지는 ‘때’를 소중하게 여기고 적절하게 ‘선택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이 공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 충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까르페 디엠, 즉 지금-여기, 가까운 이들과 자족의 비밀을 함께 누리는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헤벨에 근거한 변동불거에 대응하는 원리는 인간의 공동체성이다.
(2)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과 ‘지속하는’ 세계와 함께 걷기-인간 존재 의의
인간의 인식 유한성에 근거한 헤벨의 두 번째 의의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를 일깨운다는 점이다. 우선 코헬렛이 말하는 변동의 네 가지 속성은 앞서 살펴본 대로 반복성, 회귀성, 자율성, 항구성이다. 그의 글 첫 번째 장에서 시문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 글에서 코헬렛은 “해는 뜨고 지지만,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다, 땅은 견고하다. 바람은 돌아 불고, 강물은 흐르지만, 바다는 차지 않는다, 자연은 돌고 돌며, 땅은 견고하게 서 있다”(참고. 전 1:2-7 축약)라고 자기 나름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노래한다. 이 노래에 반영된 네 가지 속성은 ‘분절되면서 지속하는 전체’로 드러난다.
이 상황에서 인간은 어떠한가. 그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 단 한 번의 생애만 주어진다. 인간에게 헤벨은 삶의 종말이다. 이런 점에서 코헬렛의 헤벨은 세계무상을 말하는 선언이라기보다 ‘계속 자기 궤도를 따라 반복하며 전진하는 세계’와 ‘돌아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인간의 인생’ 사이에 놓인 깊은 크레바스를 상징한다. 세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간 없이도 유지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한계적 존재 없이는, 세계도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없다. 가꾸고 다듬는 이가 없이는 세계 유지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속적 존재가 아니다. 이미 흙으로 돌아간 자들의 슬픔, 사랑, 분투는 세계의 큰 흐름 속에서는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 버린다. 코헬렛의 헤벨은 바로 이 아이러니를 주목한다. 지속하는 세계와 유한한 인간 사이의 틈에 대한 탄식이다.
결국, 헤벨에 근거할 때, 변동불거의 인문학적, 사회학적 의미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 세계는 변동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변동할 수 없다. 운명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한계적 인간이 ‘변동불거’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기 확신일 것이다. 인간은 세계 변동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은 그 세계 한가운데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헤벨은 세계 변동을 인정하면서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자체를 일깨우는 지혜로 작동한다.
(3) 세대·공동체성·부화뇌동하지 않는 삶
인간의 인식 유한성과 관련된 헤벨의 세 번째 의의는 ‘까르페 디엠’의 재발견이다. 이 변동불거의 시대를 달려가는 실천 윤리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이 부화뇌동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결하다. 무엇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인간에서 겸허한 인간으로 자기 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삶이 한 세대 안에서 소비되고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결심이다. 나의 세계는 곧 다음 세계이며, 다음 세계는 또 그다음 세계로 이어진다.
(4) 정리-무위의 공동체성
결국, 이 인식은 인간이 자기 세대에 자기 욕망만 성취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세계에 수평으로 이어지는 동시대성과 수직으로 이어지는 세대의 흐름을 함께 아우르는 공동체성을 함양하도록 이끈다. 여기서 낭시가 말한 ‘무위(無爲)의 공동체’를 떠올릴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는 우리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내는” 작업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서로의 유한성과 상처, 죽음에 노출된 존재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이미-함께-있다’라는 사실을 서로 일깨운다. 이로써 ‘함께-있음(être-en-commun)’이 드러내는 공동체성의 연대를 실현한다.
요컨대, 헤벨에 근거한 ‘변동불거’의 삶은 거창한 국가적 공동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지금 여기의 삶을 수용하는 것이다. 유한한 세대들이 서로를 지탱하며 이어 걷는 이 무위의 공동체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면 충분하다.
‘변동불거’의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실천 윤리:인간 인식 유한성 인식, 공동체성
‘변동불거’는 우리 시대의 실천 윤리로 충분하다. 앞서 살펴본 대로, 코헬렛과 주역과 불교의 통찰을 종합하면 이 윤리의 핵심은 세계 변화 현상에 대응보다 ‘인간의 자기 이해’에 잇대어 있다. 주역은 변동 속에서 변하지 않는 도를 찾으려 했고, 불교는 무상의 진리를 통해 고(苦)의 구조를 이해하고 해탈로 나아가려 했다.
여기에 코헬렛은 ‘세계에는 리듬과 ‘때’가 있지만, ‘나와 너’는 그 전체를 결코 다 읽지 못한다는 인간의 유한성을 못 받는다. 변화의 법칙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다 해도 인간의 유한성은 그의 욕망 자체가 이미 헤벨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따라서 변동불거의 시대에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변화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인간 능력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한 지성,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인간 유한성의 자각이다.
이처럼 코헬렛의 헤벨은 특히 2025년 우리에게 생각보다 더 실천적인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이 세계를 다 이해하고 있는가?’가 아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도, 어떻게 책임 있게, 오늘의 삶에서 기쁨을 잃지 않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되짚어보면, 고대의 지혜자들, 특히 코헬렛이 반복해서 도달하는 결론은 놀랍게도 인간에 대한 순수한 허무주의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제안한다. 그것은 ‘오늘 하루로도 충분한, 즐거운 삶의 향유’다. 코헬렛의 경우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낙을 누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도다.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참고. 전 5:19)라는 까르페 디엠을 강조한다. 이처럼 ‘변동불거’의 세계, 헤벨의 현실 한복판에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으니 포기하라’가 아니다. 오히려 장자의 견해처럼 자기 앞에 놓인 미미한 사건이라도 ‘찰기시(刹己視, 자신을 비워 사물을 ‘그대로’ 보려는 태도)’ 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의 ‘만물제동(萬物齊同, 모든 만물(萬物)이 도(道)의 관점에서는 차별 없이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평등주의적 세계관)’의 가치까지 되짚어보라는 것이다. 결국, 헤벨은 오늘 내 앞에 주어진 밥 한 끼, 내가 감당해야 할 노동, 맺어진 관계 속의 작고도 구체적인 기쁨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삶, 그것을 모두와 나누려는 행동으로 실현된다.
한편, 코헬렛 지혜의 전문 연구가이면서 미국 반더빌트 대학원의 히브리어 성경 교수인 C-L. 시아우(Choon-L. Seow)에 따르면, 코헬렛의 시대 사람들은 모두 자본 축적에 열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과잉되어 삶의 토대를 잃었다. 수고한 만큼 주어지지 못한 수익에 절망했다. 인간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 욕망의 세계로 나갔지만 돌아온 것은 ‘헤벨’이었다. 이런 관찰에는 두 가지 윤리적 지향이 함께 들어있다. 하나는 ‘자기 삶에서 과잉된 욕구를 마구 추구하려는 유혹으로부터 물러서기’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의 변동 아래에서 주어진 몫으로서의 행복을 수용하기’이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불행이 아니다. 이 점은 고대 지혜자들의 한결같은 권면이다. 이는 세계와 타인을 ‘내 계산 속에 다 집어넣으려는’ 태도를 견제하고 ‘나와 너’ 그리고 ‘배제 없는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인간에 대한 겸손을 추구하도록 돕는다. 이는 무책임한 체념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서의 자기 삶에 대한 성실한 응답에 이른다.
결국, ‘변동불거’의 확장된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선과 기쁨을 더 가볍게 보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큰 해답,’ 거시 담론이 아니라, 계속 흔들리는 나의 세계, 흙으로 돌아갈 운명을 지닌 인간이 겪는 미시 담론에 충실해진다. 그리하여 과거나 미래를 토대로 오늘 주어지는 삶의 몫을 성실하게, 동시에 기쁘게 살아내려는 작은 결심을 소중하게 실현한다는 것이다.
결론-‘변동불거’ 위에 겹쳐지는 세 개의 고전 지혜와 하나의 현대정치사상
이제 다시 올해의 사자성어로 돌아가 보자. 주역의 언어는 변동불거의 시대를 변역의 운동으로 읽으며, 그 안에서 도를 찾으라고 말한다. 불교의 언어는 무상의 세계를 인정하고, 집착을 내려놓아 고를 넘어서는 해탈의 길을 연다. 여기에 코헬렛의 언어, 헤벨을 겹쳐 읽을 때 변동불거는 또 다른 빛을 얻는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끝내 그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인간,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몸과 반복적으로 ‘지속하는’ 세계 사이의 간극을 자각하는 인간. 이 자각은 우리를 허무로 몰아넣기보다, 도리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요구한다. 즉 이해 불가성을 인정하는 지성의 겸손, 유한성을 기억하는 몸의 자각, 그런데도 여전히 오늘을 살아내려는 작은 기쁨과 책임의 윤리이다.
따라서 ‘변동불거’로 규정된 시대, 우리는 더 많은 이론을 주장하기에 앞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함께 머무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이 좋겠다. 코헬렛의 헤벨은 그 지혜의 입구에서 우리에게 되묻는다. “세계가 계속 변하는 가운데, 결국 흙으로 돌아갈 너는 오늘 무엇을 ‘네 몫’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은 올해의 사자성어 ‘변동불거’가 일시적 유행어가 아니라 우리 시대를 비추는 인문학적 거울이라는 것을 더욱 일깨울 것이다. 결국, 이 종합된 의미의 ‘변동불거’는 변동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이가, 낭시가 말한 ‘무위의 공동체’—완성된 성취가 아니라 서로의 유한성이 드러내는 함께-있음—로 초대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시대적 명명이다.
요컨대, 헤벨의 의미가 더해진 ‘변동불거’는 우리 시대를 비추는 인문학적 거울이자, 무위의 공동체성을 향한 실천 윤리의 이름으로 기능할 여지가 더 커진다. 그 윤리는 무엇보다, 더 많이 성취하고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버티도록 곁을 지키는 삶을 가리킨다. AI라는 새로운 불확실성과 자기 살을 깎아내리는 무모한 경쟁의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 이 속에서 이런 혜안은 오늘의 대학과 우리 사회가 다시 공동체성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실천적 당위성을 제공한다. 탁월한 자기 성찰의 언어를 선정해 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